보드라운 위로로 돌아온 그녀들의 이야기

영화 '보드랍게'
영화 '보드랍게'

11회 광주여성영화제에서는 '위안부'라 불렸던 여성들을 다룬 영화 두 편이 상영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였던 김순악의 삶을 재현한 ‘보드랍게’와 미군 ‘위안부’였던 기지촌 여성 박인순의 삶을 다룬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이다.

두 영화는 김순악과 박인순을 피해자의 모습으로만 박제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오롯이 재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옥’(玉)자는 양반이 쓰는 이름이라 안 된다고 해서 순‘악’이 된 ‘김순악’은 경북 경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야마다 실공장으로 가는 줄 알았던 그녀가 끌려간 곳은 일본군 ‘위안소’. 그곳에는 ‘김순악’이라는 이름마저 사라지고 없다. 대신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가 있을 뿐이다.

해방 이후 그녀는 못 배우고 무식한 자신을 탓하며 차마 집으로 가지 못 하고, 이제는 알고도 술집으로 갈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해 유곽 생활, 미군 기지촌 ‘색시 장사’, 식모살이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박문칠 감독은 해방 이후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40~50년 동안의 그녀의 삶에 주목한다.

인간의 삶은 어느 한순간 캡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발자취 자체가 곧 그녀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만이 아닌 다양한 이름을 가진, 피해자 이전과 이후가 삭제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낸 인간 김순악이 있다.

여성 활동가들의 인터뷰와 낭독으로 재현되는 김순악의 삶은 놀랍게도 여성들에게 위로와 눈물을 선사한다. 포장되지 않은 날 것 같은 그녀의 삶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임신한나무와도깨비'.
영화 '임신한나무와도깨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다큐멘터리 같은 픽션 영화로 한국전쟁 때 피난 가던 길에 부모에게 버림받고 짜장면 세 그릇에 팔려 40년 넘게 미군 위안부로 살아온 박인순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의정부 미군부대 산자락 동네인 ‘뺏벌’에 살고 있다. 이제는 쇠락하여 재개발 철거를 기다리고 있는 곳, 뺏벌.

이 영화 역시 피해자 박인순만이 아닌, 뺏벌에서 살아가는 인간 박인순을 보여준다.

고물을 줍고 살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지금이라도 몸을 팔아서 살고 싶은,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의 눈알을 파먹고 싶어서 독수리가 되고 싶은,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은 여자 박인순 말이다.

영화는 죽음과 가까이 맞닿아 있는 기지촌에서 그녀가 살아남은 것이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강해서인지 모른다고 묻고 있지만 거칠 것 없이 당당하게 살고 있는 박인순의 모습을 통해 답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저승사자들은 이승을 헤매는 유령들을 데려가기 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튼튼한 두 다리로 버티고 있는 박인순은 자신의 그림과 삶으로 만든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듯 지어내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와 박인순의 이야기를 통해 아주 비천하다고 여겨진 여자들의 몸속에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음을, ‘뺏벌’에 버려진 채 차마 눈 감지 못한 채 널려있는 여성들의 죽음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끔찍하더라도 우리가 그녀들을 있는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이고, 참말로 애뭇다(고생했다). 이렇게 보드랍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김순악)

비참하고 억울한 삶이 자신 탓이 아니라는 따뜻한 말과 위로를 기다리며 성실히 살았던 김순악과 숱한 죽음 앞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로 저항하며 복수극을 펼치는 박인순.

어째서 그동안 우리들은 그녀들에게 따뜻하고 보드라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그녀들에게 보드랍고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보자. 그녀들에게 건넨 그 위로는 아마도 우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주 천천히, 아주 보드랍게.

영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11월 11일 (수) 오후 7시30분, ‘보드랍게’는 11월 12일 (목) 오후 7시에 롯데시네마 충장로 5관에서 상영된다.

두 영화 모두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GV)가 진행된다. 11회 광주여성영화제 상영 영화는 전편 무료이고, 홈페이지(www.wffig.com) 사전예약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안영숙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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