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갈피갈피]광주공원

 일본은 1913년 성거산 일대 1만여 평 땅을 공원으로 만들고 일본문화를 심었다. 일제가 세웠던 `신사’ 자리에 1961년 들어선 ‘우리 위한 靈의 塔’. 

서울의 남산, 대구의 달성공원, 인천의 월미도, 그리고 광주공원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혹은 유원지)이라는 점과 이들 모두 과거 일본 신사(神社)가 있다는 이유로 공원이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공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97년이다. 서울 종로2가 원각사 터에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이 세워진 것이 시초였다. 하지만 많은 근대문물이 그렇듯 우리에게 공원도 단순히 숲이 우거진 곳에 시민들이 모여 휴식을 즐기는 장소 이상의 것이었다. 이 점 역시 광주공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주공원의 본디 이름은 성거산이었다. 고려시대에 성거사란 절이 있었던 까닭에 이렇게 불렸고, 그 후 조선시대에도 향교와 사직단이 있어 각별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던 곳이 어느 날 갑자기 공원이 된 내력은 이랬다.

성거산이 어느날 공원이 되다
1906년 한 무리의 일본군들이 성거산의 한 자락이던 지금의 사직단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침략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거산에 진지를 마련한 것은 이곳이 광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는 곳이어서 언제든 맘만 먹으면 포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1년 전 서울 남산에 대포를 걸어놓고 외교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일을 광주에 와서 고스란히 재현하려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 이 부대의 병사들이 의병들과의 전투 중에 죽은 걸 애도한다며 충혼탑을 세웠는데 그곳이 지금 서오층석탑 근처였다. 사실 이 충혼탑이란 것은 석축을 쌓고 뾰족한 돌기둥 하나를 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후 한 세대 넘게 광주공원이 겪게 될 운명은 이때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맨 먼저 일제는 광주-남평간 신작로를 낸다며 성거산을 두 동강이 냈다. 오늘날 성거산과 사직산(사직공원이 있는 산)을 별개의 산처럼 여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무렵에 건설된 신작로 때문이었다.
합방이 되자 이제 우리 땅은 마치 도마 위에 오른 횟감처럼 이리저리 도륙됐다. 처음엔 시내 곳곳에 왜식 건물들이 세워지더니 1913년에는 성거산 일대 1만여평의 땅을 공원으로 만든다며 삽질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네들의 개국시조인 천조대신을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신사를 세우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처음 신사의 모습은 옹색했다고 한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3년 뒤 조금씩 확장을 거듭해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즉 신사로 오르는 길에는 돌계단을 놓았고, 들머리엔 거대한 도리이(鳥居, 일본신사 앞에 세우는 `ㅠ’자형의 조형물)도 세웠다. 물론 종교적 열정만이 신사를 확장한 이유는 아니었다. 신사가 들어선 공원은 이제 일본문화의 인큐베이터 구실을 했다.

해방후 광주신사 하루만에 파괴

본래 있던 솔숲과 대숲을 걷어내고 심었던 벚나무는 10년 만에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광주거주 일본인들은 이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았다. 봄이면 신문이나 잡지들은 광주공원의 벚꽃사진을 1면에 실었고, 전국의 벚꽃 명승지의 하나라고 떠벌였다. 또 매년 4월과 10월이면 이른바 춘추대제를 연다며 공원은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미센 소리와 함께 신사 주변의 나뭇가지엔 이 땅에서 한 방울의 피와 땀이라도 더 짜내야겠다는 소망을 담은 종이쪽지(오미구지)가 주렁주렁 내걸렸고, 공원 주변에선 스모나 검도시합을 여느라 연일 부산을 떨었다. 이렇게 30여년 세월 동안 광주공원은 생경한 일본문화가 판치는 이역의 땅이었다.
해방 직후 다른 도시에서처럼 광주신사도 하루 만에 파괴됐다. 하루는 분노의 불길이 타들어간 시간치고는 너무 짧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공원에 가면 타다만 재처럼 찜찜한 뭔가가 있다. 돌계단이나 벚나무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신사 자리에 1961년 현충탑을 세운 것이 과연 바람직한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도 아니다. 광주공원에 담긴 뼈아픈 역사를 모른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05년 7월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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