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이해와 욕구, 우리의 사랑이 삭막하지 않기를!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를 도약시키며 높은 경지로 이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해에 수없이 실패한다. 그것이 생식이 아닌 성취이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를 도약시키며 높은 경지로 이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해에 수없이 실패한다. 그것이 생식이 아닌 성취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머물도록 허락한 실체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들었다. 희미한 불안이 찾아왔다.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실료빈이 얘기한 것이 다가 아니라는 그런 느낌. 코아티는 실료빈이 나쁜 의도가 있거나 비밀스럽고 악한 존재라는 의심은 하지 않았다. ‘아니야. 실료빈은 선해, 나만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그 외계인이 가끔 뭔가를 슬퍼하고 경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호기심 많은 소녀 코아티는 부모님 몰래 홀로 우주선을 타고 모험을 떠난다. 연방기지에서 점검을 받고 물품을 실은 코아티는 빛과 암흑의 망망대해로 출발한다. 잠깐의 동면에서 깨어났는데 문득 우주선 안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정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고향 행성을 떠나온 다른 종족의 소녀 실료빈. 보이지 않는 소녀는 감각체계에 붙어 정보를 파악했고 발음기관을 빌려 말을 걸었다. 다른 생물의 뇌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종족은 숙주의 몸에 기쁨을 주거나 불쾌감을 주어 안전과 위험을 알릴 수 있었다. 낯선 존재의 괴이함에 당황하던 코아티는 이내 호기심으로 실료빈에게 다가가고, 둘은 친구가 된다. 우주선은 실료빈의 고향별로 날아간다. 코아티는 행성을 탐사하다 그곳에 닥친 비극을 발견한다.

모종의 이유로 방치된 종족의 포자들이 부화했다. 교육받지 못한 씨들은 그곳에 파견된 인간 요원들을 숙주삼아 뇌를 파먹었고, 그들은 강한 충동으로 성교를 나누고 해변을 헤매다 아기가 된 채로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두 소녀는 상황을 알리러 연방기지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런데 우주선 안에서 실료빈이 이상행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점점 패닉에 빠지는 실료빈을 달래고 또 달래며, 코아티는 상황을 정리한다. 우주선 곳곳에 난폭한 씨들이 퍼졌고, 후에 접근하는 생명들이 속절없이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그녀는 친구가 죄책감에 잠식된 채 생을 마감하는 것도, 모험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코아티는 근접한 항성에 다이빙하기로 결심한다. 두 소녀가 생애 마지막으로 할 멋진 일, 인류의 구원이었다.

이해는 생식 아닌 성장

서로의 공통점이 만든 안전지대에서, 편견이나 두려움 없이 위로와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은 아마도 모두가 바라는 관계의 이상일 것이다. 자신의 세상을 버리고 떠나온 두 소녀의 대화는 합리적이면서도 따스하고, 사랑으로 충만하면서도 담백하다.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한 관계의 상처가 치유되는 듯. 그러나 둘의 유대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코아티는 낯선 존재인 실료빈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조심스레 그 내면으로 접근했으며, 실료빈은 두려움과 자기방어를 떨쳐내어 코아티를 안으로 들였다. 세상 모든 이해는 별과 별이 충돌하는 에너지만큼의 어려움을 동반한다.

욕구는 이해의 하위단계임이 틀림없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의 욕구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해가 기본 밑바탕이 된다면 욕구를 해소하는 것은 버튼을 누르듯, 스위치를 켜듯 간단해질 수 있다. 그럼 관계의 궁극적 목표는 오직 이해인가? 하지만 우린 욕구를 무시할 수 없다. 아무런 욕구 해소 없이 충만한 관계는 신 또는 성인의 것이리라. 실료빈은 코아티가 그녀를 받아들인 보답으로 성적 기쁨을 준다. 기막힌 상징이다. ‘기브 앤 테이크’ 명목아래 세상엔 얼마나 삭막한 관계들이 많은지. 그러나 두 소녀의 교환은 삭막해지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고 사랑스럽다.

“친애하는 실료빈, 어떻게 끝나더라도 우리가 정말 좋은 친구였다는 거, 같이 모험을 했다는 거, 그리고 서로를 구했다는 걸 기억해줘. 네가 나한테 뭔가 나쁜 일을 해도 나는 그게 진짜 네가 아니란 걸 알아. 그건 우리가 너무 달라서 생기는 사고일 뿐이야.”

“우리 우주선은 위협이 될 거야. 발견하는 누구에게든. 그런 일이 생기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일종의 의무 같지 않아? 난 정말이지 좀비가 돼서 떠돌아다니고 싶지 않아. 그리고 저기 바깥엔 예쁜 노란 항성이 보여.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아?”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인간은 오로지 고리타분한 두뇌와 심장으로 상대의 바람과 두려움을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코아티의 사정은 좀 어려웠다. 실료빈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으로 코아티를 완벽히 파악했고, 그래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필요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끝내주는 능력 따위 없는 인간 소녀 코아티는 그러나 타고난 호기심으로, 자신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실료빈의 불안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커다란 공백 속 너무 다른 두 존재가 만나 이루어낸 이상은 그래서 희망이라 불러야 한다. 추구되어야만 하는 이상이 아니라, 어렵고도 먼 것을 향한 안타까운 희망이라고.

말, 표정, 몸짓. 인간은 이런 것들로 소통한다. 흔히 표정이나 몸짓은 간접정보이며 말만이 직접정보라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말도 진실을 정확히 담는 것은 아니다. 심중을 헤아린다고 하듯, 결국 우리는 간접정보만을 나누어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직접정보를 바로 교환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은, 아무런 여과 없이 의도를 전달하고 가슴에 품은 진실을 직시할 수 있을 테지. 왜곡된 감정을 나누고 그 간극에 수없이 배신당하는 우리가 선망하고 탐낼만한 힘이다. 그러나 내일 갑자기 그 힘이 주어진다면 인류는 파괴될 것이다. 날것을 감당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까.

신은 우리에게 두 귀와 입 하나, 표정, 팔다리와 더불어 ‘오해’를 주었다. 그리고 우린 오랜 세월 수많은 ‘상처’를 획득했다. 그렇다. 오해와 상처가 우리가 가진 이점이다. 정보를 교환하여 쉽게 얻은 이해란 단지 파악이라 불러야할 건조한 것이라는 걸 우린 알고 있다. 나의 일부를 파괴하여 너를 알아가야 한다는 걸, 아문 살갗과 험한 흉터 위에 돋아난 신뢰가 뜨겁고 질긴 근육을 가진다는 걸 적어도 알고는 있단 말이다. 타인, 타 집단을 이해하는 과정은 우리를 도약시키며 높은 경지로 이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해에 수없이 실패한다. 그것이 생식이 아닌 성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가 품은 것에 면역력이 없다. 겪지 못한 새것이기에. 살아남으려면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해야한다. 그러나 상처가 없다면 성장도 없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우리는 서로가 품은 것에 면역력이 없다. 겪지 못한 새것이기에. 살아남으려면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해야한다. 그러나 상처가 없다면 성장도 없다.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가상의 사랑, 가상의 행복

“제가 마음먹으면 당신은 1시간 만에 저한테 빠질 걸요? 그건 제 탓이 아니에요. 본인 스스로 빠져드는 거니까요. 당신이 이렇게 가깝게, 거리를 좁혔잖아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다거나, 마음이 안 채워진다거나, 그런 느낌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 이와이 슌지 ‘립반윙클의 신부’

나나미는 플래닛이라는 SNS에서 남자친구를 사귀고 결혼한다. 하객 리스트를 작성하는데 빈약한 신부석이 초조하다. 나나미는 무엇이든 서비스한다는 플래닛 계정 아무로에게 하객 고용을 의뢰한다. 그 후로 나나미는 청소하다 반지를 발견해 남편의 뒷조사를 할 때도, 남편과 바람난 여자의 애인이 찾아와 협박할 때도 아무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때마다 아무로는 언제나 효과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시어머니에게 결혼식 하객을 고용했단 사실을 들키자 나나미는 속절없이 이혼 당하고 만다. 이리저리 헤매다 호텔 청소부로 취직하고, 아무로는 그녀에게 시급 높은 일자리를 소개한다. 결혼식 하객 알바. 거기서 나나미는 마시로라는 여자를 만나 친구가 된다. 자신을 배우라 소개한 그녀의 플래닛 아이디는 ‘립반윙클.’ 동화 속 주인공, 어느 날 전혀 다른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된 남자의 이름.

청소 알바를 소개받은 나나미는 호화스런 저택으로 가게 된다. 커다란 집 이곳저곳 온갖 잡동사니와 코스튬과 택배가 널려있고, 2층에는 독을 품은 생물이 담긴 수조가 가득한 푸른 방이 있다. 한숨 자고 눈뜨니 머리맡에 마시로가 와있다. 이제는 메이드라며 해맑게 웃는 그녀. 둘은 함께 일하며 살게 된다. 어느 날 마시로가 쓰러지고, 집을 찾아온 매니저에 의해 나나미는 그녀가 AV 배우라는 것, 저택의 주인이라는 것, 그리고 암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갑작스레 많은 비밀을 알게 된 나나미는 혼란스럽다. 아무로는 마시로의 의뢰가 ‘친구가 필요해’였단 걸 말해주고, 나나미는 그녀의 친구가 되겠노라 다짐한다. 둘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는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벌이고, 술에 취한 두 신부는 푸른 방으로 올라간다. 마사로는 같이 죽어주겠냐 묻는다. 나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사람들은 관계에 두 가지를 기대한다. 내면을 이해받기, 욕망을 충족하기. 좋은 관계는 이 두 가지가 안정적, 지속적으로 교환되는 것이다. SNS와 포르노, 수많은 기대들이 파도처럼 일어나고 잦아들고 다시 휘몰아치는 현대사회를 대변하는 발명품들이다. SNS는 이해받을 기대를, 포르노는 욕구 충족의 기대를 효과적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이들의 위대함엔 치명적인 넌센스가 있다. 정보를 토대로 이해한다는 넌센스, 욕구를 충족하여 행복해진다는 넌센스. 겪을 대로 겪은 많은 이들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가상의 정보와 쉽게 얻은 행복은 파도처럼 순식간에 부서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절망조차, 쉽게 해소할 수 있다.

흔히들 꿈이 솔직하다지만 오해다. 간혹 머리맡엔 엉뚱한 꿈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하기에. 가상세계가 개척된 후로, 현실만이 의미 있고 진실하며 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가치 없고 거짓될 뿐이라는 관념이 은연중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또한 오해다. 오직 가상에서 감춘 속내를 내보이는 이들의 진심도 분명 진실이므로. 가상과 솔직은 분명 상충되는 가치, 둘의 충돌이 야기하는 부작용은 아마도 현실의 진실을 소외시킨다는 것이겠지. 진실을 딛고는 솔직할 수 없는 이들, 거짓말을 방패로 내면을 지키는 이들이 끝내 서로 부닥쳐 이해하고 두 손을 부여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희망이다. 희망이 쉽다면 그건 사기다.

“이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다들 정말 친절하게 대해줘. 근데 말야. 그렇게 쉽게 행복이 오면 난 깨져버려. 차라리 돈을 지불하는 게 편해. 돈은 아마 그래서 존재하는 걸 거야. 타인의 진심이나 친절함, 그런 것들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다들 깨져버릴 테니까.”

- 이와이 슌지 ‘립반윙클의 신부’

상처는 늘 아프다. 매번 새롭기 때문이다. 우주에 별과 별의 충돌은 너무나 드물고, 외계인을 만나는 일도 아직은 묘연하고, 조그만 별에 복닥복닥 모인 이들도 부닥쳐 겪는 방식보단 편한 등가교환의 연속을 택하는지. 손닿지 않는 희망보다는 빠른 이해가 우리를 안심시킨다. 사회는 적합한 플랫폼을 만들어낸다. 직접정보를 맹신하는 SNS는 마치 황새 따라가는 뱁새 같다. 프로필을 꾸미고, 피드로 취향을 전시하고, MBTI를 써넣고, 팔로우 목록을 정리하면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빚어낸다. 빚어낸 것에는 늘 모종의 욕망이 반영된다. 정보를 교환하여 시도하는 이해가 수없이 실패를 겪는 이유다.

보이면서도 숨기는, 투명한 껍데기를 만드는 일에 우린 이미 통달하다. 비단 SNS뿐 아니다.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인정받을만한 ‘지인의 수’라는 것이 예부터 존재하지 않는가. 나나미의 결혼식은 애석하게도, 숫자가 됨됨을 증명한다는 사회적 믿음 위에 펼쳐지는 우스꽝스런 사기극이었다. 그런 나나미가 다른 이의 결혼식에서 마시로를 만나 진심을 나누었다. 그녀가 포르노 배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병을 앓고 있단 걸 알았을 때, 나나미는 매번 낯설어야 했다. 이쯤이면 알았다는 생각은 언제나 함정이다. 정말로 죽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모른다. 서로의 상처에 입 맞춘 푸른 방에서도, 나나미는 딱 한 꺼풀을 몰랐다.

손바닥 크기 까만 거울 뒤편에 돌아다니는 푸른 유령들의 얼굴은 평면이다. 그 뒷면을 알지 못함에도 검은 장막을 뒤집어쓰고 서로를 더듬는다. 위로와 행복을 바라며. 여리고 불안한 두 쌍의 유령으로 여유롭게 체스를 두는 아무르. 텅 빈 저택에 날아든 나나미는 어느새 마시로의 그림자이자, 쌍둥이이자, 연인이 되었다. 죽음의 동반자까지 하려 드는 말간 얼굴에 마시로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독은 내가 먹고, 아픔도 내 것이니 내가 데려갈게. 그러니 넌 조금 다른 결말을 보여줄래? 살다가 언젠가 행복을 찾는다면 내게도 보내줄래?’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그녀는 그날 밤, 얄밉게도 혼자 훌쩍 날아가 버린다.

크든 혹은 작든, 종종 혹은 일평생, 자신이 선망하는 바를 연기하는 우리는 모두 배우들이다. 캄파넬라와 립반윙클. 소망을 남몰래 담은 닉네임을 달고서야 편히 자신일 수 있는 그들은 불행한가? 가상에서야 새장으로부터 풀려나듯 간신히 자신일 수 있는 이들의 끝은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그날 아침, 나나미는 옆에 누운, 청자고둥을 손에 쥔 채 식어있는 마시로를 본다. 차가운 번데기 속 홀로 남겨진 것의 끔찍한 비명이 터진다. 그리고 모질게도 세상은 다시 영겁을 존재한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채로. 주인 모를 공짜 가구를 들여놓고, 베란다에 나가 날것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여린 나비는 잘 살 수 있을까.

행성과 행성, 종족과 종족의 입장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 멸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면 한쪽 집단은 배척을 선택해야만 한다. 상처 입고 다시 아이가 된 내면들은 오래도록 우주를 떠돈다.
행성과 행성, 종족과 종족의 입장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 멸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면 한쪽 집단은 배척을 선택해야만 한다. 상처 입고 다시 아이가 된 내면들은 오래도록 우주를 떠돈다.

희망이라 부를만한 것들

행성과 행성, 종족과 종족의 입장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 멸망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면 한쪽 집단은 배척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나 소녀는 소녀를 받아들였고, 두 소녀가 인류 대신 기꺼이 산화한다. 그들의 마지막을 들어 알게 되는 누구든, 뛰어들 용기보다 한없는 포용을 선망하기를. ‘같이 죽어줄 사람이 필요해.’ 마시로의 진짜 의뢰를 나나미는 영영 모를 테지. 진실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모래알을 고르는 일만큼이나 우매한 것. 그러나 나나미는 망망대해에서 마시로의 진심을 건졌지 않은가. 순간이고 놀이였을 진 몰라도, 불안과 고통을 끌어안고 기어이 사랑을 했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가 품은 것에 면역력이 없다. 그 안의 것이 언제나 겪지 못한 새것이기에 그렇다. 살아남으려면 상처 입을 것을 두려워해야한다. 그러나 상처가 없다면 성장도 없다. 이 지독한 아이러니를 어떻게든 견디며 우리는 산다. 끝없이 실패하며, 상실이 두려워 오래 웅크리며, 또 기어코 사랑에 성공하며. 당신의 진심, 또 진실은 나를 해칠 수도 치료할 수도 있을 테지. 못내 불안한 나는 독을 품은 고둥을 향해 손을 뻗듯, 바이러스 가득할 행성에 착륙하듯 두렵게 다가간다. 실패한 충돌이 뿌린 씨앗들, 심장과 뇌를 좀먹는 공허한 욕망들이 늘 비행사를 위협한다. 상처 입고 다시 아이가 된 내면들은 오래도록 우주를 떠돈다.

그러나 강한 중력에 스스로 미끄러지듯, 결국 우리가 하게 될 일은 이해다. 자신과 닮은 또 다른 자신을 구하는 일은 마지막에야 겨우 일어나는 충돌인지도 모른다. 인류의 구원보다 힘들고 세상의 구원보다 어려우니 분명 희망이라 부를 만하지 않은가. 푸른 멍처럼 빛나는 방, 같이 죽어주겠냐는 물음에 기꺼운 끄덕임, 독으로부터 연인을 구하고 나비처럼 날아가기에 충분한 철없는 웃음. 항성을 향해 돌진하는 뜨거운 우주선, 마지막 과업으로 모든 이들을 구하기로 한 두 이방인 소녀, 조그맣게 들려오는 두려움을 다독이는 마지막 속삭임. 당신도 알고 있듯, 희망은 언제나 안타깝고, 아름답다.

김연우 소피움 인문연구소 연구원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