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예시카 하우스너 ‘리틀 조'
리틀 조의 행복, 자아의 공백을 파고들다

리틀 조가 개화의 양분으로 삼은 것은 욕망과 죄의식이다. 아들과의 유대가 부족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고 엄마 역할로부터 해방되고픈 욕구다. 치명적인 핸디캡을 부여받은 식물의 존속 욕구는 얼마나 폭력적일 것인가.
리틀 조가 개화의 양분으로 삼은 것은 욕망과 죄의식이다. 아들과의 유대가 부족한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고 엄마 역할로부터 해방되고픈 욕구다. 치명적인 핸디캡을 부여받은 식물의 존속 욕구는 얼마나 폭력적일 것인가.

결코 잊지 못할 어릴 적 꿈이 있다. 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시선을 발끝으로 내리자 산처럼 부푼 배가 보였다. ‘임신했어. 아이를 가진 거야.’ 꿈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성질 급한 태아는 연신 배를 발로 차며 나오려 했고, 난 생전 처음 겪는 두려움과 무력감 속에서 태아가 내뿜는 열기와 맥동을 감당했다. 뱃속의 그것과 내가 열 달을 쌓은 애정의 무게가 느껴졌다. 가슴이 한없이 아리고 두근거렸다.

꿈은 다행히도 산고의 고통을 구현할 재주는 없었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간호사가 내게 아기를 데려왔다. 피 칠갑을 한 뜨거운 살덩이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퍼졌다. 나는 쌍둥이처럼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고, 처음 본 그것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미칠 듯 불안했다. 무언가가 영영 가라앉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이질감, 불쾌함을 모두 가뿐히 이겨버리는 절대적 경이가 있었다.

‘난 임신하지 않았어. 내 자궁은 명백히 새것이야.’ 꿈에서 깨어나 몇 번이고 아랫배를 쓸어내렸다. 굳이 따지자면 악몽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엄청난 기쁨을 줬으니까. 그런데 묘하게도 난 절대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졌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몸이 부서져 내릴 듯한, 조금만 잘못하면 다 망쳐버릴 듯한 불안, 그리고 마침내 억만 배는 커다랗게 퍼진 환희, 그건 나를 잃을 공포였다.

죄의식과 욕망이 피워낸 이상한 꽃

식물 연구원 앨리스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꽃을 개발한다. 붉은 빛깔의 아름다운 꽃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생존능력만 확인된다면 꽃 박람회에 소개되어 순조롭게 양산 단계에 진입할 것이었다. 꽃의 비밀은 옥시토신. 인간이 사랑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으로, 흡입한 사람의 기분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혼한 앨리스는 홀로 아들 조를 키우고 있다. 바쁜 엄마를 종일 기다리는 속 깊은 아들이 딱하던 앨리스는 친구를 선물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아직 승인 받지 않은 꽃 한 송이를 집에 가져온다. 조는 꽃을 마음에 들어 하며 웃고, 앨리스는 아들의 이름을 따서 화초의 명칭을 ‘리틀 조’라 짓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만든 식물의 엄청난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번식이 불가능한 생물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쉽게 그렇다고, 현대인의 관점에서 답하지 말자. 우리의 DNA엔 수없이 반복된 주문이 존재한다. 번식의 거부는 종족의 자살을 의미한다. 자연과 생명은 우리를 결코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도록 조절해왔다. 그러나 사피엔스는 직립보행으로 뇌가 지나치게 커졌고, 그 공백에 ‘자아’란 것을 만들어내어 그가 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엔 번식과 행복에 관한 새로운 역설이 있었다.

‘아이를 낳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야. 그뿐이야? 키우는 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되지.’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의학기술과 복지제도가 발명되었다. 하지만 의문은 해소되지 않고 불어났다. 번식을 포기한다면 오게 될 행복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대립은 점차 심화된다. 종족의 미래를 위해 탑재된 번식 욕망과 출산의 기쁨, 그리고 아직은 수수께끼의 영역인 개인의 독립적 행복. 그러나 누구도 피어나는 물음들을 막지 못한다.

리틀 조가 개화의 양분으로 삼은 것은 욕망과 죄의식. 앨리스는 엄마로서 아들과의 유대가 부족함에 죄책감을 느꼈고, 동시에 엄마 역할로부터 해방되고픈 욕구가 존재했다. 앨리스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자연세계에서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행복과 번식 가능성의 완벽한 거세가 공존하는 식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아무 잘못도 없이 치명적인 핸디캡을 부여받은 그들의 존속 욕구는 얼마나 폭력적일 것인가.

번식의 거부는 종족의 자살이다. 자연은 우리를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도록 조절해왔다. 모성은 여자에게 행복을 부여한다. 그 행복은 오로지 아기를 위해 살아가게 한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여신 레토.
번식의 거부는 종족의 자살이다. 자연은 우리를 그런 것에 행복을 느끼지 않도록 조절해왔다. 모성은 여자에게 행복을 부여한다. 그 행복은 오로지 아기를 위해 살아가게 한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를 낳은 여신 레토.

모성(母性), 자연이 제조한 마취제

같은 온실에서 자라는 다른 품종들이 모조리 시들어버리는데, 붉은 꽃은 갈수록 생기를 뿜는다. 윗선에서 앨리스를 추궁하자 그녀는 향기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꽃을 생식하지 못하도록 설계했다고 고백한다. 그날 밤, 리틀 조는 짙은 꽃가루를 내뿜고, 앨리스 주변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동료의 반려견, 연구원 크리스, 마침내 그녀의 아들 조까지.

리틀 조의 꽃가루를 들이마신 이들은 리틀 조를 향해 식물에 가지는 호감을 넘어선 특별한 애정을 품는다. 그들은 지나친 보호본능으로 꽃을 보호하고, 한 명이라도 더 리틀 조의 꽃향기를 마시게 하려고 꾀를 부리고 속임수를 쓴다. 게다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에 둔해진다. 그들은 인간관계의 복잡함이나 삶의 구체적인 고민을 잊은 채 리틀 조 안에서 행복하다.

번식이 좌절된 꽃이 선택한 생존 방법, 그것은 동물을 꽃가루의 숙주로 삼는 것이었다. 앨리스는 아들의 변화를 감지한다. 조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애정을 고파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차갑고 무심해졌다. 한 번도 한 적 없던 독선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엄마 몰래 여자 친구 셀마를 집에 데려와 리틀 조의 향기를 마시게 한 것이다.

주말마다 아빠와 보내는 시간을 불편해했던 조는 갑자기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선언한다. 정확히는 아빠의 ‘산장’에서. 앨리스는 아들의 무의식 속에 햇빛과 물이 끝없이 펼쳐진 산과 강을 향한 욕망을 본다. 그 욕망은 결코 조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의 방식은 너무도 익숙하다.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 너의 번영이 나의 번영. 반복된 희생 안에서 극도로 안정된, 전에 없이 평화로운 내면. 리틀 조는 감염자 모두를 어머니로 만든 것이다.

무언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이는 결코 건강한 정신 상태가 아니다. 어머니의 행복을 그 어떤 신격화나 감정의 고취 없이 건조하게 바라본다면, 그 간사함에 직면한다. 감정을 뭉툭하게 만들어 고통에 무뎌지게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악독한 리틀 조가 존속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정신의 감염이었다. 개인을 박탈함으로써 종족을 이어가는 것. 감염자들은 분명 자신을 잃어가는데도 행복하다. 이 폭력성은 결코 낯설지 않다.

임신은 모성을 발현시키고, 모성은 행복을 부여한다. 그 행복은 산모가 스스로를 날카롭게 느끼지 않고 오로지 아기를 위해 생각하고. 웃고, 살아가게 한다.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출산의 과정을, 내가 아닌 다른 것에게 갉아 먹히고 빼앗기는 박탈감을, 당연히 느낄 불안과 부당함을 쉽게 잊어버리도록 자연이 쥐어주는 마취제. 그것이 모성이다.

포기로 얻어지는 행복의 역설

앨리스는 꽃의 부작용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동료들은 이미 충직한 숙주가 되어있다. 크리스는 앨리스가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린다면 모두의 경력은 끝장이라는 말로 그녀를 회유하고, 하루 빨리 리틀 조의 박람회 출품을 부추긴다. 늦은 밤, 앨리스가 몰래 온실 온도를 낮추는 것을 발견한 크리스는 그녀를 공격한다. 기절하여 쓰러진 앨리스. 그리고 다음날, 그녀의 얼굴은 마치 모든 것을 잊은 듯 평화롭다.

앨리스가 꽃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 이유는 자기 욕망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지만, 어떤 불안과 박탈의 표출이기도 하다. 임신한 여자의 내면에서는 두 사람이 반목한다. 기쁜 종속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엄마와, 그 끔찍한 변화의 강요가 두렵고 싫은 인간. 앨리스는 조를 남편에게 보내고, 지천에 리틀 조가 퍼지도록 방조한다. 그녀는 꽃가루를 들이마신 걸까? 아니면 그저 포기해버린 걸까?

수많은 낡은 관용구가 말하듯 세상이 하나의 자궁이라면, 우리의 성질 급한 태아 리틀 조는 밖으로 나가 더 많은 이들을 어머니로 만들 것이다. 모든 여자들이 출산을 소망하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지난 세월처럼, 인류 전체가 리틀 조의 어머니가 된다면 비로소 지구는 완전한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지 않을까? 만곡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미소마냥 모두가 행복을 보장받을 텐데. 나쁘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앨리스는 그저 흘러가게 뒀는지도 모른다.

조와 리틀 조는 서로 다른 뿌리에서 뻗은 가지다. 조는 앨리스의 DNA에 각인된 종족 번식의 욕구가 긍정되어 태어났다. 리틀 조는 그 반작용, 앨리스라는 개인의 고유한 것을 되찾는 욕구로 피어났다. 두 가지는 한데서 만나 합쳐진다. 어머니 앨리스의 행복으로. 자식은 행복을 주는 존재니까. 다만 그 행복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엄마가 된 여자는 커다란 행복에 온몸을 내맡긴다. 그 행복은 슬픔과 분노와 고뇌와 꺼림칙함을 마비시킨 공백 안에 깃들어, 전에 좇았던 그녀의 성취가 너무 어렵고 복잡한 것이었다는 기분을 느끼도록 한다. 모성은 치사하다. 어떤 생물의 호르몬을 조절하여 스스로에 대한 애착을 줄이도록 종용하고, 다른 생명의 건강을 위해 에너지를 쓰도록 조종한다. 그러나 거기서 오는 행복은 역설적으로 단순하고, 달콤하며, 안온하고, 강력하다.

핏물에도 생과 사가 함께 흐르듯 어느 길로 가도 딱 떨어지지 않는 감정과 불만족스런 욕망 때문에, 종족의 번식과 자아의 행복이라는 좀처럼 뒤섞이지 않는 이유 때문에, 리틀 조가 피어날 수 없는 대지 위에서 우린 괴로워한다.
핏물에도 생과 사가 함께 흐르듯 어느 길로 가도 딱 떨어지지 않는 감정과 불만족스런 욕망 때문에, 종족의 번식과 자아의 행복이라는 좀처럼 뒤섞이지 않는 이유 때문에, 리틀 조가 피어날 수 없는 대지 위에서 우린 괴로워한다.

돌연변이도 진화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어릴 적 꿈이 얼마나 실제와 가까운 지,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영영 모를 것이다. 한동안은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견뎠던 걸까? 인류를 존속케 한 무수히 많은 여자들은. 게다가 의학 발전 이전에 출산은 죽음이었을 텐데. 문득 아이를 많이 낳은 여자들이 종종 하는 말이 생각난다. ‘잊어버려. 행복만 남아. 그래서 다시 낳고 싶어져.’

고통은 휘발되고 행복만 남는다라. 우리가 현재를 살며 겪는 모든 경험에 바라는 일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간사하여 슬프고 아픈 기억이 잘 남는 법. 어머니가 된 여자들에게 그것은 반대인가. 자연이 임신을 택한 여자들에게 쥐어주는 행복은 왜 그토록 강렬할까?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지도 모를 출산만이 사람의 번영을 위한 유일한 방법. 자연은 모성을 타협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회는 모성에 신성을 부여했다.

다시 한 번 낡은 비유법을 쓴다. 사회가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망이 들끓는 요람이라면, 다수의 공감을 얻은 욕망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태어나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 번식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자 하는 여성의 욕망, 우리 사회는 과연 리틀 조에 비유되는 모성의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일 수 있나? 이 욕망은 하나의 현상이고, 이를 어떤 식으로든 소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비혼, 비출산을 선택한 여자들을 자신만의 잣대로 떠드는 무례함은 대놓고 손가락질 받는 세상이다. 그러나 오로지 자연의 관점에서, 종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돌연변이가 맞다. 돌연변이의 급증은 종족의 실패를 알리는 가장 명확한 사이렌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실패에 직면해 있는가? 다수의 삶에서 출산과 양육은 삶의 질 향상과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선순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돌연변이가 진화가 아니어야할 이유도 없다.

자연은 돌연변이를 모조리 죽이려 하지 않는다.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으로 멸종을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다르다. 지도층은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은 그들을 비정상 취급하고 욕한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 어머니는 신성시되었기에, 모성의 해체와 출산의 거부는 낯설고 두려운 패러다임이다. 이 거부를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사라지는 미래도 받아들이는 것인가? 리틀 조에 잠식당하기를 자처하는 영혼들처럼.

모성의 탈피는 어머니의 진화인가?

뱃속에서 자라는 것에 나날이 양분을 빼앗기며 무엇으로 태어날지 지켜보자. 모성의 폭력성을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은 ‘어머니’가 여성 모두에게 허락된 미래라는 낡은 인식을 깨부술 것이며, 임신과 출산이 결코 여성이 치러야 할 의례가 아님을 공고히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이 바퀴를 부숴버릴까 두려워 사회는 매일 미래의 씨앗을 죽인다. 자유와 선택이 만든 여유 안에서 바퀴는 다시 선순환 할 수도 있을 거란 상상은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이런 낙관은 비관과 마찬가지로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의미하다. 그저 조금 서글플 뿐이다. 신은 꿈에서가 아닌 이상 산고의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그래도 우린 서로의 고난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그보다 더 쉬운 방법은 마취와 배척이라니. 엄마가 절망하여도 태아는 무럭무럭 자라나며 영향력을 뻗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뿐일까? 미래가 오면 과거가 할 일은 물러나는 것인가? 글쎄.

‘대를 이어야지’ 맥없이 뇌까리는, 여자 뱃속에 세를 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는 세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어머니가 될 미래를 정답처럼 상정하지 않는 여자들, 모성의 의미를 스스로 재정립한 여자들은 갈수록 많아진다. 그러나 ‘번식하라’는 강력한 속삭임은 질긴 매듭으로 우리의 핏줄에 얽혀있고, 여자들은 매달 피로써 그것을 확인한다. 어쩌면 번식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영영 모성의 신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리라.

어디선가 그런 문장을 보았다. ‘자궁에 단추가 달렸다면 투둑 떼어내 호수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거부감과 상쾌함을 동시에 주는 실로 엄청난 뇌까림이었다. 핏물에도 생과 사가 함께 흐르듯 양가감정을 감당하며 우린 살고, 어느 길로 가도 딱 떨어지지 않는 감정과 불만족스런 욕망에 괴로워한다. 종족의 번식에 기여하기, 자아의 번영과 행복 좇기. 그 두 가지가 좀처럼 평화롭게 뒤섞이지 않는, 리틀 조가 피어날 수 없는 대지 위에서.

김연우 인문학교 아나키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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