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레이 브래드버리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기억의 지속, 생명과 관계를 살리는 길

기억의 지속은 산 자들의 욕망이다. 기억이란 생명과 같아서 기억을 잃는 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도 항상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존재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집념'
기억의 지속은 산 자들의 욕망이다. 기억이란 생명과 같아서 기억을 잃는 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도 항상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존재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집념'

[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레이 브래드버리의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그는 증오하며 흙더미 밖으로 나왔다. 증오는 그의 아버지요 그의 어머니였다. 다시 걸으니 좋았다. 흙더미에서 뛰어올라 등을 곧추 펴고 양팔을 크게 벌려 깊이 숨을 들이마시려니 좋았다!! 그는 숨을 쉬어 보았다. 그는 비명을 토해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 팔을 힘껏 위로 뻗으며 숨을 쉬어 보려고 했다. 할 수 없었다.
 그는 땅 밖으로 나왔고 땅 위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입으로 공기를 들이마시고 오랫동안 쉬고 있었던 근육을 힘겹게 움직이면서 억지로 거칠게 절반 정도는 목 아래로 넘길 수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자신이 똑바로 서 있다는 것, 그리고 그는 죽었다는 것, 이렇게 걸어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세계의 냄새가 주변에 자욱했다. 그는 절망감을 느끼며 가을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가을이 땅을 활활 태워 폐허로 만들고 있었다. 시골 곳곳에 여름이 남기고 간 폐허가 보였다. 거대한 숲에 불꽃이 활짝 피어났고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불꽃이 피우는 연기는 풍성했고 푸르스름했으며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증오하며 묘지에 서 있었다. 새로 열린 귀에 바람이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 있었다. 걷는 동안에도 자신이 죽었으며 이 증오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또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비어버린 자신의 무덤 앞에 우뚝 솟은 묘석을 쓰다듬었다. 조각을 멋지게 해놓은 묘석이었다.
   ‘윌리엄 랜트리. 출생 1898년. 사망 1933년.’
- 레이 브래드버리,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한 어떤 시체

좀비의 기원을 살펴보면 설(說)들이 많다. 설들은 아프리카로도 가고 아메리카로도 가서 여러 사연과 원인과 후일담을 남기고 있다. 좀비는 살아있는 자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시체를 살아있는 듯이 움직이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의 좀비들은 살아있는 자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생기고 전염되어 산 자들의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든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좀비는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다. 처음 좀비는 어정쩡한 자세로 뒤뚱뒤뚱 걸었지만 점차 산 사람처럼 바른 자세로 서고 달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무사인 볼트처럼 빠르게 달리고 이봉주처럼 지치지도 않고 뛴다. 좀비의 가속도는 공포의 가속도를 불러 어쩔 수 없이 디스토피아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가장 피하고 싶은 미래이리라.

그런데 변하지 않는 좀비의 특징이 있다. 좀비에게는 영혼 또는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희로애락의 낯빛을 한 좀비를 본 적이 있는가? 짐승처럼 상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는 좀비들은 많지만 그것은 감정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살을 뜯고 피를 빠는 짐승 그 자체의 반응일 뿐이다. 그래서 아직 ‘대화하는 좀비’도 없고 ‘생각하는 좀비’도 없으며, 아마도 그런 좀비는 틀림없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시체 하나가 무덤에서 살아나왔다. 416년 만에 무덤에서 되살아난 윌리엄 랜트리, 그는 과연 좀비인가? 혼잣말을 하고 생각도 하는 그가 좀비일 수는 없다. 더구나 ‘증오’라는 복잡한 관계적 감정을 한낱 시체 따위가 할 리 만무하니 그는 더더욱 좀비가 아니다. 그런데 왜 시체가 느닷없이 살아나 방황하는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하는 경우 그 방문자의 정체성은 영혼이지 시체가 아니다. 영혼은 필요한 경우 산 자들의 눈에 보여야 하기 때문에 적절한 이미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 실체는 없다. 그래서 죽은 자 윌리엄 랜트리가 굳이 시체로 돌아온 것은 그 자신의 정체성이 영혼이 내재한 시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위생과 효율이라는 이름의 ‘기억 파괴’

   그는 깊숙한 자신의 관 속에서 일꾼들이 차가운 삽으로 땅을 파헤치고 관을 뜯어내서 시들어버린 시체를 소각장으로 옮기는 냉혹하고 거친 소리를 들었다. 더는 죽은 사람이 없었다. 상상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살균된 세척과 과학적 방법론만 존재하는 이 어리석은 불모의 시대에는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존재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죽는다. 그는 검게 불타는 밤을 가로질러 묘지 가장자리까지 걸어가 새로워진 살렘 시를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색색의 조명이 가득했다. 그가 묻혀 있는 동안 미래 세계의 새로워진 폭력성은 땅으로 내려와 윌리엄 랜트리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도시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 사람들도 죽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맥박이 멈추고 몸이 싸늘하게 식자마자 화려한 일필휘지로 확인증이 작성되고 가족은 딱정벌레 모양 자동차에 그를 태워 재빨리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불의 기둥이 바로 소각로다. 불을 지피는 장작처럼 죽은 사람은 아궁이로 던져질 것이다. 굴뚝 꼭대기에서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죽은 자들이 향하는 곳이었다.
- 레이 브래드버리,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윌리엄 랜트리가 방문한 미래는 그에게 매우 낯설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다. 2349년의 미래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나 다르다. 400년이 넘는세월이 흐르는 동안 문명의 변화는 엄청났을 것인데 정작 그가 이질적으로 느끼는 것은 물질적 변화에 있지 않았다. 충격적인 것은 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죽는 사람이 없어서 시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바로 소각해버리기 때문에 시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무덤 또한 만들지 않기 때문에 무덤에 들어가는 시체나 뼈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사람들은 이미 있는 무덤을 파헤쳐 모든 시체를 소각로에 넣고 태워 그 재마저 날려버리는 완벽한 ‘부재(不在)’를 실천하고 있다.

미래 사람들의 철학은 위생과 효율에 있다. 비위생적이고 흉물스러운 무덤과 시체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무덤으로 쓰이는 땅도 경제적이지 않아서 없애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산 자들의 세계는 산 자들이 설계하는 게 맞다. 죽은 자들의 세계가 있다면 죽은 자들이 설계하는 게 당연하다.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들에게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건 합리적이지도 않고 불가능한 얘기다. 산 자들이 무슨 흉악한 꿍꿍이가 있어 이미 죽은 사람들을 부관참시 하는 것도 아니고 위생과 효율을 주장하는데, 딴 세계의 시체가 왜 참견하는가?

소각된 기억은 좀비가 되어 거리에 출몰한다. 유령은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하는 영혼이다. 영혼은 좀비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이 소멸되어버린 죽은 자들은 끔찍한 좀비와 다를 것이 없는 괴물이다.
소각된 기억은 좀비가 되어 거리에 출몰한다. 유령은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하는 영혼이다. 영혼은 좀비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이 소멸되어버린 죽은 자들은 끔찍한 좀비와 다를 것이 없는 괴물이다.

아름다운 추억은 아름다운 사람을 소환한다

   소리다. 그 소리가 나를 깊은 잠에서 끌어올린 것이다. 밑에 누군가가 있다. 나 이외에 이 집 안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다. 음악소리 같은 것도 들린다. 계단 아래서 흥겨운 옛날 음악이 증기처럼 복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하나로 뒤섞여 있어 이야기의 내용까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때로 웃는 소리도 들렸다. 기품 있고 가벼운 웃음소리였다. 아무래도 아래층에서는 파티가 진행 중이고 그것도 한참 절정에 있는 듯하였다.
   흥을 돋우듯 샴페인 잔이 포도주 잔과 부딪치는 소리가  짜랑짜랑 영롱하게 울렸다. 아마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음악소리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은 파도처럼 높이 올랐다가  가라앉곤 하였다. 대체 몇 명이나 되는 것일까. 적어도 열다섯 명 정도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스무 명이 넘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말소리의 단편이나마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말소리는 혼연일체가 되어 단어 하나 구별할 수 없었다. 언어며 대화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두껍게 덧칠한 벽처럼 내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파고들어갈 여지 따위는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령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

장화와 홍련은 왜 사또들에게 나타나 기겁을 하게 만들었을까? 억울한 사연을 풀지 않고서는 이승을 떠날 수 없기에 돌아온 것이다. 죽은 자의 혼령이 산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은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그러한 것이다. 전설이 살아숨쉬는 렉싱턴의 고택(古宅)에 기품 있는 유령들이 방문한 것은 그들이 돌아와야 할 까닭이 있어서이다. 떠나지 못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돌아오는 것에도 까닭이 있다. 이유는 원한이고 까닭은 추억이다. 원한이 깊으면 혼령은 떠날 수 없는 법이고 추억이 깊으면 유령은 돌아오는 것이다.

장화와 홍련은 삶이 행복하지 않았기에 이승에 미련은 없었지만 원한이 남아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억울함이 풀리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죽은 자의 세계로 떠나버린다. 그녀들에게 생전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세상이다. 렉싱턴의 고택을 방문한 유령들은 한밤중에 흥겨운 파티를 벌인다. 그들은 살았을 때가 즐거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돌아오는 것이다. 주인장 케이시도 그들의 방문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옛날을 그리워하고 떠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떠난 자들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떠나지 않은 사람이 떠난 자들을 그리워하는데 즐겁게 방문하지 않을 까닭이 어디에 있겠는가?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행복하게 재회하는 영화다. 1919년 승부 조작 사건으로 퇴출당한 여덟 명의 야구 선수들, 꿈을 잃어버린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던 어떤 팬,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해온 작가, 그리고 몸과 마음 어느 구석엔가 그 모든 추억을 고이 접어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 모두의 추억을 다시 풀어내서 파티를 벌인다. 추억을 놓고 겨루는 유령들의 파티는 ‘꿈의 구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꿈의 구장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효율성을 따진다면 돈이 되는 옥수수 밭을 유령들이나 불러내는 야구장으로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아름다웠던 추억이 유령들을 소환한 것이다.

기억의 말살, 생명의 파괴와 관계의 단절

   윌리엄 랜트리는 언덕 위에 서서 가을바람을 맞고 있었다. 나뭇잎이 생쥐들처럼 눈앞의 길 위를 허둥지둥 달아나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차가운 별들이 바람에 날리듯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다시 공포를 느끼게 된 것조차 좋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솟구쳤고 그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회에 적이 되었다. 다른 죽은 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세계는 드라마처럼 오로지 한 사람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곳은 어두운 가을 언덕에 검은 양복 차림으로 서 있는 남자를 배척하는 곳, 뱀파이어를 믿지 않는 곳, 시체를 태우고 묘지를 전멸시키는 세계였다.
   “너희는 이 뽑듯이 비석을 뽑아버렸어. 그러니 나 역시 너희의 소각로를 무너뜨려 잡석 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다. 나는 다시 죽은 자들을 만들 것이고 그 들을 친구로 삼을 것이다. 나 혼자 외롭기는 싫다. 바로 오늘 밤부터 전쟁을 선포한다.”
- 레이 브래드버리,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

기억은 인간의 본능이고 욕망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건 누르거나 잠재울 수 없는 강렬한 욕망이다. 올림푸스 신들이 막강한 티탄 신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들은 올림푸스 신궁에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승전의 파티가 즐거웠음에도 최고의 신 제우스는 즐겁지 않았다.

기억이란 모름지기 시간을 타는 법이어서 세월이 흐르면 자신의 위대한 업적이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기억의 지속’에 이었다. 제우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와의 결합을 통해 아홉 뮤즈를 낳고 이들을 ‘기억의 칩’으로 삼는다. 뮤즈들은 신들의 위대한 업적을 예술로 승화해서 파티가 열릴 때마다 공연을 하고, 잊혀져가는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하였다.

추억을 놓고 겨루는 유령들의 파티는 '꿈의 구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꿈의 구장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아름다웠던 추억이 유령들을 소환한 것이다. 영화 Field of dreams
추억을 놓고 겨루는 유령들의 파티는 '꿈의 구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꿈의 구장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아름다웠던 추억이 유령들을 소환한 것이다. 영화 Field of dreams

기억의 지속은 생명의 연장, Pro memoria!

시체로 돌아온 윌리엄 랜트리에게 소각로는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까? 오벨리스크는 이승에서 업적을 세우고 세상을 떠난 자들을 칭송하는 글을 새우고 길이길이 기억한다는데, 오벨리스크를 닮은 소각로는 죽은 자들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소각하고 영혼과는 전혀 무관한 연기만을 하늘로 내뿜을 뿐이니 어찌 산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 자들의 세계가 살렘(salem)인 것은 평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그러했으리라 여겨지는데, 그들의 위생과 효율이 죽은 자들에게 원한을 사 파괴와 살인을 불렀으니 살렘의 평화는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셈인가? ‘기억의 지속’은 기실 산 자들의 욕망이다. 기억이란 생명과 같아서 기억을 잃는 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도 항상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존재다. 인간은 죽어서도 영원히 살기 위하여 영원히 기억되고 싶어한다. 기억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죽은 자들의 아름다운 방문을 상상한다.

시체의 소각은 기억의 말살이다. 무덤의 파괴는 기억의 소멸이다. 기억을 파괴하는 것은 관계를 단절시키는 흉악한 일이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기억이라는 매개로 공존하는 세상, 살렘은 거기에서 제 목적을 달성한다. 시체들이 일으키는 끔찍한 반란을 보고 싶지 않다면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이 좋다. Pro memoria!
김시인 <인문학교 아나키 대표>


1굙 기억의 지속은 산 자들의 욕망이다. 기억이란 생명과 같아서 기억을 잃는 건 생명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간은 살아있을 때도 항상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존재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집념'

2굙 소각된 기억은 좀비가 되어 거리에 출몰한다. 유령은 산 자들의 세계를 방문하는 영혼이다. 영혼은 좀비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이 소멸되어버린 죽은 자들은 끔찍한 좀비와 다를 것이 없는 괴물이다.

3굙추억을 놓고 겨루는 유령들의 파티는 '꿈의 구장'에서 절정을 이룬다. 꿈의 구장에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아름다웠던 추억이 유령들을 소환한 것이다. 영화 Field of dreams

김시인 <인문학교 아나키 대표>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