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광주 갈피갈피] 한 고을에 하나씩 ‘관덕정’

사직공원에 있는 현재의 관덕정.
사직공원에 있는 현재의 관덕정.

관덕정(觀德亭)은 곧 활터다. 이 말은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정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활터를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전국 어디에나 관덕정이라 불리는 정자 혹은 그 터가 많이 남아 있고, 제주도의 관덕정처럼 아주 오래된 건물은 왕왕 문화재로 지정된 예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한 고을에 하나의 관덕정만을 두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보통 관덕정이라 하면 그 지역의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되곤 했다.

오늘날 광주에서 관덕정이라 일컫는 활터는 사직공원 안, 옛 KBS방송국 뒤편에 있다. 수많은 궁사들이 지금도 이곳에 모여 활쏘기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관덕정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던 건 아니다.

사직공원의 관덕정은 1963년 5·16 뒤에 송호림 전남도지사와 정래혁 광주시장의 지원으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순전히 활터만을 따져놓고 보자면 그 역사는 4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옛 기록에 나오는 광주 관덕정은 어디에 있었을까?

현재 관덕정은 1963년에 사직공원내에 세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원래 관덕정은 광주객사(무등극장 일대)의 뒤쪽, 지금의 광주우체국과 충장서림 일대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조선시대 광주의 문물을 다룬 <읍지>에 관덕정이 ‘객사의 북쪽’에 있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북쪽이란 나침반이 가리키는 북쪽(자북)이 아니라 북문 쪽을 가리킨다.

둘째, 광주우체국 일대에 활터가 있었을 법한 정황이다. 우체국 일대에는 본래 광주목사의 자문기관으로 지역 양반들이 자주 모여 회합을 가졌던 향청(鄕廳)이란 건물이 있었다. 그런데 향청은 그 별칭이 향사청(鄕射廳)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활쏘기 모임이 자주 열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 때의 활쏘기는 요즘의 사교 골프처럼 단순한 스포츠 이상을 의미했는데, 향좌목(鄕座目), 즉 명사클럽에 속한 회원들 간에 친목을 다지고 겸사겸사 사적인 로비도 하는 행사였다. 따라서 여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자면 언필칭 ‘향음례(鄕飮禮)’란 명목으로 요즘 내기골프를 하듯 당시에도 내기시합이 적잖았을 것이다.

아무튼 조선시대에 관덕정은 지금의 광주우체국 일대에 있었고, 이 건물은 그 주위의 다른 건물보다 그 의미도 컸던 것 같다. 실제로 이 일대를 부르는 옛 지명을 보면, 객사리나 향청리가 아니라 사정리(射亭里)였는데, 이는 다분히 관덕정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원조 관덕정’이 언제까지 광주우체국 일대에 있었을까? 1925년에 나온 <광주읍지>에는 그때까지도 관덕정이 옛 터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 기록하고 있지만 이 무렵엔 이미 철거되거나 사라진 다른 건물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말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아마도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관덕정은 1920년대에는 광주우체국 일대에서 사라졌던 것 같고 다만 사정리란 지명만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관덕정 얘기가 이것으로 끝난 건은 아니었다. 광주에서 관덕정 얘기는 그 후에도 계속됐다. 이를테면 1930년대에 관덕정에서는 매년 추석 무렵이면 전국궁술대회가 열렸고, 1938년에는 서동에 사는 서우죽(徐友竹)이란 여자 분이 관덕정에 논 다섯 마지기를 기부했던 일도 있었다.

서동사는 ‘서우죽’이 관덕정에 논 다섯마지기 기부

그렇다면 충장로 일대의 활터는 이미 사라졌고, 사직공원의 활터가 생기려면 앞으로도 한 세대는 더 기다려야 할 참이었는데 이 무렵 관덕정은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가?

놀랍게도 일제시대 관덕정은 광주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 누구나 알만한 장소에 있었다. 1980년대 전남대 부설 호남문화연구소가 조사한 것에 따르면, 광주공원 서오층석탑 근처에는 한때 임병룡(林炳龍)이란 사람이 세운 대환정(大歡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건립자인 임병룡은 백호 임제의 후손으로 원래 나주 사람인데 이 무렵엔 광주공원 옆 서동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임병룡이 세운 대환정이 일제시대 광주사람들이 기억하는 관덕정이었다. 실제로 몇몇 자료에는 임병룡이 이 정자를 세워 노인들의 휴식처로 제공했다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휴식처란 활터를 의미했다.

물론 임병룡의 정자에 내걸린 현판은 대환정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주로 활터로 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들 관덕정이라 불르길 좋아했다. 또 활터로 쓰인 건물에 관덕정이 아닌 다른 현판이 내걸린 경우도 이 경우가 처음도 아니었다. 충장로 광주우체국 일대에 관덕정이 있었을 무렵에도 그곳에 실제 내걸린 현판은 희경루(喜慶樓)였다.

한편, 그 건물의 외관은 약간 변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옛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광주공원 서오층석탑에서 옛 사직동사무소로 가는 골목 옆, 서동 142-2번지(신흥사찰 성거사 옆)에는 전주최씨 화수회관이 있는데 이 건물이 곧 예전의 대환정이자 일제시대에 광주사람들이 관덕정이라 불렀던 활터였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뒤에까지 나주임씨 소유로 있다가 1959년 전주최씨 문중에서 매입해 현재까지 문중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조광철 (광주역사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08년 4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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