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우리 책들]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2022년의 인간 사회는 매우 안정적으로 번성하고 있다. 개개인이 세상과 충돌하며 얻는 상처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으나 바깥의 영역, 그러니까 종족 보존의 영역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생물은 없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다.

멸종의 위기, 일상적인 생명의 위협 따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인간에게 이기훈 작가의 그림은 날카로운 두려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낯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감각일 것이다.

‘양철곰’ ‘빅피쉬’ ‘알’과 같이 글 없는 그림책 작업을 꾸준히 이어온 작가의 그림엔 세밀한 선과 빛으로 드러나는 현실의 감촉이 있다. 꺼끌꺼끌한 나무껍질, 축축하게 바스러지는 흙의 입자들,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흠집이 있는 콘크리트 벽 같은 것들이 만져질 것 같다. 그런 세밀한 현실감에서 오는 이질감이 바로 두려움의 이유다.

그의 그림에는 뜻이 분명한 언어가 덧붙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익숙했던 세상을 도움 없이 낯설게 해석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준다. 그리고 그 위기감의 중심에는 언제나 손쓸 도리 없는 압도적인 것들이 있다. 홍수를 뱉어내는 거대한 물고기, 까마득한 건물, 수많은 동물의 행렬과 날갯짓. 오늘 소개할 책인 ‘09:47’(2021, 글로연)에는 깊고 검은 바다와 고래들이 있다.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어린 주인공이 가족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커다란 배에서 아이는 자꾸만 기이한 상황을 겪는다. 문득 내려다본 해수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누군가의 얼굴을 발견하는 식이다.

화장실에 갔다가 왠지 모르게 열려있는 창문으로 물벼락을 맞고 섬에 도착할 무렵엔 갈매기에게 인형을 빼앗기기까지 한다. 다들 즐거운 물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잃어버렸던 토끼 인형이 파도에 밀려와선 주인공을 이끌고 바다 깊은 곳으로 향한다. 그곳엔 거대한 눈동자가 있다.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이후로는 끝없는 물결과 위협, 두려움의 향연이다. 거대한 눈동자는 주인공을 크기 자체로도 압도하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인간들이 양산해낸 쓰레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폐기물-고래의 눈이었다.

수많은 폐기물-고래들이 바다를 헤치고, 인형과 아이는 정신없이 휩쓸리고, 그 와중에도 물줄기 속에서 헤엄치는 수많은 쓰레기는 죄다 인간의 것이다.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폐기물-고래들은 결국 바다를 들고 일어나 인간들의 영역을 덮친다. 휘황찬란하게 하늘로 뻗은 건물들은 끝없는 쓰레기들이 이끌고 온 자연 앞에 무용지물이다.

인간의 영역은 사라지고, 임무를 다했다는 듯 고래들도 흩어지고, 검은 심해에 남겨진 아이는 인형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지나가던 배에 올라탄다.

시간은 9시 47분. 그제야 독자는 도입부에서 물벼락을 맞은 아이가 사실은 시간을 넘어 살아남고자 창문을 비집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둥근 창문은 맨 처음엔 제대로 닫혀있지 않아 애먼 사람 물이나 맞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창문이 열려있지 않았더라면 아이가 다시 배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다시 찾아온 9시 47분은 주인공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다. 이때부터 아이는 토끼 인형을 조금 더 꽉 쥐어서 애초에 갈매기가 물어가지 않게 할 수도, 아예 갑판으로 나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세상에까지 영향을 끼치도록 거대한 고래 수십 수백 마리를 만들어낸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홀로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창문은 배 안과 밖을 잇는 매개다. 인간 사회는 바깥과 안, 개발지역과 미개발 지역 따위로 경계를 지어 그 안에 안정적인 우리만의 것을 보존하려고 한다. 보기 싫은 것은 밖으로, 보기 편한 것은 안으로. 하지만 밖으로 버려진 ‘보기 싫은 것’은 언젠가 반드시 돌아온다. 거대한 고래의 형태가 되어 인간 사회의 ‘안쪽’을 무자비하게 침범하고 부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응당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09:47’(2021, 글로연)
‘09:47’(2021, 글로연)

두려움은 이 시대에 피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공포 영화나 귀신의 집 따위는 스릴을 위해 즐기면서도 기후 위기와 환경파괴에 대한 두려움은 거부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해야 해? 그런 것까지 신경 쓰며 살면 너무 삶이 팍팍하지 않아? 온몸이 홀딱 젖은 주인공은 인류 단위의 생존 위기를 목격했지만, 그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장 일어난 일이 아니니까. 그 어마어마한 쓰레기와 두려움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작고 사소하더라도 우리는 바깥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두어야 한다. 열린 창문에서 들어오는 경고를 확인해야 한다. 물벼락을 맞아 일상이 좀 축축하고 불쾌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현실 아니겠는가.

우리에게는, 책 밖의 세계에는 9시 47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시계 자체가 부서져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더는 지표로 세워 둘 것이 없게 되더라도 우리는 언제든 선택적 안락함을 버리고 기묘한 두려움을 선택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문의 062-954-9420
호수 (동네책방 숨 책방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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