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갈피갈피] 첨단지구의 옛 모습

 무척이나 큰 저수지였던 `쌍암제’는 이제 일부만 남아 있다.
 무척이나 큰 저수지였던 `쌍암제’는 이제 일부만 남아 있다.

 광산구의 북서쪽, 첨단지구는 1990년대 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과 맞물려 형성됐다. 처음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간 이곳의 풍경은 토박이들마저 이방인으로 만들만큼 딴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필자 같은 길손들에게 첨단지구의 역사는 90년대부터 시작된 것인 양 착각할 밖에 없다.

 하지만 차츰 희미해지는 옛 기억을 맞춰나가는 약간의 수고를 들인다면 이곳 역사가 꽤나 깊다는 걸 대번에 깨닫게 된다. 적어도 옛 첨단지구의 모습을 얼마간 어림잡아 그려볼 수는 있다.

 오늘날 첨단지구엔 몇몇 높다란 고층건물들이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하늘과 땅이 활짝 열린 느낌을 준다. 불도저의 삽날이 닿아 더 그랬을 것이지만 본디부터 이곳은 그 옆을 흐르는 영산강이 오랜 세월 써레질을 하듯 반반하게 닦아놓은 덕분에 평탄했다.

 이렇게 땅은 시원스럽게 펼쳐졌지만 옛 사람들은 이것이 왠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너른 들녘 한가운데 불쑥 솟아난 언덕이라도 붙잡아 그것을 바람막이 삼아 마을을 이뤘다. 첨단의 토박이 마을들이 대개 언덕이나 비탈을 따라 터를 잡은 건 이 때문이었다.

 우편집중국 서쪽에는 구암(龜岩)마을이 있었다. 구암이란 이름은 마을 뒤편의 언덕에 거북바위가 있어 비롯됐다. 또한 이 마을은 미산(眉山)이라고도 불렸는데 눈썹처럼 둥글고 야트막한 마을뒷산의 생김새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암마을 북쪽에는 신미산(新眉山)이란 마을이 있었다. 예전에는 오룡동에 속했던 마을이었는데, 택지개발로 구획이 바뀌어 현재는 마을 터가 쌍암동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정작 마을이 사라진 마당에 이런 일을 따지는 것이 왠지 부질없다. 옛 신미산마을 자리엔 오늘도 나이트클럽과 모텔촌이 불야성을 이룬다.

 우편집중국에서 다시 수완지구 쪽을 향해 곧장 뻗은 ‘첨단로’를 따라가다 보면 응암(鷹岩)마을 자리가 나온다. 첨단로와 중앙로의 교차로 일대가 옛 응암마을 자리다. 응암마을은 본디 비아 쪽에서 흘러온 긴 등성이 끝자락에 얹혀 있었다. ‘진등’이라 불렀던 이 등성이는 팥죽마냥 검붉은 땅이었는데 일제 때 ‘가네보’라는 일본회사가 뽕나무밭을 일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응암이란 이름은 동네 양쪽에 버티고 선 ‘매바위’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응암은 구암과 함께 ‘암’자가 들어간 마을이라고 해서 둘을 합해 쌍암(雙岩)이라 불렀단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앞서 말한 미산마을 뒤편 언덕배기에 거북마을 말고도 ‘쌍바우’가 있었는데 쌍암은 바로 여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은 말일까? 아마 둘 다 일리 있는 주장일 것이다.

 구암마을의 북쪽, 쌍암공원 호수 근처에는 ‘원모랭지’란 동네도 있었다. 원(院), 즉 길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던 주막이 있던 동네다. 현재 교통방송국 일대가 원모랭지가 있던 곳으로 짐작되는데, 말과 발로 품을 팔아 살았던 옛 일을 생각하면 묘한 인연이다.

 한편, 첨단지구는 예로부터 광주권에서 이름난 시장인 비아장과 이웃해 있기는 했으나 본래 농사일에 깊게 뿌리를 박으며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농사짓는 물은 이곳의 삶과 풍경에 혈액과 같은 존재였다. 오늘날 주유소처럼 예전 첨단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명의 근원을 담은 저수지였다.

 현재 공원호수로 바뀐 쌍암저수지는 무척이나 큰 방죽이었다. 본래 이 저수지의 제방이 첨단병원과 선샤인모텔 사이에 걸쳐있었고, 저수지의 반대편은 과학기술원 안쪽으로까지 펼쳐져 있었다.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나마 옛 방죽이 살아남은 건 천만다행이다.

 저수지는 응암공원 옆에도 있었다. 물개방축(勿介防築) 또는 ‘물캐방죽’이라 불렸던 이 저수지는 조선시대 기록에도 나올 만큼 역사가 깊었다. 비아 쪽에서 오는 물을 잡아다 방죽을 채웠는데, 방죽물은 첨단지구를 가로질러 흐르다가 산월동에서 영산강과 합쳐졌다. 그런데 저수지가 매립돼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월계동 선경아파트에서 라인3차아파트에 이르는 일대가 옛 물캐방죽 자리다.

 남부대학교와 첨단중학교 사이에도 또다른 저수지가 있었다. 이 저수지는 일제 때 축조됐다고 하는데 사실 이곳은 태생적으로 저수지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오래전 이곳은 ‘시암실’ 또는 천곡(泉谷)이라 불렸다. 큰 가뭄에도 쉬 마르지 않는 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것이 뭇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 첨단지구를 ‘천곡면’이라 했고, 지금도 천곡중학교란 교명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심지어 한때 이곳에 많이 살았던 탐진 최씨를 천곡파라 불렀는데 모두 이 자그마한 샘에서 발원한 것이다.

 하지만 천곡처럼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던 것들이 이제 이름만 남았다. 그 이름들을 증언해 줄 풍경마저 사라졌으니 아쉬움은 더욱 크다. 그래도 겨우내 헐벗은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듯 이 땅에서는 순간순간 새로운 삶과 기억이 피어오른다. 한 시대의 끝은 늘 새로운 시대의 서막인 까닭이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재개관에 즈음해 10여년에 걸쳐 본보에 연재된 `광주 갈피갈피’ 중 광주의 근 현대사를 추려서 다시 싣습니다. 이 글은 2011년 5월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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