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깨기

2004-04-30     남신희
“주민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슴다. 금일 오전 공구시부터 지하주차장 물청소를 실시할 예정이오니 지하에 차량을 주차하신 주민여러분께서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아파트 안내방송을 듣다 보면 놀라울 때가 있다. ㅎ아파트에 살던 때나 ㅅ아파트에 사는 지금이나 매번 닮은꼴이다. 아파트 관리자들이 함께 모여 연습을 한 것도 아닐텐데.
하긴 닮은꼴 말투가 아파트 안내방송뿐인가. “오늘도오 저히이 00백화저엄을 찾아주신 고오객 여러부운께 진심으로오 감사드리오며…”로 시작되는 백화점 방송, “대한!! 천리교를 믿읍시다!!”라고 외치는 거리의 전도사들이나 “00리 주민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로 시작되는 이장님들 동네방송도 그 어떤 `투’라는 게 있다. 이장님이 바뀌어도 좀체 바뀌지 않는.
그렇다면 이처럼 제각각 색깔을 지녔던 일상의 언어들도 일단 `마이크’라는 장치를 거치면 `묘한 투’와 `말 틀’에 갇히는 이유가 뭘까. 마이크를 통과하기 전까지 `말’은 자기표현의 수단일 뿐이었는데 마이크를 통과하는 순간 `말’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미디어’가 되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마이크를 잡으면 이장님도, 경비아저씨도 쓴 기침으로 목청을 다듬고, 사투리를 자제하며, 또 알게 모르게 그동안 마이크를 통과해간 말투를 흉내내게 되는 것이다.
관행적인 `투’ 흉내내기는 미디어 종사자들도 마찬가지다. “…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가 큽니다” “시민들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라는 보도투, 기사투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런 리포팅의 끌텅을 파보면 어떤 시민들이 우려하고 빈축을 퍼부었는지 실체가 모호하거나, 전문가들이 지적한 게 아니라 어느 한 전문가가 지적했을 뿐인 경우, 심지어는 기자 개인의 견해가 객관적인 양 포장되어 전달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예고된 인재였습니다” “관할행정당국은 팔짱만 끼고…”처럼 전혀 다른 사안에도 반복적으로 쓰이는 닳아빠진 표현들 역시도 현장 취재 부족, 사안의 핵심을 짚어내지 못한 책임을 교묘히 비켜 가면서 객관적인 전달과 지적을 위장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종사자들의 `투’는 단순한 흉내내기를 넘어 주관적인 것의 객관화, 특정한 것의 일반화, 없는 근거를 만드는 정당화 수단으로까지 악용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니 우리 눈과 귀에 익숙해진 `틀거리에 갇힌 말과 글’에 딴지를 걸어볼 필요가 있다. 엇비슷하게 `투’를 흉내내며 굳어지는 말들, 중심을 `투’에 실어버린 말들이 정작 `마이크’가 전달해야 할 진짜들을 놓치고 가는 것은 아닌지.
김인정 <광주 MBC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