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향연]<50>잘 살기 위한 조건들 

지금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 그리해야 잘 살고 있음이다!

2014-01-05     박해용
 해가 바뀌는 시간에 맞춰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누구는 해가 지는 곳을 향하여 길을 재촉했고, 다른 누구는 해가 뜨는 멋진 장면을 사진에 담으려고 애를 태우며 피사체에로 몸을 던졌다. 해가 뜨는 장면을 잘 볼 수 있는 좋은 곳을 골라 차지하고서 추운 다리 바닥에 담요를 깔고 해가 뜨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더 잘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땅 위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잘 사는 것을 선호하며 나름대로 잘 살려고 노력한다. 잘 살려고 하는 노력은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더 잘 살아가려는 노력과 결부돼 있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곧 보다 더 잘 살려는 의지가 꿈틀거리는 것을 말하고 그 의지를 행위로 옮기려는 실천을 포함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잘 사는 것은 편안하거나 행복하게 사는 것과 다른 것 같다. 그래서 201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 사는 것을 위한 조건들에 관해서 생각해 본다.

 

 잘 사는 일은 행복과 다르다

 어느 해 여름 진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골 길을 걷다가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 몇 마디 말을 섞자말자 할머니는 “나는 여기서 맹글어져서 이렇게 살아부렀어. 나는 한 번도 여기를 떠난 적 없어! 그러나 먹을 것 먹으면서 편안하게 살았어. 행복하게 산거지.” 라고 했다. 진도 할머니는 진도에서 태어나 진도에서만 살았다는 것이다. 80년 이상을 살면서 결코 진도를 떠난 적이 없지만, 그러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한 방송에서 들은 적 있다. 어떤 총리 부인과의 인터뷰 내용이었는데, 기억나는 대로 요약한다. `난 남편의 일을 내조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결혼 후 모든 정성을 다하여 남편을 내조했다. 평생 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낼 수가 없었지만 그러나 내 일생을 돌아보면 난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진도 할머니가 어떤 사정으로 일생을 한 지역에서만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잘 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허나 다른 세상을 한 번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사리의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잘 살았으리라는 것을 의문시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논의를 위하여 형식화해서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태어난 그 지역에서만 평생을 산 경우나 총리 부인의 남편만을 위한 내조의 삶이 서로 공통점을 갖는 것 같다.

 두 경우 각자는 자신의 삶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잘 살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자신이 갖는 어떤 삶의 의미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태어나 산다는 것은 생명을 갖는 것이고, 그 생명은 자신에 적합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을 갖는다. 잘 산다는 것은 존재하는 생명체가 자신에 적합한 혹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경제적인 부유함은 뭔 상관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과 몸의 편안함 혹은 여유있는 생활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행위에서 찾는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나 더 넓은 평수를 위한 절약과 저축 그리고 더 나은 생활조건을 위한 맹목적 질주가 이러한 현상을 잘 말해준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물질적 축적에 모든 관심을 돌리고, 일신의 편안함을 찾기 위해서 어려운 일에 대한 도전을 피하고 일상에 안주하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유있는 생활을 위해서 더 나은 생활수단들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능력을 투여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부유함은 잘 사는 것과 하등 상관이 없을 수 있다. 생활이 부유하더라도 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생활이 부유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옳고 그름을 잘 구별하는 판단력을 갖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리고 그 일이 우리의 삶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의미를 갖는다면, 그는 잘 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편안한 삶도 마찬가지다. 그 삶이 잘 사는 삶이 되려면 편안하되 오욕의 길을 걸으면 안 된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편안함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한다. 잘 사는 삶은 단순히 부끄러움을 남기지 않는 차원을 넘어서서 자신의 삶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긍정적인 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사회적 의미를 생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 개인은 사회적 연결고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이 일이 정말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인가? 다시 말하면 이 일이 세계 속의 내 존재에 적합한 일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내가 하고 싶다는 일이 내 존재에 마땅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타인에 의해서 내게 주어진 것이 나에 의해서 생각되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는 것은 전체적인 것

 이렇게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잘 살기 위한 조건들에는 판단력, 열정 그리고 의미의 지평이 필요하다. 아는 일에 관해서 어떤 일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구별하고, 행동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알고 나가서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능력은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 갖춰야 할 첫째 조건이다.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다면 그는 지식의 어둠에 갇힐 것이며, 옳고 바른 행위를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최상의 판단능력이 될 것이다.

 또한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그 조건으로서 열정이 필요하다. 열정은 삶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삶에 열중하는 것을 뜻한다. 열정은 삶은 유한하고 유일하며 오직 생생한 것으로, 자신의 삶은 자신이 자각할 때만 그 생생함을 갖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삶을 투철하게 들여다보면서 그 흐름과 변화에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 삶을 내가 다루는 것이며, 내가 내 삶의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잘 사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잘 사는 것은 전체가 잘 사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내가 잘 사는 것은 세계 속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살기 위한 조건으로 의미의 지평이 필요하다. 내 삶이 의미를 가져야 한다. 내 삶이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은 사람의 삶과 문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의미의 지평 위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박해용<전남대 강의교수, 무등지성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