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보르헤스의 ‘바빌로니아의 복권’
달콤한 불확실성과 평등한 쾌락의 맹목 우연성의 도박, 또 하나의 바빌론 유수
나는 복권이 현실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어지러운 땅에서 태어났다. 오늘날까지 나는 해독할 수 없는 신들의 행동이나 내 심장의 움직임에 대해서처럼 복권에 대해서도 거의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바빌로니아와 그곳의 소중한 관습에서 멀어진 지금에서야 나는 다소 당황스러워 하면서 복권과 몸에 수의를 두른 사람들이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속삭이던 신성모독적인 추측들을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복권이 바빌로니아에서 평민들이 즐기던 놀이였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이발사들이 구리 동전을 받고서 기호들이 장식된 사각형의 뼈나 양피지를 나눠주었다고 말씀하셨다. 환한 대낮에 추첨이 실시되었다. 운명이 미소 지은 사람들은 더 이상의 행운이 있는지에 대한 확증 없이 은으로 주조된 동전을 받았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그런 과정은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복권은 실패했다. 그런 복권은 그 어떤 도덕적 가치도 없었고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들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희망만 겨냥한 것이었다.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이내 금전 위주의 이런 복권 제도를 만들었던 상인들은 손해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개선책을 강구해 행운의 숫자들 사이에 몇 개의 불운의 숫자를 끼워 넣었다. 이런 개선책을 통해 숫자가 새겨진 직사각형 조각을 구입한 사람들은 당첨금액을 받을 수도 있었고 종종 상당한 액수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게 되는 이중의 아찔한 모험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그런 경미한 위험요소는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웠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복권에 흠뻑 빠져버렸다.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들은 소심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 보르헤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복권은 사회성을 가진 도박이다
복권의 기원이 언제인지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파헤쳐 보는 일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단순한 재미로 혹은 사소한 내기를 통해 일상의 심심함을 달랜다. 가위바위보라는 간단한 승부는 고전적인 게임으로 그 자체가 승부이거나 다른 승부를 걸기 위해 예비하는 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제비뽑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수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을 가려내는 긴장이 감도는 일종의 승부 놀이다.
복권은 가위바위보나 제비뽑기와는 전혀 다른 질적 차이를 가진 승부이며 내기다. 복권은 다분히 사회성을 띤 도박이다. 사회성을 띤다는 것은 이 놀이 내지 경기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몇 사람이 아닌 다중이라는 것이고, 도박이라는 것은 내가 얻을 행운이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점에 있다. 가위바위보나 소수의 제비뽑기는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행운의 주인공은 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만큼 늘어난다. 물론 이 경우에도 남들이 갖지 못한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가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럴 확률은 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시는 그 행운의 주인공과 다시는 놀이를 하지 않겠다는 분노의 결심을 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복권 기본적으로 다수의 대중을 참여시키는, 사소한 놀이를 넘어서는 거대한 사업이다. 이 게임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우연성에 행운을 기대하는 긴장감 넘치는 유희다. 복권의 추첨에 불합리한 방식을 개입시키지만 않는다면 전체적으로는 행운의 당첨자가 고른 분포를 보이겠지만, 다수의 대중이 참가하기에 행운은 개인에게는 매우 우연적으로만 찾아온다. 복권을 산 개미들에게 당첨은 무척 더디게 오거나 영영 오지 않는 행운이기 일쑤다.
소설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복권을 좋아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관심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라 전체가 복권으로 미쳐있다면 그건 사회적 현상으로서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복권의 속성이 우연성에 있다면, 필연성에 기댈 수 없거나 필연성을 배제하고픈 욕망이 큼 사회가 복권을 열렬하게 찬양하지 않을까? 어떤 사회가 우연성에 천착하고 있다면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합리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와 사회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복권의 진수, 나의 행운과 남의 불운 사이
이제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은 모험정신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져 조롱을 받았다. 이렇게 정당화된 경멸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표적을 만들어냈다.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벌금 패를 뽑은 사람들까지도 조롱당하게 된 것이다. 회사는 당첨자들의 이익을 보호해야만 했다. 벌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당첨자들이 상금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추첨에서 진 사람들이 벌금을 내도록 소송을 걸었다. 판사는 벌금을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원래의 벌금과 소송비용을 지불하든지 아니면 며칠 동안 감옥에 가두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모든 피고인들은 회사가 낭패를 보도록 모두들 감옥행을 선택했다.
회사는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힘까지 지닌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얼마 후 추첨번호 통지문에 벌금 목록은 빠지고 불행의 번호에 부여된 구류 기간만 표시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의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런 간결한 문구는 극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최초의 비금전적인 복권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대단한 성공이었다. 회사는 복권에 참여한 사람들의 성화에 불운의 숫자를 늘려야만 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논리와 대칭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행운의 숫자들은 돈으로 계산되고 불운의 숫자들은 구류로 계산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었다. 몇몇 도덕가들은 돈이 있다고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고 다른 형태의 행복이 더 직접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층 계급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또 다른 불평이 터져 나왔다. 성직자 계층이 판돈을 늘리고는 변화무쌍한 온갖 공포와 희망을 즐겼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토록 달콤한 불확실성에서 자신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가 평등하게 복권놀이에 참여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에 찬 시위를 하게 만들었다. 한 노예가 주홍색 복권을 훔쳤고 추첨 결과 그 복권의 소지자는 혀를 태우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복권을 훔친 처벌 역시 그것과 똑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도둑이기 때문에 달군 쇠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관대한 어떤 사람들은 행운이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집행자가 달군 쇠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요가 일어났고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부유층의 반발을 꺾고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 보르헤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바빌로니아의 복권-사디즘, 혹은 마조히즘(?)
힌두의 신 시바가 많은 힌두인들, 특히 낮은 카스트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무엇인가? 창조의 신 브라마는 공히 존경받는 신이기에 거론할 바는 아니지만, 유지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 중 낮은 카스트는 왜 비슈누보다 시바를 더 사랑하는 것인가? 윤회하는 우주에서 현세의 불운한 세상은 빨리 마감해야만 하는 시린 세월이기에 파괴자로서의 시바는 그들에게는 행운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상금이 걸린 복권에 왜 금방 싫증을 낸 것일까?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복권이 그들에게 안겨줄 행운이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상금은 푼돈에 지나지 않기에 상금은 의미가 없고 당첨은 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못한다. 빈자들에게 당첨은 좀처럼 오지 않는 행운이며 상금 역시 그들의 삶을 역전시킬 정도의 거액은 아니다. ‘불운의 숫자’라는 획기적인 발명품은 복권의 혁명이었다. 행복이란 나에게 행운이 충만할 때에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간혹 아니 지주 인간은 타인의 불행으로 인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악한 존재들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타인의 불운을 먹고사는 프시케의 언니들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논리와 대칭을 좋아한다 했던가? 한때 그들의 위대한 왕이었던 함무라비가 태양신 사마슈로부터 받았다는 법전에는 묘하게도 논리와 대칭이 명징하게 새겨져 있다. 일명 ‘복수법’이라 불리는 함무라비 법전의 조항들은 죄와 벌이 뚜렷하게 대칭적이며 범죄자와 피해자의 경중을 재는 잣대가 논리적이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막연한 복수심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복권이라면 깨작깨작 푼돈 버는 재미보다는 시바 신의 파괴력을 가슴에 담아 폭발시켜버리는 재미가 더 쏠쏠하지 않을까? 그들의 복권은 이제 끊을 수 없는 마약이 되었다.
욕망이 꿈틀대는 곳에 강자들의 시스템이 있다
이제 돈을 목적으로 하는 복권은 폐지되었다. 바알 신의 비의에 따르는 입사 의식을 치른 자유인들이 신성한 추첨에 참여하게 되었다. 추첨은 신의 미로에서 예순 번의 밤 동안 실시되었고, 그 후 예순 날에 걸친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첨 결과가 나왔다. 행운의 패를 뽑게 되면 그는 성직자 위원회의 위원도 될 수 있었고, 자신의 정적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었으며, 조용하고 어두운 방에서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단둘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불운의 패를 뽑을 때는 팔다리가 잘리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복권의 여러 추첨방식을 배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전권을 쥐고 있었고 매우 영리했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어떤 행복들이 단지 우연의 소산일 따름이라고 그런 결과들을 과소평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피하기 위해 회사는 암시와 마술을 사용하곤 했다. 모든 시림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희망과 공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그들은 점쟁이와 첩자들을 이용했다.
몇 개의 사자 석상과 카프카라고 불리던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먼지투성이의 하수도에는 틈새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기는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바로 그런 장소에 선하거나 또는 악한 사람들이 기밀 정보들을 놓아두곤 했다. 모든 소문들에 대해 회사는 직접적 대응을 삼갔다. 대신 성스러운 책에 들어있는 짤막한 성명서를 어느 폐허에 갖다 두었다. 그 문구는 복권이라는 세계의 질서 속에 우연을 삽입키는 것이며, 실수를 받아들이는 우연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교리에 의거해 지적하고 있었다.
- 보르헤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또는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하나의 유희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추첨을 통해 행운을 가져다주는 ‘복권’이라는 유희였다. 하지만 복권은 부자에게도 빈자에게도 유희로서의 매력을 잃고 시들해졌다. ‘달콤한 불확실성’이라는 마약을 맛본 그들은 사디스트적이면서 동시에 마조히스트적인 쾌감을 얻기 위해 파괴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내게로 오는 허접한 행운보다는 남에게로 가는 알싸한 불운이 그들을 짜릿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 마약에 흠뻑 도취되었다.
논리와 대칭성은 당첨의 횟수와 상금의 종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복권을 추앙하는 사람들은 복권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논리와 대칭을 요구하여 쾌락의 평등을 구현했다. 계급장 떼고 맞붙는 겨루는 싸움의 묘미는 짜릿하고도 달콤하다. 누구에게나 불운이 찾아올 수 있다는, 우연적인 듯하면서도 필연적일 듯한 그들의 확신은 마침내 성공하였다.
희망이 길을 잃으면 욕망이 되고 욕망이 눈을 잃으면 파국을 맞는다. 희망은 그 꿈이 소소하여 사람들이 고루 나눌 수 있지만 꿈틀대는 욕망은 필연코 폭발하고야 만다. 행운을 사는 곳에도 욕망이 스며들 듯이 불운을 파는 곳에도 욕망이 번진다. 그 욕망은 막강한 힘을 만들고, 막강한 힘을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는 개인이나 집단은 사고 파는 평등한 시스템을 기필코 몰래 망가뜨리고 자기 것으로 편취한다.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고 빈자는 부자를 넘볼 수 없다. 강자는 늘 부와 지식을 편파적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손쉽게 시스템을 장악할 수 있고, 장악된 시스템은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먼저 습득하게 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정보를 생산하게 한다. 빈자와 약자들이 제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 사실을 알아낼 재간은 없으며, 설령 알아챈다 해도 강자와 부자들은 이미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성물(聖物) 속에 비밀을 묻어버린다.
복음(福音)을 위조하는 율법의 사기꾼들
사자 석상들과 그 성스러운 화장실은 회사가 거부하진 않았지만 회사의 공식적인 보증 없이 작동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성명문은 대중의 불안을 잠재웠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우연의 지시를 따르고 그것에 자신들의 목숨과 희망과 이름 모를 공포를 바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권의 미로와 같은 법칙들을 연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의 작동방식을 드러내는 회전하는 천체에 대하여 연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회사의 역사만큼 그토록 허구로 오염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원에서 발굴된 고문서 자료는 어제의 추첨 결과일 수도 있고 수백년 전에 추첨한 작품일 수도 있다. 각 권마다 그 어떤 차이도 없는 책은 출간되지 않는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생략하고 덧붙이이며 바꾸겠다는 비밀 맹세를 한다. 또한 간접적인 거짓말도 한다. 회사는 신처럼 겸손하게 공개적인 것은 모두 피한다. 당연히 회사 요원들은 비밀리에 활동한다. 회사가 전해주는 지시들은 사기꾼들이 퍼뜨리는 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
- 보르헤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권력은 다른 권력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듯이 하나의 세계를 장악한 권력은 굴러들어오는 낯선 권력이 뿌리를 박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겉으로 포착되는 불평등한 쾌락을 척결하고 무난히 안주한 그들은 권력이 부린 마술과도 같은 그물에 포획되어 불운을 받아들이고 공포를 수용한다. 바빌로니아의 강자들은 공포마케팅과 ‘희망 고문’으로 대대손손 행복하다.
몇 개의 사자상과 성스러운 화장실을 들어 독자들을 탄탈로스로 만든 소설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본색을 쏟아낸다. 이슈타르의 사자와 하다트의 황소가 배설하는 어두운 지하의 통로는 마치 음욕의 길과 같다. 쾌락의 본질은 궁극적으로 동일하므로 금전욕이든 파괴욕이든 성욕이든 다르지 않다. 회사는 늘 대중의 의심을 신성한 ‘말씀’으로 짓누르고 성스러운 책자를 찢어내어 부적처럼 의심하는 자들의 면상에 발라버린다. 복권이 그냥 복권이 아니라면 회사가 내미는 말씀은 복음이 아니다. 사원에서 발견되는 문서며 그것들을 조작하는 성직자며 하는 것들은 종교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읽힌다. 이를 위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차출된 신화와 전설과 유물이 흡사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압송된 이들의 ‘바빌론 유수’처럼 애처롭다.
김시인 <인문학교 아나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