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소설을 만나다]강을 듣다

서숙희 ‘물소리를 듣다’ & 최학준 역 ‘세계 4대 문명’

2021-08-25     박혜진
예르강의 스키프.

[시, 소설을 만나다]서숙희 ‘물소리를 듣다’ & 최학준 역 ‘세계 4대 문명’

때론 보이지 않을 때 열려오는 귀가 있다.
달 없는 밤 냇가에 앉아 듣는 물소리는
세상의 옹이며 모서리들을 둥근 율(律)로 풀어낸다. 

물과 돌이 빚어내는 저 무구함의 세계는
제 길 막는 돌에게 제 살 깎는 물에게
서로가 길 열어주려 몸 낮추는 소리다.

누군가를 향해 세운 익명의 날이 있다면
냇가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맡길 일이다.
무채색 순한 경전이 가슴에 돌아들 것이니.
서숙희  ‘물소리를 듣다’

문명, 강의 선물

문명은 강을 끼고 융성하며 강을 품고 쇠락한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천지창조의 신 반고의 신화는 강이 반고의 피가 흘러 고인 희생의 산물이라 전한다. 까마득한 옛날 거대한 알에서 깨어난 거대한 남자가 허공을 가르고 섰다. 굳지 않은 하늘이 부글부글 끓고 땅은 움푹움푹 패는데, 스스로 기둥 되어 두 팔로 하늘을 두 발로는 땅을 딛고 선 사내. 기운이 다하여 스러지던 날, 반고의 두 눈은 달과 해가 거대한 뼈는 산맥이, 흐른 땀과 피는 강줄기와 바다가 된다. 살은 대지가 되어 뭇 생명들을 지탱하는 울타리가 된다. 4대 문명을 이러한 반고, 혹은 자연신의 일부라 불러도 좋을 ‘강’을 거름 삼아 자랐다.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다. 인더스 문명도, 황하 문명도 문명이 발흥한 강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 불리는 두 강을 낀 초승달 모양 땅에서 꽃 핀 문명이 최초의 문명이라 일컫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기원전 5세기 수학자 탈레스가 만물의 기원은 물이라 칭하고, 싯다르타가 강물에 의지해 깨달음에 이르렀듯, 오랜 인류가 원시를 지나 역사인이자 문명인이라 불릴 수 있었던 까닭은 모두 물에 있었다. 물을 관찰하고 물의 변화를 짐작하며 물을 가까이하며 살았던 물과의 깊은, 유대에 있었다.

5000년 전의 이집트를 상상한다. 시리우스별이 나일 강과 직각을 이루는 7월 중순의 푸릇한 새벽, 하늘에서 까만 폭우가 내린다. 8, 9월을 지나 10월이 되어서야 멈추는 기나긴 장마. 강은 넘치고 흘러 어디까지가 강둑이며 민초들이 농사짓던 땅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강의 범람은 변고 아닌 축복, “감사합니다. 나일 강을 관장하는 히피신이여!” 상류로부터 흘러내려온 퇴적물이 쌓여 비 그친 후엔 새로운 농토가, 새 땅의 낙원이 도래했던 것이다. 물 빠진 기름진 땅에 파피루스가 자라고 사제들에 의해 채집된 파피루스는 지식을 나르는 종이가 되었다. 군데군데 패인 웅덩이에는 물고기가, 풍족한 먹이를 찾아 날아온 새들이 튼 둥지 안에는 따스한 생명이, 나일 강은 이집트를 낳은 어머니였다.

4달에 걸친 폭우는 뜻밖의 문명을 낳는 계기가 되었으니 파라오가 구휼의 일환으로 펼친 피라미드 건립 정책이 그것이다. 호해로 농사를 멈춘 사람들은 사막에서 돌을 자르고 나르고 쌓는 노동을 대가로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받았다. 집단적 호흡이 중요했던 대규모 건축공사이니 만큼 가혹한 처벌이 행해졌으리라는 추론도 있으나 실업의 기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들에게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위엄 혹은 절대 권력을 체감하는 직접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삶

나라들이 앞 다투어 랜드 마크를 올리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마천루가 도시마다 첩첩이 오르는 이유도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과 호기심 그리고 일종의 과시욕이 낳은 산물일 터. 인공위성에서 형태가 찍히는 두 조형물이라는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는 수천 년을 거슬러 인류의 불멸에 대한 요구와 욕구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드러낸다.

죽어서 다시 돌아오기를 꿈꿨던 재생과 부활에의 의지는 믿음이 되고 종교가 되었다. 한 사람이 믿으면 상상이나 다수가 믿으면 체제가 된다. 국가도, 법도, 우리가 ‘인간다움’이라 규정한 윤리도 인간이 오랜 시간 공들여 갈고닦은 상상의 산물 아니던가. 시간이 흐르면 문명의 형태는 변하고, 선호하는 아름다움의 기준도 변하겠으나 인간의 ‘생성에의 욕구’는 빛 바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강이 그러하니, 강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여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되 매순간이 새롭기 때문이다.

장자는 지극히 선한 존재가 있다면 그는 물과 같을 것임을 말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겸손과 겸양을 갖췄으며 흐르다 만난 장애물과 다투지 않고 에둘러가는 포용력을 가졌다. 흐르고 흘러 마침내 도달한 대양 앞에서, 강물은 그제까지의 이름을 버리고 ‘전체’가 된다. 언젠가 동료들과 작은 거룻배를 타고 놀이삼아 건넜던 영산강에의 추억을 떠올린다. 철학자는 강에서 미덕을 발견하고, 과학자는 강에서 인류의 기원을 묵상한다.

젊은 날의 나는 스스럼없고 단순하던 시절의 추억을 강에 두고 왔다. 도로를 달리다 강 근처를 지날 때면 프로스트의 마들렌 조각처럼 강렬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여름 한낮의 강물. 21세기 대한민국의 아이들이 ‘강’이라는 낱말에서 유쾌한 내음을, 시원하고 짜릿한 촉감을, 근사한 기억을 떠올리기를. 그것이 4대 문명을 일으켜 세운 강이 인간에게 바라는 단 한 가지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강의 신 하쿠가 치히로에게 당부하던 말. “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의 진짜 이름만은 잊어서는 안 돼. 너는 사람이야.’ 부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던 어린 날의 나여, 인간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잊지 않기를.

이 강물을 사랑하라! 그 강물 곁에 머물러라. 강물로부터 배우라! 암, 그렇고말고. 그는 강물로부터 배우기로 작정하였으며. 강물이 들려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작정하였다. 강물과 강물의 비밀들을 이해하는 자라면, 다른 많은 것도, 많은 비밀들도, 나아가 모든 비밀들도 이해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강에 숨어있는 무수한 비밀들 가운데에서 그는 오늘 단 한가지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가 본 비밀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순간마다 새롭다! 오, 과연 그 누가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리.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박혜진 문예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