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프란츠 카프카의 ‘시골 의사’ & 사명감과 공명심

폭설의 밤길을 달려간 사명감의 진실 본질을 발각당한 존재의 도덕적 해이

2021-09-08     김시인
본질이 벗겨진 시골 의사는 환자의 침대에서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한심한 의사는 공공에 봉직(奉職)하는 투철한 사명과 공의(公醫)의 명예를 들먹이며 본질적 사망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낯선 밤, 시골 의사의 이상한 출장

마부가 소리치자 힘차고 옆구리 탄탄한 말 두 마리가 멋진 대가리를 낙타처럼 숙이고 문틈으로 나와 콧김을 거세게 내쉬며 똑바로 섰다. 나는 그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데다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판국에 나를 돕는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그는 계속 말을 다루는 데만 열중한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 번도 그런 멋진 마구를 갖추고 타본 적은 없었다.
“타시지요.”
“자네는 길을 모르니 내가 마차를 몰겠네.”
“물론이지요. 하지만 저는 가지 않습니다. 로자랑 함께 있겠습니다.”
“안 돼요.”
로자가 외치면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분명히 예감하여 집 안으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거는 문고리 사슬의 철컥 소리가 들린다.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그것도 모자라 마루에서 또 온 방들을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를 못 찾도록 불이란 불은 다 끄는 것이 보인다.
“자네도 같이 가든가, 아니면 내가 그만두겠네, 그렇게까지 절박한 것은 아니니, 마차를 타고 가는 대가로 저 처녀를 내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이랴!’ 하며 그가 손뼉을 치자 마차는 물살에 휩쓸린 나무토막같이 마냥 쏜 살같이 내달린다. 내 집의 문이 마부의 돌격으로 와지끈 부서지는 소리를 아직 나는 듣는다. 그런 다음 내 눈과 내 귀는 오관을 고루 파고드는 굉음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나의 집 대문 앞에 곧바로 환자 집의 마당이 열리기라도 한 듯 나는 벌써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시골 의사>

눈보라가 몰아치는 한 밤중에 시골 의사는 중환자가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는다. 그러나 의사의 말은 겨우내 너무 부려먹어 간밤에 죽어버렸고, 하녀 로자가 마을로 말을 구하러 다녔지만 폭설에 말이 죽을까봐 아무도 말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마당 한 귀퉁이에 있던 돼지우리에서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나오더니 마을 내어주고 훌륭한 마구로 친절하게 말을 매어준다. 의사는 사연을 물을 경황도 없이 몸소 말을 몰기 위해 마부석에 오르지만, 로자를 추행했던 낯선 남자는 의사와 동행하지 않고 마차를 출발시킨다.

인용한 끝 부분만 아니라면 소설은 아직 판타지가 아니다. 남의 집 돼지우리에서 나온 낯선 남자는 폭설을 피해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들어왔다 들킨 나그네라고 봐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거 침입을 한 사실은 알지만 추운 겨울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한 시가 급한 마당에 이 일로 옥신각신 할 틈도 없으려니와 그 남자의 말이 아니면 꼼짝도 못할 판국이니 서로 좋은 일이라 여기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이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그런데 출발당한 마차가 의사의 집 마당을 벗어나는 순간 환자의 집 마당에 도착했다는 건 무슨 소린가? 10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찰나의 시간에 ‘순간이동’을 한 것이라면 이건 판타지다. 아니면 의사의 착각이었을까?


 폭설의 밤길을 달린 사명감의 진실

나는 머리를 소년의 가슴에 댔다. 소년은 건강했다. 약간 혈색이 나쁠 뿐, 건강하서 그저 발길로 뻥 차서 침대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개선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워 있게 내버려두자. 나는 너무하다 싶은 지경까지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 봉급은 적은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인색하지 않다. 나는 로자를 돌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야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다. 여기 이 끝없는 겨울에 내가 무엇을 하겠는가!나는 왕진가방을 닫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입술을 깨물고 있고 그의 누이는 피 묻은 손수건을 흔들고 있다. 이들을 어찌 할 것인가? 내가 소년에게 다가가자 소년은 내가 금방 기운날 수프라도 갖다 주는 양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나는 소년이 아프다는 것을 이제 발견한다. 그의 오른쪽 옆구리 허리께에 손바닥 크기의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상처는 파헤친 광산처럼 열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심한 상태가 나타났다. 굵기와 길이가 내 작은 손가락만한 벌레들이 본디 색깔에다가 피까지 뿌려져 분홍색으로, 상처의 안쪽에 들러붙은 채 조그만 흰 머리와 수많은 작은 발들로 꿈틀 거리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야, 도울 길이 없구나. 너는 죽을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시골 의사>

거친 눈보라가 흩날리는 기후에도 불구하고 환자를 돌보겠다는 일념으로 밤길을 나선 시골 공의(公醫)의 헌신은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 더구나 제 집안에 닥칠 위기를 뒤로 하고 공공의 일을 우선하는 희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이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진찰을 했음에도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찾아내지 못한다. 의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진찰한 뒤의 결론은 꾀병이었고 꾀병에 대한 그의 처방은 소년의 몸을 발길로 뻥 차서 침대 밖으로 몰아내는 일이었다.

소년의 가족들이 보인 항의와 하소연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심각한 오진을 내리고 돌아갔을 것이다. 맛있는 수프나 달라고 떼를 쓰는 꾀병쟁이로 치부했던 의사는 소년이 심각한 자상(刺傷)을 입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의사는 치료도 하기 전에 환자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년을 외면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여달라고 외칠 때는 숭고한 의사처럼 검진을 하더니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상황에선 짐짓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환자와 가족들의 애원이 이 의사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달라는 생떼이며 성화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무지한 시골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자기를 괴롭혀 왔다고 변명하고 있다. 자기는 박봉에 시달리고 있고 밤에도 환자를 돌보기 위해 달려오는데도 시골 사람들은 늘상 자기들의 요구만 늘어놓는다고 불평하는 것이다.

의사는 뻔뻔하게도 시골 사람들이 질병과 상처의 치료를 의사에게 의존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들이 지녀왔던 오랜 신앙을 잃어버린 것을 탓하고 신부가 방안에 틀어박혀 미사복이나 가닥가닥 풀어 뜯는다고 비난한다. 하늘에 기댈 치료를 왜 의사에게만 기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투다.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그를 달려가게 하는 본질이사명감인지 공명심(功名心)인지 분간해야 한다. 공명심을 사명감으로 위장한 존재들은 결국 광야에서 폐기된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감출 비상한 대책을 비현실에서 꿈꾼다. 의사는 힝힝거리는 말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지상의 의학이 아닌 천상의 은총을 구한다. 하늘이 보내준 두 필의 말로 불가능한 거리를 달려왔으니 환자를 구할 신약(神藥)을 구걸한다고 대수겠는가?


본질을 발각당한 존재의 ‘moral hazard’

치명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소년은 이미 알고 있다. 의사가 자기를 치료할 능력도 치료할 의지도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에겐 욕망이 남아 있지 않다. 욕망 없는 사람은 기대하지 않는다. 욕망을 거두면 진실이 보인다. 치료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의존하기에 진실에 맹목(盲目)이지만, 치료할 수 없다는 진실을 안 환자는 의사가 눈보라 치는 밤에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선의(善意)에 있지 않음을 알기에 진실을 목도한다.

“저는 선생님을 별로 안 믿어요. 선생님도 그냥 어디엔가 떨구어졌을 뿐이지 선생님 발로 오신 게 아니잖아요? 도와주시기는커녕 죽어가는 제 잠자리만 좁히시는군요. 선생 님 눈이나 후벼 파내었으면 좋겠어요.”
“참기 힘든 치욕이군. 나는 의사야. 내가 무엇을 해야겠나? 믿어다오, 이건 나한테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저더러 그 따위 변명으로 만족하라고요? 아, 그래야 하겠지요. 언제 나 나는 만족해야 하지요. 아름다운 상처를 가지고 나는 세상에 왔지요. 그것이 내가 갖추어온 모든 장비였지요.”
“어린 친구, 자네의 결점은 전체를 보는 눈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야. 자네 상처는 그다지 나쁘지 않아. 쇠스랑으로 두 번 찔러서 난 구멍일 뿐이지. 많은 사람들이 옆구리를 드러내놓고도 쇠스랑 소리를 거의 듣질 못하지.”
“정말 그런가요, 아니면 열에 들뜬 저를 속이시나요?”
“정말 그렇다니까. 공직을 가진 의사가 명예를 걸고 하는 말이야.”
- 프란츠 카프카, <시골 의사>

참으로 요망한 혀를 가진 의사다. 자신의 무능력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변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소년의 말에 그의 무지를 나무라며 공직(公職)에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자신을 믿지 않는 행위는 온당치 않음을 늘어놓는다. 

소중한 생명과 소중한 명예를 저울질하는 의사에게 소년은 ‘당신은 그저 떨구어진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여기로 달려온 이유는 의지가 충만해서가 아님을, 그의 존재가 그저 의사였기에 올 수 밖에 없었음을 송곳처럼 날카롭게 적시한다.


 본질을 상실한 존재는 폐기되어야 한다

나는 옷이 벗겨졌고 수염 속에 손가락을 넣고 숙인 머리로 사람들을 응시한다. 나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그들 모두보다 우월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이 머리와 두 발을 잡아 나를 침대 속에 들여다 놓았으니 말이다. 그들은 담벼락에다, 상처의 곁에다 나를 내려놓는다.
- 프란츠 카프카, <시골 의사>

의사의 본질은 치료하는 것, 치료하지 않는 의사는 의사로서의 본질을 잃은 것이기에 그는 폐기되어야 한다. 시골 의사는 마침내 의사의 본질이 벗겨지고, 벗겨진 그는 환자의 침대에서 환자와 함께 처분되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왕진가방 안에 든 칼이 제 기능을 잃고 쓸모가 없어졌다면 그 칼은 칼의 본질을 상실했으므로 폐기되어야 하고, 그를 태우고 온 말이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면 그 말은 말의 본질을 상실했으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한심한 의사는 폐기되지 않아야 할 본질이 남았던 것일까? 의사는 공공에 봉직(奉職)하는 사명과 명예를 들먹이며 본질적 사망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저는 선생님을 별로 안 믿어요. 선생님도 그냥 어디엔가 떨구어졌을 뿐이지 선생님 발로 오신 게 아니잖아요.’ ‘참기 힘든 치욕이군. 나는 의사야. 내가 무엇을 해야겠나. 믿어다오.’

이제는 나의 구원을 생각할 시간이었다. 나는 옷과 가방을 주섬주섬 뭉쳐 들었다. 옷을 입느라고 지체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말들이 올 때처럼 서둘러준다면, 나는 이 침대에서 내 침대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할 것이다. 나는 옷 뭉치를 마차 안에 던지고 날듯이 말 위에 올랐다. 말들을 제대로 잡아매지도 못한 채 마차가 이끌려 왔다.
나의 번창하는 의사 생활은 망했다. 후임자가 내 자리를 넘본다. 벌거벗은 채 이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나는 초라한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 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이이 나를 보상해주지 않는구나.’
- 프란츠 카프카, <시골 의사>


광야의 전설-초인은 울고 개들은 짖는다

공명심에 취해 밤길을 도와 달려온 의사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하늘에 구원을 요청하며 줄행랑을 친다. 벌거벗은 몸으로 달아나는 그에게서 명예와 봉공(奉公)은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명예가 있었다면 도망치는 순간에라도 치욕을 먼저 느꼈겠지만, 그러나 그는 그 다급한 순간에도 자신의 직업과 제 자리를 넘보는 후임자의 등장을 염려한다. 

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를 기만하는 태도를 보인다. 야간 비상종에 속았다고 분개하는 건 기만이다. 한밤중에 일어난 이 사건의 본질은 그의 무능력한 자질과 공무의 해태(懈怠)이지 타인의 속임수나 과실은 아니다. 

그는 공명심으로 달려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근면함을 공직 유지의 수단으로 삼아왔다. 기실 낯선 남자와 신비로운 말의 등장은 자신의 의지를 돋보이게 하는 적당한 소재에 불과하다. 이 맞춤한 신화적 클리셰(cliche)는 역경을 헤치고 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그의 공공성을 존재하는 듯이 속인다.

사명감으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그를 달려가게 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달려간 그 자리에 서면 그의 본질이 확연하게 드러나겠지만 굳이 달려가지 않아도 자기는 스스로 안다. 인간은 항상 어디에선가 달려왔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본질을, 자기가 세상에서 어떤 목적과 가치로 존재하는지를 수시로 목격한다. 

허접한 의사로서의 본질을 목격하고도 끝내 자기를 기만하는 시골 의사는 혹한의 광야에서 폐기된다. 폐기되는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개전(改悛)의 정이 없다.

정치와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명감이 자기를 여기로 이끌었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명감인지 공명심(功名心)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인사들도 있다. 

입만 열면 공공의 원칙과 공무의 사명을 부르짖던 자들이 채 끝나지도 않은 공직을 내팽개치고, 자기를 임명한 주인을 개처럼 물어뜯으며, 더 큰 사명감으로 공공에 헌신할 테니 더 큰 공직이 필요하다고 소리친다. 관리를 감찰하던 수장의 직무조차 버거워하던 자들이 무슨 수로 큰 권력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들은 깨닫게 될까?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닌, 공명심이 유일한 본질인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당하고 폐기되는 자신을 직면하게 될까? 

까마득한 날에 광야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백마 탄 초인의 전설은 이미 들은 바가 있거니와, 만인으로부터 추잡한 제 본질을 발각당하고 광야에서 발가벗겨진 채 목 놓아 짖었다는 말 탄 개들의 전설마저 듣게 되는 날은 오게 될까?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