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고전을 만나다]존재하는 무(無)

하재연 ‘빛에 관한 연구’ & 로버트 카플란 ‘0의 세계’

2021-09-15     박혜진
영의 세계, 이끌리오.

[시, 고전을 만나다]하재연 ‘빛에 관한 연구’ & 로버트 카플란 ‘0의 세계’

초가 완전히 녹아버린 후 촛불의 빛은 어떻게 되었는지

일요일의 흰빛이 월요일 쪽으로 사라져갈 때

빛이 사라진 지구가 혼자 돌고 있는 밤을 생각한다.

지구는 그때부터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지겠지.

굿바이,

하고 인간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말로 우주적 회전을 하게 될 것이다.

빛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지 않고

빛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연구하는 사람들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도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적 안녕을 해야만 했고

나는 다시

먼지처럼

이곳저곳에 묻어 있다가,

쓱 닦이곤 했다.

흘러넘쳤던 빛의 입자들은

공중으로 높이 올라가다 생각난 듯 한 번 반짝였다.

그리고 나서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 음이 되어

세계의 투명한 공기를 짙게 한다.

- 하재연 ‘빛에 관한 연구’

0을 발명한 인더스 문명

기원전 2500년 전 인더스 강가에 뿌리를 내린 드라비다족은 화려한 문명을 일군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계획 설계된 도시에는 공중목욕탕과 상하수도 시설, 공공창고와 사원이 들어섰고 제분소와 회의장 등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위한 사유의 산물들이 건설되었다. 청결과 위생, 의식주 등 다수의 주거와 식량을 위한 더할 나위없는 구조였다. 아리안의 침략 후 문명은 그대로였으나 의식은 무너졌다.

자유민이던 드라비다족은 철기를 앞세운 기마민족 앞에 여지없이 무너져 식민화되고, 영원한 복속을 꿈꾸던 아리아인은 종교를 통한 지배의 방법을 떠올려낸다. 카스트제도의 시작이다. 카스트제도란 사제 그룹인 제1 신분 브라만, 제2 신분인 왕족 크샤트리아, 제3 신분 평민 그룹 바이샤와 제4 신분 노예인 수드라를 일컫는, 신이 지으셨다는 위계 피라미드다. 철저한 계급 피라미드 안에서 원주민 드라비다족은 수드라인 노예로 생존했다.

매듭을 이용한 잉카인의 숫자기록.

카스트 제도는 권력에의 야망과 우월주의가 낳은 가상의 산물이었다. 시간이 흘러 인도 샤타국의 왕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창시한 불교에도 브라만교의 흔적이 엿보인다. 브라만교가 주장하는 카스트 제도라는 결계 안에서 인간들은 나고 죽으며 끝없이 환생한다.

그러나 불교가, 선업과 악업에 따라 인간과 축생을 넘나들며 거듭 태어난다는 개방적 윤회를 설한데 비해 브라만교는 신분을 건너뛸 수 없는 폐쇄적 환생을 주장했다. 결정론적 운명이다. 이 점이, 대립하는 구도마저 훌쩍 뛰어넘는 인도인 특유의 낙관성을 낳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면 만년설로 덮인 북쪽 히말라야로부터 남으로는 습하게 타오르는 적도라는-기후와 날씨의 스펙트럼이 넓은 땅에서 살아온 인도인의 환경에의 외경, 이질적인 문화가 뭉치고 섞이며 4500년을 이어온 데서 기인한 복잡계를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인도의 저력이자 특징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겠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던 지인으로부터 위기일발, 일촉즉발의 일화를 전해 들었다. 기차가 여러 시간 연착하는 일은 비일비재, ‘그러려니’ 조급한 심정을 내려놓으려 해도 인터넷강국답게 ‘빠름’에 익숙해져있는 도시인인 그가 새벽 어스름, 번번히 어긋나버리는 인도의 일정표 앞에서 분노하지 않으리라, 당혹해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다스릴 겸 조곤조곤 새벽 산책길에 나섰다고 했다.

한낮의 시끄럽던 소음과 정체불분명한 내음들이 사라진 강은 서늘하다. 그렇게 이국의 물소리에 이끌려 강 근처를 몇 걸음 걷던 그가 맞닥뜨린 것은 그러나 고요한 성찰의 시간이 아닌 번뜩이는 눈빛과 맹렬한 위화감으로 존재를 드러낸 들개 무리였다. 들개들의 시간을 침범한 죄목으로부터 그는 혼비백산 달아났다.

각의 개수와 관련된 인도 아라비아 숫자.

문명과 야생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곳. 물과 불이, 생과 사가 의존하며 피어오르고 사그라지는 곳. 어쩌면 인도문명으로부터 ‘0’이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중세 유럽은 한때 ‘0’을 악마의 숫자로 여겨 사용을 금했다. 없는 것이 있다니,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리고 호기로운가.

0이 없다면 음수의 세계와 허수의 세계도, 데카르트가 발명했다는 좌표평면과 좌표공간도 없다. 0은 숫자의 무리를 무한으로 늘렸다. 0은 지하의 입구를 지키는 케르베로스, 곰과 인간의 경계가 운명 지어지던 웅녀의 동굴이다.

0에서 모든 존재가 비롯하고 융성하며 마침내 다시 0으로 수렴된다. 삼라만상은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흐마가 43억년 동안 꾼 꿈. 감각을 초월한 지고의 선정 상태에 이르고자 참선했던 요기들, 적선을 요구한 후 ‘나로 인해 선업의 공덕을 쌓았으니 감사하라.’며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날리는 행려인들. 별의 탄생과 몰락은 브라흐마의 날숨과 들숨이며 인간의 환생은 날숨과 들숨 사이에서 빛에 날리는 먼지 가루처럼 가볍게 반짝이다 꺼진다. 그렇게 0에서 태어나 0으로 명멸하는 인간의 숙명을 앞에 두고 인도의 경전은 말했다.

“인간이여, 네 할 일은 오직 행동에만 있지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또 행동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결과가 좋고 나쁨을 동일하게 보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라.”

- 바가바드기타

동일함. 0을 무한히 확장하면 전체가 된다. 선도 악도 알고 보면 인간이 분별을 통해 만든 것. 자연은 선악과 구분을 모른다. 인간에게 무한한 풍요와 만족을 제공하는 숲을 우리는 선이라 부르지 않으며 그 숲이 산사태로 무너져 마을을 덮칠 때 악이라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함, 그래서 ‘자연’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가 아니던가.

0을 무한히 확장하면 전체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지고한 상태를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보았던 노장사상의 대가들처럼 인위를 벗은 상태, 그리하여 가장 무구한 동시에 무엇이든 산출 가능한 심리적 상태가 바로 인간의 0아닐까. 심리학에는 칙센트미하이가 발견한 ‘flow’라는 용어가 있다.

몰입(flow)의 상태가 최고조에 이를 때 인간의 뇌파는 휴식의 상태와 같아지고 그의 심리적 시간은 멈춘다. 무아지경! 그리하여 우리가 알아야하는 건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더 잦은 플로우의 체험이다.

성공에의 욕망, 결과에의 집착이 의식을 누르면 ‘플로우’는 오지 않는다. 간혹, 가히 예술적이라고 할 만한 경이로운 팀워크와 절묘한 슈팅으로 감동적인 경기를 펼친 선수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공통되는 답변을 발견한다.

‘어느 순간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듯 시야의 움직임이 선명해졌고 그저 승리가 예감되었다고. 정확한 각도와 결말을 예측하는 듯 몸이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고 움직였다’고. ‘마음이 의지를 만들고 의지가 습관을 만들며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는 말이 있으나 습(習)의 끝에서 도약하기위해서는 그 마음마저 ‘툭’ 놓아버려야 한다는 건 역설적 진리다.

고대 이집트 숫자.

그리하여 삼라만상은 무한으로 확장하나 무한을 가능케 한 배경이 ‘텅 빔’ 즉 ‘공’이라는 것도. 나는 0에서 와서 0으로 돌아간다. 0은 인도인이 꿈꿨던 비슈누이며 시바 그리고 브라흐마의 현현. 내 생에서 나도 그러하니 무수한 시도와 생성 그리고 파괴를 반복한다. 매일 3300억 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내 몸이 그러하고 7년을 주기로 교체되는 인체의 세포주기가 그렇다.

박혜진 문예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