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고전을 만나다] 누가 배신자인가

마거릿 생스터 ‘하지 않은 죄’ & 아모스 오즈 ‘유다’ 

2021-10-06     박혜진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두는 일이 문제다.

해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밤에 당신을 따라다니는 환영들이 그것이다.

당신이 치워줄 수도 있었던
형제의 길에 놓인 돌
너무 바빠서 해주지 못한
힘을 북돋아주는 몇 마디 조언
당신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었거나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말투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모두 너무 크다.
너무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연민을 눈감아주기에는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 마거릿 생스터, ‘하지 않은 죄’

고대 로마의 시작

늑대 젖을 물고 자랐다는 로마 건국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두 쌍둥이는 멸망한 트로이 왕국의 왕녀 레아와 전쟁의 신 아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트로이로부터 헬레네 왕비를 데려오기 위한 9년간의 긴 사투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머쥔 쪽은 그리스 연합군. 그리스연합군의 꾀쟁이 오디세우스는 퇴각을 연출하며 트로이의 너른 평원에 잘 만들어진 거대한 목마 하나를 두고 떠났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기나긴 전쟁의 끝에 이성을 반쯤 잃은 트로이 시민은 승전보에 취했다. 그들은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았고, 묵은 피로와 취기로 깊이 잠든 밤을 타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 정예부대는 트로이의 성을 손쉽게 함락한다. 트로이의 목마는 클릭하는 순간 의지를 잠식해버리는 파멸의 열쇠였다.  

살육과 화염, 아비규환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조용히 숨어들었다. 가정의 안녕을 수호하는 베스타 여신의 무녀로 살아가던 젊은 처녀 레아도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살아남은 후손 중 하나였다. 신성한 공간의 대리자로 혼인이 금지된 무녀와 군신 아레스 사이에 싹튼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이 로물루스와 레무스였던 셈이다. 금지된 사랑답게 쌍둥이는 어머니 곁에서 성장할 수 없었고, 레아의 삼촌은 쌍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물에 띄워 보냈다. 두 아이를 기른 건 가족애와 모성애가 지극하다 알려진 늑대였다.  

‘엉킨 매듭을 푸는 자, 천하를 호령하는 군왕이 되리라.’는 전설을 담고 있던 ‘고르디움의 매듭’을 단 칼에 베어버린 알렉산더가 그리스와 이집트, 페르시아 정복으로 승승장구할 때,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 한 켠에 위치한 작은 로마에서는 아레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전사 무리가 용트림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로마는 알렉산더가 정복한 땅 대부분을 제 것으로 취한 대제국으로 부상했다.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는 말은 로마가 식민지에 대농장 라티푼디움을 건설해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어떻게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제국수호와 정벌을 동시 진행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귀족 대표와 시민 대표를 두 명씩 뽑고 주고받은 의견으로 나랏일을 결정하는 공화정을 상상할 만큼 합리적이었던 로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장대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면이 피폐해져갔다. 

전쟁은 용병에게 위임한다. 라티푼디움에서 생산한 곡물을 비롯한 생산품들은 로마 시내로 흘러들었고, 위기 시엔 누구의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진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던 용맹하고 독립적인 로마 시민들은 라티푼디움에서 들어온 생산물과의 경쟁에서 처절하게 무너졌다. 수공업자로,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자립농이던 그들이 노예를 부려 값싸게 얻은 생산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방법은 없었다. 비상시국을 대비해 한켠에 소중히 간직하던 방패와 갑옷이, 말이 팔려나갔다. 로마 제국은 귀족과 평민이 합심해 일군 공동체였으나, 소수 기득권층이 다수인 시민을 잊으면서 쇠망해가기 시작했다. 

조토 디본도네 '유다의 입맞춤'.

그리스가 철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인간다움’의 기틀을 세우고 닦았다면, 로마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무기로 기반을 세우고 제국을 다스린 나라였다. 원형경기장인 콜로세움을 짓고 향후 2000년간 건재할 길과 다리를 놓았으며 법을 정비했다. ‘신의 것은 신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라는 기치 아래 신과 인간이 추구해야할 영역을 분리해 생각했던 로마는 그리스 신들을 수용, 이름만 바꿔 ‘위안’을 얻는 혹은 축제의 계기로 삼는 현실주의자들의 나라였다. 식민지 노예를 부려 운영한 대농장이 문제였을까. 지중해를 건너 흘러들어온 넘치는 재물과 끝없이 이어지는 산해진미가 문제였을까. 로마의 정신은 무너졌다. 한때 위대한 로물루스의 후예로 기병을 진두지휘하던 귀족들은, 용병을 사서 변방을 지키게 하는 대신 그들 피에 흐르는 호전성을 콜로세움에서의 잔인한 경기 관람으로 풀었다. 포로로 잡혀 들어와 노예가 된 검투사들의,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 유일신 야훼를 믿기에 로마 다신교를 인정할 수 없었던 식민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잡아와 사자의 먹이가 되는 모습을 보며 환호하고 열광하던 로마인들. “너의 신이 너를 구원하느냐, 어디 보자.”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로마가 제우스교 대신 기독교를 국교로 선택할 수 있었을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천년이 넘는 식민통치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통일된 민족성과 문화를 지켜낼 수 이었던 힘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었다. 이집트로 끌려간 유대인을 데리고 모세에게 출애굽을 감행케 한 이, 십계명을 주어 율법을 지키고 정결한 삶을 살도록 일으킨 이, 인간을 창조하고 천지를 다스릴 권한을 주신 이. 제사장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일구어 살아갔던 유대인들은 오랜 동안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낡은 말구유에서, 목수 요셉과 아내 마리아로부터 한 아기가 태어난다. 

‘수태 고지’를 통해 잉태했다고 알려진 예수는 당시 이스라엘의 소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 치유와 각종 이적을 행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신들린 자를 낫게 하며 물위를 걷는 기적들은 그러나 예수의 삶 전반에서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예수는 배신자이자 배반자였다. 선과 악, 적과 아군, 상과 징벌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하던 고대의 세계. 그리고 식민지인으로 살아온 유대인의 마음속에 마지막 버틸 힘이던 선민의식. ‘오직 유대 백성만이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 젊은 예수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고 말한다. 여자든 남자든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진실로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면 천국이 저희 것임을 말한다. 최초의 세계시민주의이자 사해동포주의의 선언이었다. 유대인에게는 복을, 적에게는 징벌을 내릴 것을 믿었던 유대인에게 예수는 천하의 배덕자였다. 

예수가 동포에게 배척받은 반면, 기독교를 탄압하던 초기 로마는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로마 제국을 다시 묶기 위한 방책으로 유일신 신앙인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실리적인 이유에서다. 오늘 날의 종교는 어떠한가. 예수가 말한 것은 종교가 아닌 영성적 측면에서의 인간다움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종파를 만들지 않았으며 성전을 짓거나 그를 숭배하라고 설득한 적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 또한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하나’라는 말을 영적으로 이해해본다면 어떤 해석이 가능할지 나는 종종 생각한다. 예수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고 로마의 국교로 채택된 후 기독교는 종교 제국이 되었다. 교황과 황제의 알력 다툼, 여덟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슬람과의 오랜 대척. 그리고 기독교를 낳은 모태였던 이스라엘은 세계대전 종전 후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 아래 이스라엘의 옛 땅, 현재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갔다.   

'유다' 아모스 오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유다’는 예수와 유다, 이스라엘과 예수, 현재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등치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유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던 아모스 오즈는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이스라엘 근본주의자들에게 ‘배신자’였다. 1967년 이스라엘 공군이 카이로 공군기지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의 시나이 전투에 참전했던 오즈는 이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는 평화활동가로 활약하는데, 그의 변신은 무참한 살상,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증오와 복수의 도돌이표, 비극적으로 연이어 벌어지는 전쟁이 ‘인간에게 과연 무엇인가.’라는 실천적이며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였다. 

소설 유다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상황이 악화된 슈무엘 아쉬라는 청년이다. 학위를 중단하고 일자리를 찾던 슈무엘은 일흔 살 장애인 남성과 말벗이 되어달라는 구인 공고를 보고 아탈리아의 집을 찾는다. 하반신이 마비된 노인 발드와 그녀의 며느리 아탈리아.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투에 자신의 불구를 속이고 참전해 전사한 아들의 망령. 이스라엘왕족의 후예이자 유대인기구의 이사로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건국을 반대했던 아탈리아의 아버지 아브라바넬. 아랍인과 유대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꿈꾼 아브라바넬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한 야당이었으며 오직 그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야당이었다고 소설은 적고 있다. 그야말로 예수, 혹은 아머스 오즈가 독창적으로 해석한 마지막 기독교인이자 유일한 기독교인 가룟 유다가 아니었을까. 이상주의자 혹은 꿈꾸는 자가 아니라면 우리의 현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 공동번역 성서 마태오 복음 26장 14~16절

성서는 가룟 유다가 은전 서른 닢에 눈멀어 예수를 팔았다고 전하나, ‘유다’는 조금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열두 제자 모두가 가난한 어부거나 천대받던 세리 출신인데 반해 유다는 밭과 과수원, 지위를 가진 식자층이며 제사장들과도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유다는 제사장들의 권유로 예수를 염탐하기 위해 갔다가 예수의 눈에 들어 무리의 회계를 담당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런 그가 노예 한명 값이라던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만큼 어리석었을까. 아니 어쩌면 가장 큰 배신은 가장 큰 믿음과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책을 관통하고 흐르는 메시지로 아모스 오즈가 그리고 있는 유다의 진심이 이런 문장 속에 스며 흐른다.

“내가 그를 죽였어. 난 타협하지 않았어. 나는 그를 내 목숨처럼 사랑했고 나는 그를 완벽하게 믿었지. 그것은 단지 자기보다 훌륭한 동생을 사랑하는 맏형의 사랑이 아니었고, 단지 여린 청년을 향해 품은 나이 지긋한 연륜 있는 남자의 사랑이 아니었으며, 단지 자기보다 위대한 젊은 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사랑도 아니었고, 충성스러운 신도가 기적과 이적을 일으키는 자를 향해 품은 사랑은 더더욱 아니었어. 아니야, 나는 그를 하느님처럼 사랑했어. 그리고 사실 나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보다 그를 더 많이 사랑했어. 그는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었어. 나는 죽음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라고 믿었지. 나는 바로 오늘 예루살렘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어. 그 기적이 일어나면 이후로는 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질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기적 말이야. 이후로는 더는 아무런 기적도 필요 없는. 이후로 하늘나라가 도래하고 사랑만이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그런 기적 말이야.”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예루살렘에 데려가 모두의 앞에서 그가 신임을 증명하려 했으며 단 한 순간도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유다는 십자가 위에 걸려 고통 받고 신음하던 예수의 숨이 멈추자 골고다 언덕을 떠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순간도 예수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부인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있던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하느님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기독교인, 끝까지 예수가 온 예루살렘 앞에서 그리고 온 세계 앞에서 틀림없이 일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리라 믿었던 기독교인, 예수와 함께 죽었고 그가 떠난 이후에 더 살려고 하지 않았던 유일한 기독교인, 예수가 죽었을 때 자기 가슴이 무너져 내렸던 유일한 사람.
- 유다, 현대문학

다빈치 '최후의 만찬'.

그리고 아모스 오즈는 슈무엘의 입을 빌려 말한다

“링컨도 그의 반대자들에게 배신자라고 불린 적이 있어요.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독일 장교들은 배신이라는 죄목으로 총살을 당했고요. 역사 속에는 때때로 자기 시대보다 너무 앞서 태어난 용감한 사람들에게 배신자나 광인이라는 낙인을 찍는 예가 많이 있어요. 변화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어떤 변화도 인정할 수 없고 변화가 생기는 것을 죽을 만큼 무서워하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를 혐오하는 사람들 눈에 배신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어요.”  

우연과 필연,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가 선택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진실은 너무나도 멀리 있고 알기 어려워, 어쩌면 진실이란 사람들 마음속에 낱낱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쉬운 해결책을 내리고 싶어지는 가을, 이스라엘의 배신자였던 예수와 스피노자, 갸롯 유다를 생각한다.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 타협해야만 나타나는가. 순수한 이상은 예수의 동포주의처럼 실패하거나 유다처럼 광기로 흐르는가. 오늘 나의 이상은 무엇인가. 아니, 그마저도 없이 살아지고 있지는 않은가.
박혜진 (문예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