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밀란 쿤데라의 ‘히치하이킹 게임’ & 게임의 종막

게임은 나를 파멸하는 처참한 함정이다 제어할 수 없는 욕망과 게임의 종막

2021-10-13     김시인
게임은 욕망하는 모든 자들의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게임의 함정은 욕망을 움켜쥐려는 손으로 다가온다. 누군가 전해주는 감촉 좋은 카드를 조심해야 한다. 발랄하게 미소 짓는 요염한 엄지척도 경계해야 한다.

목적지를 버리고 일탈하는 한 쌍의 젊은 히치하이크

“제가 오늘 운이 좋은데요. 운전한지 5년 만에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히치하이킹해서 제 차에 탄 적이 없었거든요.”

“여자들한테 거짓말 잘하는 사람같아요.”

“그게 거북하신가요?”

“제가 당신 애인이라면 거북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모르니까 거북하지 않아요.”

“여자들은 늘 자기 애인보다 낯선 남자들을 더 잘 용서해주지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니까 잘 통할 겁니다.”

“몇 분 후면 헤어질 텐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요? 제가 비스트리카에서 내릴 거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제가 당신과 같이 내린다면?”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어떻게 할 건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본인이 바라는 게 현실인 줄 아시나봐요?”

“비스트리카에는 뭐하러 가시나요?”

“어떤 남자와 약속이 있어서 가요?”

“약속 장소에 안 가면 어떻게 되죠?”

“그렇게 되면 당신이 잘못한 것이니 저를 책임지셔야지요?”

“방금 우리 차가 노베잠키로 들어서는 거 못보셨나요?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내가 당신을 책임질 테니까.”

- 밀란 쿤데라, <히치하이킹 게임>

히치하이크는 매우 낭만적인 것이다. 반드시 정해진 목적지로 가는 경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기필코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 경우도 없는 것이어서, 자유롭게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 삼아 해볼 만한 멋진 여행의 하나다. 다른 여행들과는 사뭇 달리 모헙적인 여행이기 때문에 히치하이크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지만 보헤미안적이고 바가본드스러운 사람들에게 ‘서프라이즈’한 일들은 오히려 그들이 여행 중에 겪는 모든 일들에 비하면 ‘스페셜’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히치하이크를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십 대 청춘이다. 남자는 운전을 하고 있고 여자가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모든 히치하이크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남녀가, 그것도 젊은 남녀가 운좋게 만난다면 아름다운 일탈을 꿈꾸지 않을까? 지금 남자는 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더디지도 않게 수작을 부리고 있고, 여자는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게 수작을 받아주고 있다. 여자의 말대로라면 몇 분 뒤에 헤어질 그들이건만 여자를 태운 남자의 차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남자의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여자의 목적지에서 빗나간다. 갑자기 남쪽으로 튄 한 쌍의 남녀는 ‘뜨거운 히치하이킹 게임’을 시작하려는가?

극단의 유희를 향해 치닫는 욕망의 히치하이킹 게임

“이제 당신이 나를 어떻게 책임지는지 봐야겠네요.”

“술을 드시겠습니까?”

“보드카로 주세요.”

“좋아요. 취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자, 건배합시다. 당신을 위하여!”

“좀 더 창의적인 건배사는 없나요?”

“좋아요. 동물의 좋은 특성들과 인간의 결함들을 겸비한 당신네 종을 위해 마시지요.”

“여자를 동물에 비유한 건 썩 재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네요.”

“좋아요. 그러면 당신네 부류가 아니라 당신 영혼을 위해 마시지요.”

“됐어요. 머리에서 배로 내려갈 때 불이 켜지고, 배에서 머리로 올라갈 때 불이 꺼지는 당신 영혼을 위하여!”

“그러죠. 배로 내려가는 내 영혼을 위하여. 아니, 배로 내려가는 당신 영혼을 위하여 건배.”

(… 중략… )

“화장실 다녀오는데 어떤 놈이 나한테 ‘아가씨 얼마야?’ 하고 묻네요.”

“놀랄 것 없어요. 창녀처럼 보이는데 뭘.”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전 그런 거 상관없어요.”

“하룻밤에 여러 남자랑 같이 지내는 거 하나도 거북하지 않죠?”

“당연하지요. 얼굴만 잘생겼으면 상관없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순서대로 하는 게 좋아요, 아니면 한꺼번에 같이 하는 게 더 좋아요?”

“둘 다 좋아요.”

“이만 갈까? 조용히 따라와.”

“무슨 말투가 그래요?”

“창녀에게 하는 말투지.”

- 밀란 쿤데라, <히치하이킹 게임>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제 갈 길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일탈한 남녀는 히치하이크로 만난 낯선 사이가 아니라 이 여행을 함께 시작한 연인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지금 오래도록 ‘히치하이크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어느 한적한 주유소에서 남자가 주유를 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여행의 첫날에 설레어 도로의 갓길을 따라 발랄하게 걸었고, 주유를 마친 남자가 차를 몰아 도로를 걷는 그녀 옆에 다가오자 여자는 히치하이크를 하는 사람처럼 손을 들어 차를 세웠으며, 어쩌면 지루할지도 모를 여행에서 그들 남녀는 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놓고 누가 먼저였는지도 모른 채 ‘히치하이킹 게임’을 시작했던 것이다.

여행의 맛을 한층 글어올릴 수 있는 게임은 당연히 즐거워야 할 텐데 어째 이 남녀의 대화는 갈수록 어색해지더니 서서히 긴장감마저 돌기 시작한다. 일상은 항상 반복되는 것이기에 익숙하긴 하지만 늘 지루하다. 여행은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탈출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은 해방감을 느끼게 되고 그 해방감은 평상을 벗어나 낯선 언어와 낯선 행동을 하도록 부추긴다. 남자와 여자가 벌이고 있는 히치하이킹 게임은 일상의 탈출과 낯선 해방감이 부른 그들만의 유희다. 유희로서의 히치하이킹 게임은 가슴 설레는 쾌감을 부른다.

여자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남자의 찬사에 행복감을 느끼고 그 행복감을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해 속도를 조절한다. 남자의 과도한 칭찬을 살짝 튕기는 여자의 발랄함은 쾌감의 조절이기도 하지만 히치하이크 여자를 대하는 애인의 친절에 대한 질투이기도 하다. 남자는 애인의 색다른 말투와 반응에 신선한 자극을 받고 그 자극을 즐기기 위해 히치하이크 역할에 몰두한다. 여자의 도발적인 행동에 반응하는 남자의 몰입은 유희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히치하이크 남자를 대하는 애인의 애교를 향한 질투이기도 하다.

게임이란 승부를 전제로 하는 일이기에 게임에 임하는 참가자들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몰입하게 된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늘 경쟁하며 생존해온 동물이다. 인간은 룰이 없는 싸움에서도 피터지게 겨루었지만 룰을 정한 싸움에서도 박터지게 겨루었다. 아무리 단순한 게임이라 해도 승부가 있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은 생명체처럼 팔딱거리게 된다. 인간의 역사를 관찰하다 보면 서시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에서나 미시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게임에서나 유희로부터 출발하여 살육으로 끝나는 게임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여자의 질투는 남자의 질투를 부르고 남자의 질투는 다시 여자의 질투를 불러,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그들의 히치하이킹 게임은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어가고 있다.

돈과 목숨을 놓고 벌이는 욕망의 오징어 게임

“모두 당신이 한 짓입니까?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돈을 얼마나 쉽게 벌기에 이런 짓을 한 거야? 기분이 좋던가?”

“나는 돈을 굴리는 사람이야. 자네도 돈을 벌어봐서 알지만 그게 쉽던가? 그 돈은 자네의 운과 노력의 댓가야. 자네는 그 돈을 쓸 권리가 있어.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뭐를 사고 먹고 마셔도 결국 다 시시해져버려. 내 고객들이 하나둘씩 나에게 그러는 거야. 살면서 더 이상 즐거운 것이 없다고. 그래서 고민을 해봤지. 뭘 하면 좀 재미가 있을까 하고 말이야. 나는 아무에게도 게임을 강요한 적이 없어. 자네도 제 발로 돌아오지 않았나? 어릴 때는 친구들이랑 뭘 하고 놀아도 재미가 있었어.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느끼고 싶었어. 자네를 왜 살려주었냐고 ? 재밌었거든. 자네랑 같이 노는 게 말이야. 자네 덕에 기억도 나지 않던 오래 전 일들이 떠올랐어. 그렇게 재밌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 드라마 <오징어 게임> 중에서

게임은 젊은이들만 즐기는 전유물이 아니다. 인간은 유희를 즐기며 살아가야 하는 호모 루덴스(homo rudens)라 했던가? 늙어버린 사람에게도 유희는 필요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삶의 낙을 잃어가는 나이일수록 유희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드라마 속 ‘오징어 게임’을 기획한 늙은 억만장자(億萬長者)는 자기처럼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유희를 즐기기로 한다. 그의 경륜이 내린 결론은, 삶의 재미를 누리지 못하는 인간은 돈이 너무 없는 사람들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늙은 갑부는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을 그가 정한 룰에 따라 게임을 만들고 참가자들을 비밀리에 모집한다.

유희와 이득을 두고 벌이는 게임은 위험하다. 게임은 소중한 것들을 파멸시키는 악마가 될 수도 있다. 456억 원을 손에 쥔 승자를 배출하는 오징어 게임을 위해 455명의 목숨을 바쳤다. 매우 비싼 값이다. -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돈으로 인해 재미를 잃은 사람들이다. 돈이 너무 많은 사람들은 넘쳐나는 돈을 상금으로 걸고 피가 튀고 살을 찢는 게임을 감상하는 관객이 되고, 돈이 너무 없는 사람들은 세파에 시달린 육신을 담보로 삼아 뼈가 부러지고 골이 빠개지는 게임을 뛰는 말(馬)이 된다. 오징어 게임은 1등을 하면 수백억 원을 벌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행운의 게임이기도 하지만, 한 번이라도 탈락하면 총살을 달하는 종말의 게임이기도 하다. 돈을 놓고 말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목숨을 걸고 말이 된 사람들이나 학대(虐待)의 유희라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사디스트요 마조히스트다.

게임은 모두를 잡아먹는 처참한 함정이다

게임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여자는 그것이 바로 게임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이든 다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고분고분 그 게임을 해야 하리하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성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멍해진 영혼에다 대고 거리를 둬야 한다고 게임을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도전적인 태도로 당돌하게 관능적인 눈빛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이런 선정적인 표정 뒤에서 자신이 다정하게 사랑하는 친근한 모습을 찾아보려 애썼다. 마치 하나의 대상에서 두 이미지를, 투명하게 서로 비치며 나타나는 중첩된 두 이미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중첩된 그 두 이미지는 그의 여자 친구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고 그의 영혼에 끔찍할 만큼 한계가 없으며 그 영혼에는 충실함과 부정이, 배신과 결백이, 요염한 애교와 수줍은 부끄러움이 같이 자리잡을 수 있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야만스러운 뒤섞임은 그에게 뒤죽박죽 쓰레기 더미만큼 역겨웠다. 청년은 자기 여자 친구와 다른 여자들 간의 차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라는 사람을 한정짓는 윤곽에 대한 인상이, 단지 상대가 바라보는 사람이, 그러니까 자기가 빠져버린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가 사랑했던 그녀는 단지 그의 욕망이, 그의 추상적인 생각이, 그의 믿음이 만들어낸 것일 뿐 실제의 그녀는 절망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절망적으로 낯설게, 절망적으로 여러 모습으로 그의 앞에 거기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혐오했다.

- 밀란 쿤데라, <히치하이킹 게임>

게임은 함정이며 게임을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게임을 하는 자들은 유희와 이득을 원한다. 유희와 이득은 희소성을 가질수록 그 가치가 빛나기에 쉽사리 얻을 수 없어야 하고, 필연적으로 승부를 보아야 하는 게임은 룰을 통해 참가자들의 자유를 축소한다. 유희와 이득을 꿈꾸는 사람들의 함정이 여기에 존재한다. 극단의 이득을 얻는 ‘오징어 게임’에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극단의 유희를 즐기는 ‘히치하이킹 게임’에서는 정체성을 유보해야 한다. 유희와 이득이 짜릿할수록 게임의 룰은 교묘하고 게임의 함정은 악랄하다.

456억 원을 손에 쥔 승자를 배출하는 오징어 게임을 위해 455명의 목숨을 바쳤다. 매우 비싼 값이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욕망을 배설하는 히치하이킹 게임을 위해 사랑과 연인을 바쳤다. 아주 독한 값이다. 유희와 이득을 두고 벌이는 게임은 위험하다. 게임은 소중한 모든 것들을 빼앗고 파멸시키는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게임은 욕망하는 모든 자들의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게임의 함정은 욕망을 움켜쥐려는 손으로 온다. 누군가 전해주는 감촉 좋은 카드를 조심하라. 발랄하게 미소 짓는 요염한 엄지척을 경계하라. 손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거나 눈 안에 든 손에 비비적대면 때는 이미 늦었다.

김시인 (소피움 인문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