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오에 겐자부로의 ‘인간 양(羊)’ & 지식인의 사명

사라진 늑대를 향해 거룩한 침을 뱉어라 폭력이 떠난 뒤에야 시작되는 정의와 지식인

2021-10-20     김시인
개인의 특출한 지적 능력도 있지만 공공의 자산에 힘입어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발판으로 삼아 돈과 명예를 얻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회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때로 그 책무로 인해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건 지식인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오에 겐자부로의 ‘인간 양(羊)’ & 지식인의 사명

늑대가 날뛰던 자리에 울리는 양들의 침묵

   외국 군인은 억센 팔로 내 벨트를 풀더니 바지와 속옷을 거칠게 벗겨버렸다. 외국 군인들은 내 등을 구부러뜨려 네발짐승처럼 엎드리게 했다. 나는 벌거벗은 엉덩이를 그들에게 드러낸 채 몸부림을 쳤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 성기(性器)가 추위로 오그라들었다.
   외국 군인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는 소란 뒤에서 킥킥거리는 일본인 승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코 양쪽으로는 끈적끈적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박자를 맞추기 위해 추위로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한 내 엉덩이를 찰싹찰싹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양치기, 양치기, 빵, 빵… 양치기, 양치기, 빵, 빵…”
   칼을 든 외국 군인이 버스 앞쪽으로 가서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목덜미를 붙들려 버스 앞쪽으로 돌려 세워졌을 때 버스 중앙 통로에는 양쪽 무릎을 벌리고 엉덩이를 홀딱 깐 인간 양(羊)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 줄의 맨 끝 양(羊)이 되었다.
   “양치기, 양치기, 빵, 빵... 양치기, 양치기, 빵, 빵...”
오에 겐자부로 <인간 양(羊)>

이런 무도한 자들을 보았나?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하는 자들의 정체는 누구인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일본 본토에 진주한 외국 군인들의 국적이야 작가의 언급이 없다고 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식민지든 제3세계든 타국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이같이 흉포한 짓을 저지른 국가는 한두 나라가 아니었다. 성적 모욕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폭력은 이전의 역사에서도 벌어져 왔다.

안개가 자욱하고 몹시 추운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일단의 군인들이 버스 안에서 일본인 작부를 껴안고 희롱한다. 돈을 주고 산 듯한 내국인 작부를 놓고 버스 안에서 버젓이 추행을 일삼지만 어느 누구도 이에 항의하거나 제지하지 못한다.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젊은 남학생 하나가 그들 옆자리에 앉았다가 얽혀들어 참을 수 없는 봉변을 당한다. 

신이 난 군인들은 버스에 탄 다른 남자들도 줄지어 세우고 하의를 완전히 벗겨 성기를 드러내게 한 채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봉변에서 운 좋게 벗어난 나머지 승객들은 행여 자신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돌리고 이 참담한 불상사를 외면한다. 버스 안의 승객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로 구분되었다.

늑대가 떠나간 뒤에야 들리는 양들의 포효

   “이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닙니다. 사람을 짐승 취급하다니 미친놈들 아닙니까?”
   “이 버스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까?”
   “처음 있는 일은 아닌가 봐요. 하는 짓이 한두 번 해본 것 같지 않던데요.”
   “여자 엉덩이를 벗겼다면 또 몰라. 도대체 남자 바지를 벗겨서 어쩌겠다는 거야?”
   “이런 걸 그냥 못 본 척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놔두면 우쭐해서 버릇이 된다고요.”
   “경찰에 신고를 해야 돼요. 피해자가 단결해서 여론을 움직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경찰에 신고합시다. 내가 증언하겠소.”
   “나도 증인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도 응원할 겁니다.”
   “수치를 당한 피해자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 오에 겐자부로 <인간 양(羊)>

이런 의로운 사람들을 보았나? 무도한 자들이 내리고 난 다음 남은 사람들이 드디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난다.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는 일은 괴롭다. 괴로운 일을 그냥 견디지만 말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당국에 호소하자는 주장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랴. 버스 안을 난무하는 이 열렬한 주장들의 주인은 모조리 방관자들의 것이었으니.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귀를 틀어막았던 사람들이 열변을 토한다.

만약 모르는 누군가가 밖에서 버스 안을 바라본다면, 죄를 지은 일단의 남자들이 버스 뒤쪽에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처박고 있고 의기양양한 일단의 남자들이 이들을 향해 핏대를 세우고 손가락질을 하며 영락없이 호된 꾸지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방관자였던 그들은 길길이 날뛰고 있는데 피해자였던 이들은 왜 길길이 날뛰지 못하고 있는가? 

가해자들의 난동이 끝난 뒤에 시작된 방관자들의 난동은 교사로 보이는 선생이 주도한다. 얼굴을 찌푸리며 군인들의 난동을 지켜보고만 있던 선생은 그들이 버스를 떠나자 버스 뒤쪽에 있던 상처받은 양들에게로 와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나머지 방관자들도 이에 질세라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처럼 선생의 뒤를 쫓아와서는 슬픈 양들을 서로 구하겠노라고 부르짖는다.

이만하면 상처받은 양들도 이제 침묵을 깨고 포효하는 양들의 품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인 일인지 슬픈 양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다. 고개를 숙인 양들의 슬픈 눈은 점점 충혈되어 노기를 띠기 시작하고, 급기야 어떤 양은 자기들 품으로 오지 않는다고 힐난하는 구세주 선생의 턱주가리를 받아버리기까지 한다. 구원의 손길을 마다한 양들은 유유히 떠난 폭도들과는 다르게 탈출하듯 버스에서 쓸쓸히 떠난다.

사라진 늑대를 향해 거룩한 침을 뱉어라

   “이봐,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선생은 비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남자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떨며 무기력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학생은 그 일을 그냥 참고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네만큼은 참지 않고 싸울 거지? 자네의 투쟁에는 나도 협조하겠어. 증언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겠어.”
   나는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쯤은 위로였고 반쯤은 강요였다. 그의 뜻을 거절하는 의미로 그냥 돌아서는데 그의 팔이 내 겨드랑이 속으로 파고들었다.
   “경찰에 가서 신고하자고. 빨리 할수록 좋아. 바로 저기 파출소가 있잖아.”
(... 중략...)
   “버스 안에서 술에 취한 외국 군인들이 이 학생과 다른 사람들의 바지를 벗겼다구요. 그리고 벌거벗은 엉덩이를...”
   “벌거벗은 엉덩이를? 상처라도 입었나요?”
   “아니요. 손으로 철썩철썩 때렸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벌거벗은 엉덩이를 철썩철썩 두드린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죽지는 않지요. 하지만 혼잡한 버스 안에서 엉덩이를 까고 개처럼 엎드리게 했단 말입니다.”
- 오에 겐자부로 <인간 양(羊)>

이런 열정적인 선생을 보았나? 버스 안에서 군인들을 신고하자고 열변을 토하다 한 피해자로부터 턱을 얻어맞은 선생은 최초의 피해자인 학생을 따라 내려 실행에 옮기지 못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선생으로부터 표출되는 활화산같은 열정, 그 열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열정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슬픈 양들을 훈계하고, 결코 길을 잃지 않은 어린 양의 길을 찾아주겠다며 그의 목을 옭아매는가?

어린 양의 수치는 다시 시작된다. 군인들이 선물한 멸과 수치는 파출소 안에서 다시금 재현된다. 피해 당사자는 버스 안에서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고 방관자였던 선생과 경찰만이 이 대화의 주인이 되었다. 늑대로부터 풀려난 어린 양은 결국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전후사정을 몰라 당황하던 경찰도 차츰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하지만 그것이 학생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경찰들은 버스 안의 방관자들과 흡사했다. 그들도 입을 가리고 킬킬거리고 낄낄거린다. 온몸이 늑대의 탐욕스러운 침으로 발라져 처참한 몰골이 된 어린 양을 앞에 두고 양을 보호해야 할 양치기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웃는 격이었다. 가까스로 버스를 탈출한 학생은 이제 경찰서를 탈출해야 한다. 그를 붙잡고 늘어지는 열정의 선생과 열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는 경찰로부터 벗어나 따뜻한 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회는 혼자만의 쾌락을 위해 쓰라고 막대한 자산을 지식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폭력의 위험이 사라진 안전한 공간에서 뒤늦게 자유를 부르짖는 지식인의 행위는 그냥 '자위행위'다. - 살바도르 달리, 'Great masturbator 위대한 자위행위자'.

어린 양을 뒤쫓는 정의롭고 정열적인 스토커

   “그냥 참고 넘어갈 셈인가?”
   선생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댔다. 나는 잠자코 차가운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졸렸다.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왜 파출소에서 잠자코 있었나? 그 외국 군인들을 고발발해야지 입 다물면 그대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가?”
   나는 선생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쫓아오는 선생은 무시하기로 결심하고 쉬지 않고 걸었다. 보도 양편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불도 꺼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기 수치를 감추려는 속셈이라면 자네는 비겁한 거야. 그런 태도는 외국 군인들에게 완전히 굴복하는 거야.”
   나는 골목기로 뛰어들었는데 선생도 급히 골목길로 뛰어왔다. 그는 우리 집까지 쳐들어와 내 이름을 알아낼 심산인지도 몰랐다.
   “자네 이름과 주소만 가르쳐주게. 앞으로의 투쟁방침에 대해서 연락하겠네. 이봐, 이름만이라도 가르쳐달라니까. 우리는 그 일을 어둠 속에 묻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분노와 초조함에 휩싸였다. 몹시 추웠고 아랫배가 딱딱하게 뭉쳐서 너무 괴로웠다.
- 오에 겐자부로 <인간 양(羊)>

이런 끈질긴 스토커를 보았나? 이쯤 되면 이 선생은 스토커다. 스토커는 따로 있지 않다. 상대의 기분과 처지와 생각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기만의 잣대와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일을 저지르는 것이 스토킹의 본질이다. 스토킹은 명백히 범죄이고 질병이다. 스토커는 자기가 스토커임을 부정한다. 사명감으로 무장한 이 거룩한 선생은 그의 거룩한 분노와 정의에 동참하여 학생도 자기를 따라 거룩한 침을 뱉도록 강요하고 있다.

선생의 사명감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늑대들의 만행이 절정에 이를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명감이 왜 그들이 떠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나? 가공할 폭력 앞에서 그의 사명감이 발휘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없던 것이라 뒤늦게 사명감을 발굴한 것인지 알 길은 없으나 선생은 폭력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사명감으로 분칠하고 정의를 외치고 있다.

폭력이 떠난 자리에 꽃피는 분노와 정의(正義)

   나는 오한이 들었다. 종아리는 단단히 뭉치고 구두 속의 발은 퉁퉁 부어 너무 아팠다. 그러나 벙어리처럼 말을 잃어버리고 그저 녹초가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걷고 있는 선생에게 한없이 절망적인 분노를 느낄 뿐이었다.
   나는 이불에 몸을 던지고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은 열망에 시달렸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갑자기 선생을 냅다 밀쳐버린 다음 어둡고 좁은 골목으로 달려 들어갔다. 옆구리가 당기며 아팠지만 손으로 움켜쥐며 달렸다. 그러나 억센 팔에 다시 어깨를 붙잡히고 말았다.
   오늘 밤은 내내 이 남자에게 쫓겨 추운 거리를 헤매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최후의 힘을 짜내서 선생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선생은 다부지고 커다란 몸을 내 쪽으로 숙이며 나의 도주 의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을 노려본 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왜 이름을 숨기는 거야? 나는 기어코 네 이름을 밝혀내고 말겠어. 군인들은 물론이고 너한테도 수치를 안겨주겠어. 네 이름을 알아낼 때까지 절대 네 놈을 놓아주지 않을 거다.”
- 오에 겐자부로 <인간 양(羊)>

이런 끔찍한 귀신을 보았나? 이쯤 되면 이 작자는 귀신이다. 버스 안에서 외국 군인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보면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던 비겁한 지식인으로서의 선생은 거기서 죽은 거나 같다. 죽은 지식인은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 듯 한을 풀고 있는 것이다. 

이 작자는 또한 늑대다. 군인들만이 그들에게 모멸과 수치를 주었나? 군인들이 떠난 뒤에 방관자들은 피해자들과 자신들을 철저하게 분리시킨 채 그저 동정심으로 그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던가? 기실 그 위로라는 것도 피해자들을 향했다기보다는 비겁했던 자기들의 죄를 보듬으려 한 것이 아니던가? 그들은 모두 사라진 늑대를 대신하는 또 다른 늑대들이 된 것이었다.

기필코 어린 양의 이름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선생의 고집은 그대로 광기(狂氣)다. 어쩌면 가장 큰 상처는 선생이 받았을지도 모른다. 지식인의 방관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난받을 일인지는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면 모를 수는 없다. 

학생의 수치를 갚아주겠노라고 외치는 선생은 그 일을 통해 방관했던 자신의 수치를 안전하게 갚겠다는 무의식을 드러내고 말았다. 1945년 8월 16일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약삭빠른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과 무엇이 다른가?

개인의 특출한 지적 능력도 있지만 공공의 자산에 힘입어 지식을 쌓고 그 지식을 발판으로 삼아 돈과 명예를 얻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사회로 돌려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때로 그 책무로 인해 위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건 지식인이 감당해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폭력의 위험이 사라진 안전한 공간에서 뒤늦게 자유를 부르짖는 지식인의 행위는 그냥 ‘자위행위’다. 혼자만의 쾌락을 위해 쓰시라고 사회는 막대한 자산을 그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어린 양을 보호할 마음이 없다면 머리로 먹은 아까운 밥은 모조리 반납해야 한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