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 프란츠 카프카의 ‘낡은 문서’

지도자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의 슬픈 초상 정치 마조히즘 - 정치혐오는 치료의 대상

2021-11-10     김시인
국가의 위난을 예감하고 수호하는 일은 국민들의 몫이다. 조국을 수호하는 일은 국민에게 맡겨져 있다. 도망치거나 숨지 않는 지도자를 뽑는 일도 우리 국민들에게 손에 달려 있다. 결국 국가를 지키는 무한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 살바도르 달리 ‘내란의 예감’.jpg 

국가의 위기, 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조국을 방어하는 데 상당히 소홀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조국 방어에 신경 쓰지 않고 생업에만 몰두했다. 최근 여러 사건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나는 황궁 앞 광장에 구두수선 가게를 갖고 있다. 동틀 무렵 가게 문을 열자마자 나는 이쪽으로 연결되는 모든 골목의 입구가 무기를 소지한 자들에 의해 이미 점령당한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병사가 아니라 북쪽에서 온 유목민이 분명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그들은 국경에서 상당히 떨어진 이 수도까지 밀고 들어왔다. 어쨌든 그들은 여기 와 있고, 매일 아침 그 수가 불어나는 것 같다.
- 프란츠 카프카, <낡은 문서>

우리는 조국을 방어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고 열심일까?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이 충만할까?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이건 국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건 국가는 개인을 존재시키는 기본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기를 존재시키는 국가를 존재하도록 만드는 일은 사랑의 유무를 떠나 열심과 충만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 두고 민족주의니 국가주의니 하는 시비는 합당하지 않는 주장이요 논리다. 마르크시즘 내지는 코뮤니즘은 이제 그 가치와 윤리만을 남김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기에 이를 새삼 거론할 까닭은 없겠다.

카프카의 ‘낡은 문서’ 속 국가가 침략을 당했다. 조국을 방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던 생업에 열심이었는데, 국경이 무너지고 외적이 생업의 현장까지 진입한 것이다. 누란지경의 책임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 문제를 떠나 당장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냐가 관건일 터, 국가와 함께 존재하는 개인은 당장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모든 적들은 다 더럽고 모든 적들은 다 무지하다

   그들은 천성대로 노천에서 야영을 한다. 집 안에 묵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칼날을 벼리고, 화살촉을 뾰족하게 갈고, 말을 훈련시키는 데 전념한다.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깨끗이 유지되던 이 조용한 광장을 그들은 완전히 마구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는 가끔 가게 밖으로 나가 가장 더러운 배설물만이라도 치워보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소용없을 뿐 아니라, 사나운 말에 깔리거나 채찍에 상처를 입는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마저도 점점 안하게 된다.
   유목민들과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도 갖고 있지 않다. 서로 까마귀처럼 의사소통을 한다. 이런 까마귀들의 외침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려온다. 그들은 우리의 생활방식, 우리의 제도를 이해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때문에 어떤 신호언어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인다. 당신의 턱이 빠지고 손목이 비틀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어차피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프란츠 카프카, <낡은 문서>

모든 적들은 더럽다. 모든 적들이 다 더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근대의 위생학으로 설명하려는 소아병은 버리기 바란다. 적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다. 유럽 놈들이 아메리카에 매독을 퍼뜨렸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아니다. 십자군이 몸을 씻지 않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아니다. 칭기즈칸의 몽골이 말젖 냄새를 풍겼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아니다. 적이 나의 재산을 훔치고, 내 가족의 생명을 빼앗고 우리 고을을 부수었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다. 그들이 나와 다른 음식을 먹고, 나와 다른 옷을 입고, 나와 다른 잠자리를 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내 음식을 경멸하고, 내 옷을 손가락질하고, 내 잠자리를 조롱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다. 적은 이방인이다. 이방인이 호의를 가지고 내게 다가오면 친구가 되지만 흉심을 품고 달려들면 원수가 된다. 나를 괴롭히는 모든 원수는 적이며 모든 적은 더럽다.

모든 적들은 무지하다. 모든 적들이 다 무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문명의 특수성으로 설명하려는 진부함은 치우기 바란다. 적은 내가 세 명의 아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지하다. 적은 우리가 밥을 왼손으로는 절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지하다. 적은 내 나라의 지도자가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지하다. 무지는 모르는 상태를 넘어 모르려고 발버둥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그러므로 적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족속들인 것이다. 나를 알려고 하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생각을 가졌다면 애초에 그들은 내게 적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굴종하는 사람들이 창조하는 천국

   그들은 종종 인상을 쓴다. 그러면 눈의 흰자위가 돌아가고 입에서는 거품이 솟는다. 뭔가를 말하려 한다거나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게 그냥 그들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취한다. 그들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이 손대기 전에 사람들은 비켜서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니 말이다.
   그들은 내가 가진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을 많이 가져갔다. 그렇지만 한 예로 길 건너 푸줏간 주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면 내가 당한 일을 불평할 수 없다. 그가 물건들을 들여오기 무섭게 유목민들은 모두 다 빼앗아서 꿀꺽 삼켜버린다. 유목민들의 말들도 고기를 먹어치운다. 종종 어떤 기마병은 자기 말 옆에 누워서 말과 함께 같은 고깃조각을, 각자 서로 다른 쪽 끝을 뜯어먹는다. 푸줏간 주인은 겁에 질려 감히 고기 공급을 중단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러는 것을 이해하고, 다 같이 돈을 거둬 그를 도와준다. 유목민들이 고기를 얻지 못할 경우 무슨 일을 저지르려 할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설령 그들이 매일 고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어떤 생각을 할지 그 또한 누가 알겠는가.
   마침내 푸줏간 주인은 적어도 도축하는 수고는 덜어보자는 심산으로 아침에 살아있는 황소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가 이런 일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오로지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족히 한 시간은 내 작업장의 가장 후미진 구석 바닥에 누워 내 옷 전부와 이불 그리고 방석들을 몸 위로 쌓아올렸다.
   유목민들은 이빨로 황소의 따뜻한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황소를 향해 덤벼들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는 밖으로 나가볼 엄두가 났다. 포도주통 주변의 술꾼들처럼 그들은 뜯어먹고 남은 황소 주위에 피곤에 지쳐 널브러져 있었다.
- 프란츠 카프카, <낡은 문서>

모든 적들은 폭력이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죽이고 무언가를 훔치고 어딘가를 부수는 일에는 반드시 폭력이 수반된다. 그러므로 적을 맞이한다는 것은 폭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을 맞이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 폭력에 맞서거나 폭력에 굴복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적을 맞이했던 모든 국가의 구성원들은 저항과 굴종을 통해 때로는 처참한 지경으로 내몰리기도 했고 때로는 빛나는 영광을 쟁취하기도 했다.

때로 어떤 국가의 개인들은 그들의 적이 인상을 쓰기도 전에 풀처럼 눕기도 한다. 그들은 ‘적들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적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케네디 식 어법을 케네디가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미리 알아차리고 적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적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거나, 적들이 물러가는 날까지 만이라도 나만 안전하게 버티고 있어야만 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거나 둘 중 하나다.

눈에 흰자위가 돌아가고 거품을 무는 자들은 적들이 아니어도 무섭다. 하물며 적임에랴. 그들이 보이는 험악한 인상이 폭력을 행사하려는 와중에 나오는 낯색이 아니어도 두려워 벌벌 떠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산들바람에도 빛의 속도로 눕고 부드러운 소리에도 아기의 살결처럼 말랑거린다. 오로지 생존에만 목숨을 거는 그들에게는 이제 수치는 개나 주고 치욕은 돼지나 주라는 새로운 신념을 획득하게 된다.

굴종하는 자들이 획득하는 것은 또 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변명과 합리화를 자신을 지키는 갑옷으로 여기고 날렵하게 무장한다. 이웃 푸줏간이 나보다 더 악랄하게 당한 사실은 그를 위로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저항하지 않아도 되는 구실로 작용한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이 내 안위를 보장하는 논리가 되고 가훈이 된다. 영리한 그들은 이 달콤한 합리화와 자기 안전을 지속시키기 위해 약간의 경제적 지출을 기꺼이 수용한다. 약탈당하는 이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다는 아름다운 연대를 실천에 옮긴다.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약탈당한 이웃에게 적절한 보상을 함으로써 일거양득을 취한다.

한시도 이웃의 고난과 슬픔을 등지지 않았다는 자부심, 견디다 못한 이웃이 돌연 저항을 함으로써 평화롭던 자기들에게까지 피해가 올 수 있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안전판이 그것이다. 비겁한 자들은 겁이 나서 ‘오로지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틀어막고, 또한 그 비겁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후미진 구석 바닥에 누워 옷 전부와 이불 그리고 방석들을 몸 위로’ 쌓고 눈을 감는다. 천국이 따로 없다.

왕이라 부를 수 없는 자들의 슬픈 초상

   바로 그때 나는 궁전의 창문에서 황제를 본 것 같다. 황제는 평소에 절대로 이 바깥쪽 방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가장 안쪽의 정원에만 머무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제가 창가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성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 프란츠 카프카, <낡은 문서>

어떤 국가든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는 있다. 왕국에는 왕이 있고, 제국에는 황제가 있고, 또 민국에는 그에 걸맞은 지도자가 있다. 국가의 지도자가 얼마나 큰 권력을 쥐고 있든, 그의 통솔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자는 무한의 책임을 지고 국가의 안위를 지켜야 한다. 그것은 지도자의 덕목을 넘어 목숨을 거는 일이기도 하다.

국가를 대표했던 모든 지도자들이 국가를 바로 지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외적이 쳐들어올라치면 제 가족부터 챙겨서 섬으로 숨어버리는 왕들도 많았고, 쳐들어오는 기미만 보여도 국경으로 달려가서 원하는 바가 뭔지 헤아리고 챙겨주는 왕들도 많았다. 어떤 왕은 남쪽의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북쪽으로 튀면서 배를 불태웠고, 어떤 왕은 북쪽의  괴뢰가 쳐들어온다고 남쪽으로 튀면서 다리를 끊었다. 이 모든 왕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동북아시아의 어느 반도 국가에 있었다.

부지런한 왕들은 열심히 도망쳤고 게으른 왕들은 느릿느릿 숨었다. 게으른 왕들은 구중궁궐에 숨어서 나라 살림이 폭삭 망해가도 제 배를 채웠고, 국민 안전이 위태로워도 제 몸만 매만졌다. 그들은 자라 모가지가 껍데기 속에 처박히듯, 낙지가 뻘밭으로 기어들 듯 제 몸 감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자들을 한 나라의 지도자라고 어이 말할 수 있으랴.

정치 마조히즘-장치혐오증은 치료의 대상

   이제 어떻게 될까? 우리 모두는 자문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부담과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가? 황제의 궁궐이 유목민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들을 다시 몰아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성문은 닫힌 채로 있고, 예전에는 항상 성대하게 들고 나던 보초병들은 창살이 씌워진 창문 뒤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조국을 주하는 일이 우리 수공업자나 상인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 또한 그럴 능력이 있다고 자랑한 적도 없다. 그건 오해이다. 그 오해 때문에 우리는 몰락한다.
- 프란츠 카프카, <낡은 문서>

지도자는 도망치거나 숨기에 바쁘고 국민들은 무서워 떨면서 굴종하는 나라의 미래는 어떨까? 국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든 국가와 사랑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든 이제 자문해야 한다. 혹여 올지 모르는 국가의 위난과 그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을 때, 적들의 입맛을 걱정하며 서로서로 십시일반 알뜰하게 장만해서 몸소 수레에 싣고 그들의 아가리로 기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적들의 그림자만 나타나도 내빼거나 숨어버리는 지도자를 멀거니 쳐다보며 멍청하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국을 수호하는 일은 국민에게 맡겨져 있다. 도망치거나 숨지 않는 지도자를 뽑는 일도 마찬가지다. 결국 국가를 지키는 무한 책임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다. 그 무거운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면 그런 책임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도망치거나 그냥 밥숟갈을 놓으면 된다.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정치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며 냉소적인 태도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재수 없는 인간들은 곁에 둘 종자들이 아니다. 국가를 이끌 적임자를 골라낼 책임을 진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방기한다면, 당장 거리로 나가서 말똥 위에서 굴러도 보고 짐승의 가죽을 이빨로 물어뜯는 연습을 해두기 바란다.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정치의 기본 문법 첫째는 ‘내편찾기’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정치는 시작된다. 우리는 자주 남의 편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불쌍하다며 그들에게 돈도 집어주고, 멋지다고 열렬히 박수까지 치는 대인들을 본다. 그건 다른 것이 아니고 그냥 마조히즘이다. 치료받아야 한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