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식 사랑탐구

[조대영의 영화읽기]‘위험한 관계’

2022-02-11     조대영

소설 ‘위험한 관계’는 10여 명의 파리 사교계 사람들 사이에 오고간 175통의 편지를 엮어서 만든 18세기 후반의 서간 소설이다. 이 작품은 귀족사회에 대한 치밀한 접근과 생생한 심리묘사가 압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읽히고 있는 고전인데,(국내에도 세 곳의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있다.) ‘사랑’을 가지고 내기를 한다는 내용 때문인지, 영화로도 자주 만들어지며 관객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스티븐 프리어즈가 프랑스혁명 전이 배경인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고, 로저 컴블이 뉴욕의 맨하탄에 주인공들을 세웠으며, 이재용은 남녀(男女) 간(間)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조선시대를 택했던 것이다.

허진호는 1930년대의 상하이로 장소를 옮겨 원작을 변주해 낸다. ‘위험한 관계’는 허진호 감독의 변화된 영화스타일과 변함없는 주제의식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영화다.

먼저 감독의 변모에 대해서, 정적이고 관조적인 영화를 추구하며 긴 호흡으로 일관했던 전작들에 비해, ‘위험한 관계’는 엄청난 컷트 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전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다 인물들에게 거리를 두었던 카메라는 ‘클로즈업의 잔치’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배우들의 얼굴을 화면가득 담아내며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것 말고도 영화가 친절해 졌다는 느낌을 주고 있는 것 역시 변화라면 변화다.

영화의 처음부터 셰이판(장동건)이 플레이보이라는 설정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렇거니와, 모지에위(장백지)가 셰이판으로 하여금 정숙한 미망인인 뚜펀위(장쯔이)의 마음을 훔쳐낸다면, 자신의 몸을 허락한다는 조건으로 내기를 하는 내용 등을 빠른 속도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계속되는 이야기에서도 허진호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스타일을 견지한다.

셰이판은 뚜펀위를 유혹하기 위해 쉼 없이 수작을 걸고, 그의 여성 편력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뚜펀위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 허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듯이 뚜펀위의 마음도 기울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허진호 감독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1차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일정정도의 성과를 거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허진호 감독이 목적달성을 이룬 후에 본인이 하고 싶은 주제의식을 포개어 놓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허진호식 사랑의 탐구이다.

셰이판의 뚜펀위에 대한 기만으로서의 사랑의 갈구는 결국 두 사람이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셰이판은 자신의 마음이 뚜펀위에게 기울어지는 줄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고, 뚜펀위는 셰이판의 애정공세에 끝내는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게임으로서의 사랑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셰이판과 모지에위의 관계다. 셰이판은 모지에위에게 뚜펀위를 쟁취했으니 자신의 마음을 받아달라고 한다. 모지에위는 이를 거절하는데, 이는 셰이판의 마음이 뚜펀위에게 기울었음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한데 사랑을 내기의 수단으로 삼았던 모지에위가, 셰이판이 자신에게 쏟았던 구애의 진정성을 깨닫고 울부짖는 장면의 배치를 통해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물었던 물음을 ‘위험한 관계’에 와서 “마음은 움직이는 거야”로 화답한 것이다.

조대영 (영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