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소망
[훈짐나게 - 04] 보성 강골마을 굴뚝 구경
옛 선인들의 자연관을 보면 문득 놀라울 때가 있다. 산은 우주고 양이며 신의 거처라, 땅은 음이고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 땅의 돌과 바위는 사람의 뼈요, 물은 피와 같고, 흙은 살이고, 나무와 풀은 털이며, 안개와 이슬은 숨결로 바라본다.
이런 글을 보고 느끼고 실감하던 20대 후반에 나는 담양의 소쇄원에 있었다. 어느 여름 비님이 오시는 날, 소쇄원에 들어서는데, 광풍각의 귀뚝에서 나는 연기가 계곡 아래로 쫙 펼쳐지는 모습이 너무나 신비롭게 보여서 잠시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건 뭐지. 그렇게 수없이 광풍각과 제월당에 불을 지폈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던 터라 한참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양재영 종손이 모시적삼 차림으로 십장폭포로 쏟아지는 물을 광풍각 처마밑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거리로는 20여 미터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연기 위에 건물과 사람이 모두 다 일상으로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구름속 선계의 신선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 같았다.
대체 저런 신묘한 조화는 무엇인지 궁금함을 품은 채 한참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소쇄원 광풍각 굴뚝 연기가 빚어낸 선경
시간이 지나서 그날의 광경을 물었더니 종손의 말씀은 선조들의 자연관이 소쇄원에서 모두 일치하는데, 딱 하나 소쇄원에 부족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안개라는 것이었다.
계곡이 짧고 협소한 터라 안개가 피어오르는 광경은 종내 찾아지질 않는데 이를 대체하는 것이 바로 연기라는 것이었다. 북쪽에 함실아궁이가 있는 광풍각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굴뚝 없이 불을 때는 것은 불가해한 일이다. 굴뚝으로 순환되는 공기가 나무의 가연성을 높이며, 불의 기운이 온돌 바닥을 달구고 연소되는 연기를 밖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불을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선인들은 아궁이는 낮은 곳에 굴뚝은 바람이 잘 통하는 높은 곳에 두었는데 광풍각의 굴뚝은 사실 숨겨져 있었다. 계곡의 석축을 쌓아 올린 기단부에 네모진 구멍 하나를 비워 놓고 여기에 구들장 아래 고래의 통로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이 풍성하게 흘러가는 소쇄원의 여름. 거기에 비까지 가세하여 물소리가 창창하게 울리는 날, 아궁이에서 타오른 불의 기운이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나오는데, 낮아진 기압은 연기를 치솟게 하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여 계곡을 채우고 광풍각을 구름속에 가둔 듯 에워 싸도록 한 것이다.
종손은 덧대어 한마디를 던졌다. 이런 장치적 효과 말고도 굴뚝을 낮게 만든 이유가 또 있다는 것. 굴뚝이 높으면 불이 잘 타고, 방바닥이 뜨거워지니 방안에 있는 서생들이 책은 안 보고 드러누울 궁리만 할 수 있기 때문에 부러 불이 잘 들지 않게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사실 광풍각에 불을 넣을 때 눈물콧물 쑥 빼면서 한참을 공들여야 불이 타올랐던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대전의 동춘당에 갔을 때 송준길 공은 후손에게 굴뚝을 높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남겼는데, 그 이유는 방이 너무 따뜻하면 글공부에 태만하게 되니 그렇고, 연기가 높이 솟으면 이를 보는 가난한 이들의 박탈감이 클 것이니 그렇다는 말씀을 전해 들었다.
그런 연기마저도 올리지 못하는 궁핍한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연민이 함께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낮은 굴뚝은 그 매캐한 연기로 해충을 쫓아내는 역할도 함께 했다고 한다. 살충제나 기피제 같은 것이 없던 시절의 소독약이 바로 연기인데 낮게 깔려 집으로 들어오려는 모기나 나방 같은 해충을 구제했다고 하니 연막 소독의 효시 같은 역할도 굴뚝이 대신했음이다.
전국 최대 구들돌 주산지 오봉산
2000년대 초반 보성 득량면의 강골마을을 방문했을 때 당시 민속마을로 지정되지 않았음에도 이렇듯 훌륭하게 옛집이 살아있다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자부심 가득한 광주이씨 어르신들의 환대 속에서 열화정을 비롯하여 이용욱 가옥, 이식래 가옥, 이금재 가옥 등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자작일촌과 같은 강골마을은 대숲을 감싼 야트막한 산이 그 아래 사람의 마을을 담아주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들 앞으로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오봉산이 있었다.
반촌이 들어서기 위한 조건이 이미 잘 갖춰진 곳다웠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마을의 담장과 집 뒤켠의 굴뚝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몇 번 더 이 마을을 찾았다. 언제나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빈집, 굳게 닫힌 집이 늘어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 보성문화원에서 잊혀져가는 오봉산의 구들문화를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봉산은 칼바위와 원효대사로도 유명하지만, 그곳의 돌이 채석되어 이곳저곳으로 실려 나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구들돌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이 돌들이 고래를 떠받치고 그 위에 황토를 깔아 방을 놓고 기와 지붕을 얹은 그야말로 고래등을 찾아 강골로 스며들었다.
자그맣고 낮게 굴뚝을 만든 뜻은
마을 중심부의 이용욱 가옥(이진래 고택)을 먼저 찾는다. 솟을대문이 무춤거리게 하지만 마을의 관문과 같은 곳이라 생기가 있고, 관리도 잘된 집이다. 드넓은 마당을 조심스럽게 들어가 내부의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지어진 지 200여 년 된 집이니 그 시절의 역사와 오늘 현재가 공존하는 집이다. 옛 원형들이 잘 간직되고 있어 안온한 느낌을 준다.
흙과 돌을 이용해 만든 돌담벽에 네모지게 터진 구멍이 웃음짓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담 뒤쪽의 우물을 흘깃 살펴보거나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이야기를 경청하고자 만들었다는데, 저 위엄 가득한 솟을대문과 대조를 이룬다. 구중궁궐에서 나온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에피소드나, 구례 운조루의 뒤주 ‘타인능해’처럼 소통과 공생을 열망하고 실천했던 마을 공동체성의 발로가 이거 아닌가 싶어진다.
말은 바람과 같이 흐르는 것이지만 샘물처럼 솟아나고 고여지는 물성 모두를 간직하니 햇볕 실하고 바람 잘 통하는 곳의 우물에서 사람살이의 이모저모가 저 구멍으로까지 파고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까지.
곳간의 회벽에 네모난 면들의 조화와 비례가 눈길을 끈다. 곡선만 미를 갖춘 것이 아니라 사각도 배열만 잘하면 그 자체가 회화처럼 보여진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뒤안으로 돌아가 굴뚝과 만난다. 돌과 흙으로 다져서 4개 정도의 단을 만들고 연기가 나오는 굴뚝 부분만 수키와로 구멍을 주고, 암키와로 지붕을 마감했다. 다시 또 대문과 집의 위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 정도 몸집의 집이면 아주 크낙하게 만들 법한 굴뚝을 저렇듯 소략한 뜻은 무얼까? 고래에서 다시 연도를 만들고 뜰 위에 얹혀서 자그마하게 만든 굴뚝 또한 집안의 연기가 솟구치며 주변 사람들에게 위세 떠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생각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미를 말할 때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표현했던 말이다.
그러고 보니 소쇄원의 제월당 굴뚝이나 환벽당의 굴뚝도 유사하다. 내친 김에 이금재 가옥(이정래 고택)으로 들어가 본다. 뒤뜰의 두 굴뚝 중 하나는 새롭게 단장했다. 절집에서 보는 잘 다듬은 굴뚝처럼 계단을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기와집을 만들었다. 하지만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옛 모습 그대로의 굴뚝이 자리하고 있다.
중생을 태운 거북이 같은 형상의 열화정 굴뚝
고샅을 나와 담장 밑에 있는 굴뚝과 만난다. 쉽지 않을 일이다. 사유지를 넘어선 골목길에 연통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오늘의 시대에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인데. 아랫집의 굴뚝을 길목에 앉혔으니 말이다. 모두들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왔음의 방증이자, 연기를 해로운 것으로 보지 않았고, 공동체 모두의 것으로 인식한 것 아닌가 싶어진다.
열화정(悅話亭)으로 올라간다. 열화정의 굴뚝은 토방 위에 있다. 외양으로 보면 경북 울진의 불영사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 같다. 머리를 세우고 등에 중생을 모시고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북이처럼, 열화정의 의로운 선비들을 태우고 보다 밝은 세계를 구축하려는, 수키와 두 개가 보여주는 거북이 머리 같은 형상에는 무언가 함축적인 메시지가 있을 듯하다.
저 굴뚝과 연기가 또 다른 상상으로 이끈다. 1993년 발굴되어 국보가 된 백제금동대향로의 구조를 보면 아래 받침에는 수중세계이자 음을 상징하는 용이 자리잡고, 향이 피어오르는 가장 끝자락에는 양을 상징하는 곧 날 듯한 봉황이 자리잡고 있다. 가운데 몸통은 신선이 사는 세상인 ‘박산’이라 하는데 그곳에서부터 봉황의 목까지 12개의 구멍을 통해 연기가 올라와 봉황은 천상의 세계 그 자체에 있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타오르는 향과 솟아오르는 연기 속에서 극락세계를 염원했을 마음을 그려본다.
‘식영정 20영’(息影亭二十詠) 중의 ‘학동모연’(鶴洞暮煙)이라는 구절을 보면 학마을에 저녁이 되어 밥 짓는 연기 모락모락 나는 풍정을 시로 읊은 것이다. 저녁 무렵 연기 나는 그 풍경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이쪽의 사람은 저쪽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소통하는 바탕으로 연기를 보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계를 상징하는 구름으로도 연기를 바라보았음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세속, 저곳은 피안의 세계로서 들어가고 싶은 천상의 세계 말이다.
매일 아궁이에 불을 넣으며 밥을 짓고 방을 데우며 퍼져나가는 연기가 우리네 풍진 세상을 더욱 다정다감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주길 바라는 염원이 굴뚝에 서리서리 배어 있지 않을까.
글=전고필
전고필님은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 8권역 PM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담양에서 향토사전문서점 ‘이목구심서’를 꾸리고 있습니다.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