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한국사회 양껏 고발
[조대영의 영화읽기]‘전설의 주먹’
20~30대 여성관객을 중심에 놓고 제작되던 한국 영화는, 이제 40~50대 남성관객도 고려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작금의 극장풍속도는, 청년시절 극장을 즐겨 찾았던 중년관객들의 증가세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관객취향의 추이를 따라잡는 감독 중 한 명인데, 그런 그가 40대 남성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들고 나온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영화는, 고교시절 주먹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던 세 남자의 현재와 과거를 활발하게 오고가며 드라마를 직조해 낸다.
잠시, 세 남자의 현재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덕규(황정민)는 장사가 신통치 않은 국수집 사장인데, 하나 있는 딸은 학교에서 왕따다. 이상훈(유준상)은 대기업의 홍보부장으로 기러기아빠 신세이며, 신재석(윤제문)은 삼류건달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까 고교시절 화려했던 쌈박질의 주인공들은 이제 한 가족을 두루 살펴야 하는 가장이 되었거나, 변변치 않은 일상을 사는 범부가 된 것이다.
영화는 젊은 시절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을 TV가 마련해 놓은 팔각의 링으로 불러낸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본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돈 앞에 무릎 꿇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케이블TV 프로그램인 ‘전설의 주먹’은 우리시대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하다. 날것으로의 인간싸움을 전시하며 수익을 발생시키려는 것도 그렇고, 이에 반응하는 시청자들과 도박꾼들이 모이는 형국은 분명 천박한 자본이 득세하는 세계임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더 나아간다. 격투기액션이라는 구경거리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듯하다가,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정의롭지 못한 온갖 것들을 호출해 내며 드라마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고교시절 임덕규와 관련한 일화만 해도 그렇다. 88올림픽꿈나무였던 그가 심판관들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올림픽출전권이 좌절된 것도 그렇거니와, 덕규 일행이 이에 대한 반항으로 폭력을 일삼다 끌려들어간 유치장에서, 경찰의 꼬임에 더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부패의 뿌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이 영화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오디션의 명암, 재개발의 어두운 그림자, 스포츠 도박을 둘러싼 승부조작, 대기업과 언론의 은밀한 거래 등등을 노출시키며 막돼먹은 대한민국을 까발리는 것이다.
학교폭력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 역시 감독의 회의적인 시선이 엿보인다. 덕규 패거리들의 고교시절 폭력행사는 가해자들에게는 장난이었을지 모르지만, 직접 당했던 동창들의 기억 속에는 불량배들의 폭력에 불과했음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에 대한 불만을 잔뜩 늘어놓았던 영화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가장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추며 숨을 고른다.
임덕규가 딸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물심양면으로 고생하는 것도 그렇고, 이상훈의 밥벌이는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의 현재 모습은 부도덕한 재벌3세인 손진호(정웅인)의 똥구멍을 핥으며 자리 보존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론했다시피, ‘전설의 주먹’은 우울한 회색빛의 일화들로 가득하다. 강우석 감독은 이 탁한 색깔의 사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유머를 통해 희석시키며 자신의 영화적 장점을 발휘한다.
정리하자면, ‘전설의 주먹’은 격투기액션이라는 쇼를 1차적으로 전시하고, 그 이면에 엉망진창인 한국사회를 양껏 고발하며 관객들에게 공명을 주는 영화이다.
조대영 (영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