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먹고 쌓아올린 도시락 탑같이
[흔한 날들의 기록 - 03] 권승찬 작가의 ‘슬기로운 백수생활’
<집에서 오랜만에 소고기를 굽습니다. 너무 비싼 탓에 1년에 두세 번 먹을까 말까 하지만 넉넉한 양은 사지 못했습니다.…세 식구는 소고기를 단숨에 해치웠습니다. 아내는 오랜만에 먹는 소고기를 넉넉하게 사오지 않은 나에게 눈치를 줍니다. 나는 음식은 조금 부족한 듯 먹어야 한다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립니다.>(‘소고기’, 2021.06.14)
미디어아트 설치작업을 주로 해온 권승찬(49) 작가가 지난 2020년 5월부터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기록하는 ‘드로잉 일기’를 쓰고 있다.
스케치북은 물론 서류봉투, 영수증, 카페 냅킨 등 손에 앵기는 대로 끄집어다 연필로, 수채화로, 수묵으로 그림을 그리고 짧은 글을 쓰는 그림일기이다. 지난해 8월에는 160여 점을 추려 ‘슬기로운 백수생활―권승찬의 드로잉 일상’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아빠 백수야? 예술가 아니야? 아빠 전시 제목이 백수라고 돼 있어서 사실 고민 많이 했어.”> 개인전에 내건 ‘슬기로운 백수생활’이란 제목을 보고 초등생인 아들이 내심 걱정되어서 건넨 말도 그림일기 속에 들어 있다.
“힘든 시간을 가졌다. 누구나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답이 없는 시간이었다. 작가들은 전시를 해야 다른 전시로 이어지고 작품이 팔리기도 하는데 지난 2년간은 그렇지 못했다.”
그 ‘답이 없는 시간’을 권승찬 작가는 날마다 ‘드로잉 일기’를 쓰며 견뎠다. 코로나19 상황에 모든 전시 일정과 레지던시 계획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면서 할 일이 뚝 끊겼다. 하릴없이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예술활동을 지속해 나갈지,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놀고 있을 때는 놀고 있는 대로 그 생활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로잉은 설치를 위한 아이디어 기초 작업이기도 하고 내가 게으른데, 게으른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코로나시국이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초등생 아들도 먹이고 보살펴야 해서 매일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것을 그림일기로 기록한 것이다.”
수많은 그렇고 그런 날들이 특별해지는 ‘드로잉 일기’
<새로운 작업실로 옮겨 온 지 며칠이 되었습니다. 작품과 짐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나니 왠지 공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는 고프지만 주위에 특별히 연락해 식사를 함께 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사둔 컵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렸습니다. 컵라면은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 가장 맛있습니다.>(‘컵라면’, 2021.05.16)
<일주일전 오랜만에 아들과 장흥 시골집을 내려갔습니다. 부모님이 소를 키우기 때문에 시골집을 가면 아침저녁으로 소 밥 주는 일을 돕습니다. 아들은 아기 때부터 소를 무서워했고 냄새가 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송아지가 태어나는 것을 직접 본 이후부터 아침저녁으로 일을 돕겠다고 나섭니다. 자신의 몸보다 큰 방역복을 입은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합니다. 그런 어린 손주를 지켜보는 부모님도 웃습니다.>(‘아들과 송아지’, 2020.09.21)
<요즘 작업실에 갈 때 도시락을 챙깁니다. 아내가 김밥을 싸고 있을 때 옆에 앉아 김밥 꽁다리를 하나씩 집어 먹고 있으면 아내 왈 “그만 처먹어! 아들 주게.” “알았어.” “그만 먹으라니까!”>(‘아내가 타박해도 포기할 수 없는 김밥 꽁다리’, 2021.10.07)
<장례식장에서 새벽까지 윷놀던 방을 청소하다가 널브러진 담배와 긴 장초(담배꽁초)를 보니 20살 때 담배값이 없어 인근 병원을 돌며 꽁초를 주워 필 때가 생각난다>(‘외할머니 출상날 새벽’, 2020.08.)
비 오는 날 막걸리 생각, 아들과 함께 먹은 통닭, 반려동물 고양이, 아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 아들과 함께 5·18묘역에서 마주친 바람개비, 작업실 건물 재활용 쓰레기장에 불난 날, 버스와 접촉사고, 시장 보고 음식을 하는 과정….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수많은 그렇고 그런 흔한 일상이 드로잉 기록으로 의미가 특별해진다.
<나는 아들과 짜장면을 함께 먹을 때 가장 좋습니다. 어릴 때부터 기념일이나 좋은 날에는 꼭 짜장면을 먹다보니 지금은 아들이 더 좋아합니다. 좋은 일들이 있을 때 짜장면을 먹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 은사님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술선생님이었던 은사님은 월급날이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꼭 장터에 있는 짜장면을 사주시곤 했습니다. 30년 넘었는데 여전히 그때 짜장면 맛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몇 년 전 젊은 나이로 돌아가신 은사님이 오늘따라 그립습니다.>(‘짜장면’, 2021.07.20)
미술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준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다. 일기는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2021년 8월 일본 나오시마 해변가에 놓여 있던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조형물이 태풍으로 바다에 날아가 조각난 채 발견됐다.
작가는 ‘호박’을 운구처럼 들고 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태풍에 유실된 100억대 작품. 무게가 엄청날 거라 생각했는데…”라며 ‘의외로 가벼운 예술’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쇼핑백에서 쑤욱 올라온 사람의 팔과 손가락이 욕을 한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에 상처 받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참지만 말고 욕도, 싫은 얘기도 하며 살아갑시다.>(‘쇼핑’, 2021.08.02.)
작가는 작업실에 물고기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단다. 알고 보니 아내가 사온 물고기 모양의 실내화. <그냥 버리려고 했지만 신고 다니다보니 편하고 정이 갑니다. 거주하는 공간에 어항이 있으면 풍수적으로 좋다 하니 사이좋게 지내볼 생각입니다.>(‘물고기 실내화’, 2021.05.28.)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다.>(‘저녁간식-배’, 2020.9.4.)
때론 유쾌하고 따듯하게 때론 날카롭게 일상 이야기가 펼쳐진다.
음식 관련 드로잉도 다양하다. “고향이 장흥 회진 바닷가다 보니 예전엔 흔한 음식 재료들이 지금은 먹기 힘든 귀한 음식이 되어 버린” 장어, 낙지 등을 ‘흔한 것 귀한 것’이라 이름붙여 시리즈로 기록했다. ‘흔한 것 귀한 것’의 반전이 세상살이까지 돌아보게 한다.
‘대충요리’라 이름붙인 비빔밥, 계란간장밥, 된장국, 김치김밥 등의 레시피가 담긴 그림들엔 ‘삼시세끼’를 꾸려가는 일상이 담겨 있다.
‘권승찬의 드로잉일상’ 유튜브 시작하다
몇 개월간 계속해온 일상 드로잉이 지루해질 즈음인 지난해 5월, 드로잉을 영상으로 촬영해 ‘권승찬의 드로잉 일상’ 유튜브를 시작했다.
첫 영상은 ‘휴대폰 영상 촬영 고정대’ 드로잉이다.
<매일 매일 쌓여가는 드로잉을 어떤 형식으로 공유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드로잉 과정을 영상으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작업실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 카메라 삼각대, 각목, 휴대폰 거치대를 끈으로 묶어 조악하게나마 휴대폰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고정대를 만들었다. 바닥에 앉아 드로잉하고 바로 위에서 영상 촬영을 한다. 즉흥적으로 만들었지만 쓰기에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2021.05.17)
촬영 준비, 드로잉, 영상 편집 등 유튜브에 올리는 작업에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시작한 김에 다른 작가들도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영역을 확장했다. ‘드로잉 탐방’ 코너. 다양한 작가들을 만나 드로잉에 대한 정의를 듣고 작업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그냥 드로잉’ 코너는 냅킨을 도화지 삼아 생각나는 대로 국화, 수국, 목련, 해바라기, 독도, 호랑이 등을 수묵화로 그린다. 그리고 한마디 툭 쓴다. ‘토라진 마음도 금세 행복해지는 하루’.
예술의 영역이 유튜브 구독자에게 썩 매력적이지는 않은지 구독자수가 아직 미미하다.
<‘권승찬의 드로잉 일상’은 간단한 드로잉과 글을 통해 일상을 기록하고 아카이브화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매번 드로잉, 글쓰기, 영상촬영과 편집 업로드를 반복하다보니 혼자서 버거울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 지치지 않는 꾸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드로잉을 해 갑니다.>(‘버리는 드로잉’, 2021.06.17>
<열심히 먹고 쌓아올린 도시락 탑같이 우리의 삶도 열심히 쌓아갑시다.>(‘도시락폭탄이 아닌 도시락탑’, 2021.08.21)
글 임정희 기자 사진 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