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질일수록 동무가 있어야쓰고 항꾼에 가야써”
[다시 봄-01]
한 고랑 한 고랑 전진하고 있다.
“혼자 할라문 멀어. 질어. 먼 질일수록 동무가 있어야쓰고 항꾼에 가야써.”
무안 해제면 유월리 오류마을 홍춘화(78), 정일심(73) 어매.
같은 동네 김선길(66)씨네 양파밭 일을 거들고 있는 중이다.
날큼한 낫호미로 풀을 쏙쏙 끄집어 맨다.
“누가 어찌코 영리하게 이러코 맨들았으까. 쏙쏙 뽑아낸당께”라고 연장을 치하하던 말씀이 “존 시상은 오기가 이러코도 애러우까. 이 시상을 자꼬 못쓰게 맹그는 것들도 요러코 쏙쏙 매불문 좋으꺼인디” 라고 세상살이에 가닿는다.
“땅이 팽야 내 직장”이라는 홍춘화 어매는 “이거이 우리 직업이여. 싫으문 못해. 고생이라고만 생각하문 못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가 짤르도 못해라. 평생직업이제. 내 힘이 모자라문 못하제. 일 그만해야겄다는 생각은 절대 안들어. 내야 양배추밭도 올해 또 지슬라고.”
묵정밭 늘어가는 세상에서 어매는 여전히 초록의 평수를 지키고 있다.
“배추고 양파고 마늘이고 쉬운 것이 없어. 한허고 공을 딜애야제. 근디 시방 양파가 가격이 없응께 갈아엎으고 난리여. 애쓰고 농사 지서도 그 공력이 헛것이 되아불 때가 많애.”
그래도 땅에다가 다시 또 희망을 심고 스스로를 거듭 일으켜세워온 한생애다.
“내 몸뚱이로 벌어서 새끼들 다섯 다 갈쳐서 내놓고, 집도 짓고 벨 짓거리 다 했구만. 나는 팽생 자부심을 갖고 살아. 어디다 내놔도 챙피하고 부끄럽든 안한 인생이여.”
“이름도 무지하게 좋다”고 덧붙인다.
“이름도 내놀 만하게 좋아. 봄춘(春)자에 꽃화(花)자. 춘화, 봄꽃이여. 저그는 정일심. 내 이름도 좋고 저그 이름도 여간 좋제. 글씨 쓰기도 좋고 여간 좋제.”
“긴 겨울 지나문 봄이 오대끼 먼 훗날이 와불었어”
“내 성질이 게울른 과가 아니요. 원래 종자가 그래. 종자가 좋아. 이날 평상 내 몸뚱아리로 벌어서 살았제. 시집 온께 암것도 없어. 영감이랑 나랑 등거리 둘로 살았어. 우리 애기들 학교 다섯 갈칠 때 그때가 젤로 힘들었제. 돈 꾸러 댕개. 빚 내다 학교 갈쳐. 그때는 이자가 5부여. 잠만 자고 나문 어찌게 돈이 불어난고, 무솨. 우리 살기는 없어도, 나는 농사 거두문 우리 집으로 갖고도 않고 바로 밭에서 빚낸 집으로 갖다줘불었어. 근께 돈은 없어도 신용은 일등급으로 산 폭이제.”
그 힘든 날들을 견디게 한 것은 ‘먼 훗날’이었단다.
“먼 훗날을 바라고 살았제. 먼 훗날을 생각하고.”
그랬더니 그 ‘먼 훗날’이 오더란다.
“한 고랑 한 고랑 일하다 보문 언젠가는 끝이 나대끼, 긴 겨울 지나문 봄이 오대끼 먼 훗날이 와불었어. 요새는 부러운 것 없이 살아. 그때는 고생 많이 했어도 우리 애기들도 인자 다 잘 살고…. 애터질 때는 세월도 안 가더니 요새는 살 만한께 세월이 따블로 가불어. 막 가불어. 그때는 아조아조 안 가.”
정일심 어매가 “요 언니가 마흔ㅤ몇 살에 혼자 됐어”라고 말한다.
“오매 뭐더러 그런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는 감추제. 내가 생각이 쿨해갖고 그런 표현도 눈물도 안 내비치고 살았어. 새끼들 보고 참고 살았제. 우리 오남매 잘 키우고 믹이고 갈쳐야겄다는 그 맘으로. 새끼들 아니문 그 힘을 낼 수가 없제. 고맙게도 애기들이 잘 커줍디다.”
곤고한 생애를 호쾌하게 이겨온 어매는 “고생해서 골벵 들었제” 같은 소리도 입밖에 내놓지 않는다.
“아따, 그런 말은 애껴야제. 골벵 들문 안되제. 나쁜 말은 애끼고 존 말은 애낌없이 내놓고. 존 말은 남한테 번치고 불미스런 말은 내 속에 딱 오믈셔불어야써.”
‘번치고, 오믈셔불’ 것들을 가르고 분별하듯, 어매는 ‘기고 아니고’가 분명하다.
“느자구 없이 귄 없이 살문 안 되제. 시상 살면서 놈한테 욕 얻어묵으문 잘 사는 것이 아녀. 놈한테 욕 안 얻어묵고 살아야써. 공것 있어도 욕심 안내고 내 노력의 대가로 살고, 정직하게 살고. 놈 맘아픈 소리도 안하고. 누구 탓도 없고 누구 숭도 없고 원망도 없이 사는 거이 보기 좋아. 그거이 쿨한 것이여.”
‘쿨한’ 것을 좋아하는 어매. 땀 안 흘리고 부자로 사는 것도 싫다.
“나는 그런 거 안해 안해. 불공평은 안돼야. 우리 자석들도 나 탁해서 생각이 똑같애.”
“우리는 돈이 없어도 돈에 환장한 적은 없어. 묵고만 살문, 놈한테 꾸러만 안가문 되야.”
매사 긍정적인 어매가 습관처럼 주문처럼 하는 말은 “인생말년이 이러고 좋구만”이다.
“힘든 시상 살아갖고 요즘은 좋은 날 온께 죽은 우리 어매가 고맙드라고. 나 낳아서 이 시상을 내가 살아묵으니까.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머덜라고 나를 낳아서 그러코 원망하는 노래도 있는디, 나는 그러안해. 우리 어매가 나를 이 시상에 나갖고 키와줘서 고마와.”
“놈의 속을 알아줘야 그륵이 큰 사람이제”
“포도시 초등학교는 나왔어. 우리 어매 아배가 엽렵해갖고 공부를 갈쳐줬어. 춘화도 아부지가 지어준 이름이제. 내 욱으로 오라비가 셋이여. 우리아부지가 맨 아들만 낳고 나를 딸을 나논께 좋아갖고 춘화라고 이름도 좋게 지어줬어. 우리 춘화 데려간 사람은 즈그 선산에 봉황이 울어야 데려간다고, 항시 나를 그러코 귀하게 말했어. 근디 초등학교 5학년때 울아부지가 돌아가셔붓서. 아부지 살아계셨으문 이러코 없는 디로 안 오제. 근디 딴디로 갔으문 이삔 우리 새끼들을 못 만났겄제.”
어매는 오남매를 낳았다.
“줄줄이 딸만 넷, 다섯번차에 아들 한나 포도시 났네. 시아부지가 아들 못난다고 나가라고도 했어. 못살 시상을 살았어. 집안 망할라고 딸만 난다고 시아부지가 그랬는디, 집안만 번창해 놨어. 쩌참에도 시아부지 납골당 가서 내가 말했어. ‘아부지, 나 집안만 안 망하고 우리 새끼들 다 잘 키와놓고 살림만 번창해놓고 집 좋게 지서놓고 사요’라고. 시아부지가 잘못했다 급디다. 내 귀에 드키더랑께.”
사느라 오그라질 수도 있는 마음을 스스로 “항시 널룹게” 펴고 살아온 어매.
“나는 밥그륵이 양판이제 종지기가 아녀. 자기만 보듬고 우대고 살문 그륵이 짝은 거제. 나배끼 없는 것이 몹쓸 인간이여. 우리는 놈이 아프문 내 맘이 짠해갖고 ‘오매 짠한거’ 그 말이 절로 나와. 머시라도 도와주고잡고, 나놔주고 잡고. 고생하고 배고프게 살아봐서 글제. 놈의 아픔이 내 아픔이여. 놈의 속을 알아줘야 그륵이 큰 사람이제.”
글 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