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우리 동네가 벚꽃이 아조 좋았어”

[옛 사진 한 장 들고 마포로-01] 부안 변산면 마포리 마포·산기마을

2022-07-01     남신희
브라이언 배리가 찍은 1968년 부안 변산면 마포마을의 봄날 풍경.

 벚꽃이 터널을 이루는 비포장길에서 소달구지를 끌고 오는 아저씨와 그 옆에서 걷는 노인과 달구지를 타고 있는 어린아이 두 명.

 부안 변산면 마포리 마포(馬浦)마을을 찾아간 건 오래된 옛 사진 때문이었다.

 <전라도닷컴> 3월호의 `새록새록 이야기곳간’에 소개된 1968년에 찍은 사진 한 장.

 당시 전북 지역 평화봉사단원으로 왔던 미국인 브라이언 배리(1945~2016)가 찍은 마포마을 사진이었다.

 봄볕이 좋은 날 마포마을로 갔지만 사진 속의 벚꽃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소달구지가 가던 길은 국도 30호선 편도 1차선으로 넓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주변의 초가집도 없었다.

 골목 담벼락 아래 할머니 두 분이 앉아 있다. 전라도닷컴 3월호를 펴들고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옛날 우리 동넨디. 이 소구루마 끌고 오는 양반은 `먹진 양반’이여. 이름은 나도 잘 몰라. 다 잊어불었제. 이 양반은 소구루마 끌고 안 댕긴 디가 없었어.”

 20살 때 외포에서 시집왔다는 외포댁 우승례(84) 할매는 사진을 보더니 총총하게 기억을 해내신다.

 “난 잘 안보인디…. 옛날에는 우리 동네가 벚꽃이 아조 좋았어. 다 고목이 되아갖고 없어져불고 큰길을 냄서 다 잘라불었제.”

 19살 때 시집왔다는 달래댁 정정분(86) 할매가 눈을 꿈벅거리신다.

 “그쪽은 학교였는디 문 닫아분 지가 오래여. 그리 가지 말고 저리 가봐. 거기 가믄 사람들이 있을 것이여.”

마포마을 들머리. 언덕에도 밭에도 푸르름이 짙다.

 달래댁이 알려준 대로 사진 속의 소달구지가 가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마을 건너편 서쪽은 지명이 말해주듯 예전에는 고사포에서 마을 앞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던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간척이 되었다. 마을 앞 동산 너머에는 넓은 간척지가 있고 남쪽으로 마을의 주산인 백마산(白馬山)이 있다. 마을 뒤 북쪽으로는 옹기봉, 옥녀봉이 있다. 대부분 백마산 자락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달리던 말이 안장을 벗는 `주마탈안’(走馬脫鞍) 형국인 데서 마을 이름이 연유했다고 한다.

 말개(馬浦)라 했지만 오호(午湖)라고도 했다. `오(午)’는 `마(馬)’와 통하는 글자다. 마포에 바닷물이 들어차면 호수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은 국도 30호선을 따라 양쪽으로 말 달리듯 길게 형성되어 있다.

 브라이언 배리가 찍은 마포마을의 옛 벚꽃길을 생각하면 지금의 도로변은 삭막하다. 당시에는 벚나무 덕분에 주변의 변산이나 격포 초등학교의 봄 소풍지로도 이름이 났다고 한다.

세월 흐르며 벚나무는 베어지고 소달구지가 가던 길은 국도 30호선으로 확포장되었다.

 “소구루마 끌고 오는 양반은 `먹진 양반’이여”

 동막 쪽으로 가다보니 마을 가운데쯤에 마포마을 표지석이 있고 마포떡방앗간이 있다. 방앗간 앞에 계신 어르신들께 전라도닷컴 3월호를 펼쳐 옛 마을 사진을 보여드리니 한마디씩 하신다.

 “먹진 양반이고만. 원래는 변산 묵정마을에서 나온 이름인디 부르기 쉬운 대로 `먹진’이라고 불러. 소를 끌고 오는 이 분이 조재식씨고 그 옆에 따라오는 분이 이 분의 부친인 조자봉씨여. 이 분 손자가 지금 산기마을에 살고 있소.”

 25년 동안 떡방앗간을 운영했다는 조찬문(76)씨는 사진을 척 보더니 금방 알아차린다.

 “이 벚꽃을 누가 심었냐믄 당시 천석꾼으로 알려진 기왓집 주인이 심었다고 그래요. 이 근동에 그 사람 땅이 아닌 디가 없었제. 지금은 다 서울로 올라가불고 암도 안 살아요. 기왓집도 다른 사람이 살고. 동네가 옛날 같지 않아요. 요 집도 동네 이발소였는디 지금 문을 닫았소. 나도 인자 힘들어서 방앗간 그만 둘라고…. 예전에는 고춧가루도 많이 찧고, 그때는 사람들도 많고, 젊고.”

 건너편 구멍가게인 `마포상회’ 앞 화단에는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마포마을에서 나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마포댁 조점옥(76) 할매가 40년 넘게 꾸려오고 있는 가게다. 동네 아짐 할매들이 다 모여드는 사랑방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도로가 넓어지고 포장되면서 옮겨서 지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전라도닷컴 3월호를 할매들 앞에 펼쳐서 사진을 보여드리니 우리 동네라고 금방 알아차린다.

 마포댁은 핸드폰을 뒤적거리더니 배리의 사진을 보여준다. 부안문화원에서 `부안 판타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을 열었던 모양인데 그때 배리의 사진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마포상회를 나와 언덕 위 마포교회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마산과 옥녀봉이 감싸는 마포마을의 봄날은 조용하다.

 교회를 나와 동산 자락에 있는 원불교 변산교당으로 가보니 교무님이 마당을 청소하고 있다.

고샅에서 만난 초가집. 이태훈 할배가 부친과 함께 스무 살 때 지은 헛간채라 했다.

 “이 달구지에 타고 있는 꼬맹이들 중 한 사람이 나요”

 다시 골목길을 걷노라니 흙으로 지은 초가집이 보인다. 이태훈(83) 할배가 자신의 부친과 함께 스무 살 때 지은 헛간채라고 했다.

 “뭘라고 그리 사진을 찍고 조사를 흐요. 그렇게 조사를 흐믄 양말 한짝이라도 나오요? 그도 아닌디 멕없이 조사를 흐요? 원래는 안채도 초가집이었는디 면에서 하도 새로 지스라고 헌께 돈도 없는디 헐고 새로 지섰소.”

 이태훈 할배 집을 나와 1961년에 개교한 마포초등학교로 가 보았다. 입구에 10여 그루의 큰 벚나무가 양편으로 서 있었다. 사진 속 벚나무들도 이럴까 싶었다.

 마포마을, 유유마을, 산기마을, 유동마을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는 1999년에 폐교가 되었다. 봄날이면 벚꽃 아래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교정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곳에 깃들어 활동했던 `부안생태문화활력소’ 나무 간판도 낡아가고 있다. 학교를 나와 마포삼거리로 가니 천주교 마포공소가 있다. 공소라 거주하시는 신부님이 안 계신다. 마을에는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세 개의 종교가 이렇게 공존하고 있다.

 당산나무 아래 담벼락에 그려져 있던 옛날 `세 친구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다. 하는 일은 달랐지만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살았던 세 친구의 이야기가 당산나무 아래 돌에 새겨져 있다. 마포 삼거리쯤에서 사진 속 `먹진 양반’의 손자인 조찬준(65)씨를 찾아가니 그는 친구들과 들일을 끝내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금방 사진을 알아보았다.

원불교 변산교당, 마포교회, 천주교 마포공소. 마을에는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세 개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브라이언 배리가 찍은 사진인데 이 달구지에 타고 있는 꼬맹이들 중 한 사람이 나고 한 사람은 안치환이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지은 내 친구 시인 박영근이요. 당시 박영근이랑 나는 11살이었소. 소 달구지를 끄는 사람은 우리 부친이시고 옆에 따라오신 분이 내 조부요. 당시 부안은 집집마다 젓갈을 담았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젓갈 담을 옹기가 필요해. 우리 부친이랑 조부님께서 집집마다 옹구를 실어서 배달해 줬지요. 지금 같으믄 택배요, 택배. 그날도 동막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당시 변산보건소에서 일하던 배리가 휴가를 얻어 이 일대를 돌아다님서 촬영을 했는디 그때 찍은 거예요.”

 같이 막걸리를 마시던 그의 친구분은 전라도닷컴 3월호를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한 권 줄 수 없냐고 하시며 흥이 올라 막걸리를 마신다. 날이 어두워지자 펜션을 잡아줄 테니 자고 가라고 하신다.

 사진 속 풍경은 만나볼 수 없었지만 그 사연들을 찾아가는 길은 기분 좋은 길이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심홍섭님은 전라도 마을 곳곳에 깃든 역사와 사람살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 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