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 꽃동굴이 늘 기억 속에 선합니다”
[옛 사진 한 장 들고 마포로-02] 사진속 그 사람-조찬준
“벚나무 꽃동굴이 늘 기억 속에 선합니다. 동굴이죠. 예전엔 터널이란 말 없었잖아요. 저는 꽃 갖고는 절대 터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그런 동요를 마음속에서 읊조리다 보면그 정경이 절로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봄날을 추억하면 `벚나무 꽃동굴’이 먼저 떠오른다는 조찬준(65)씨. 마음속에선 늘 기억하고 재생되는 풍경이었지만, 40여 년이 지나 한 장의 사진으로 오롯이 접하고 보니 더욱 사무쳤다. 찰나이자 영원 속에 있는 풍경이다.
젓독아지 배달하고 소달구지 타고 오던 봄날
“소 고삐 잡은 사람이 우리 아부지, 옆에 가시는 분이 할아버지, 구루마 타고 있는 애가 접니다. 제 옆엔 친구 영근이가 타고 있고요. 그 당시는 카메라 자체가 귀해서 사진찍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지요. 미국인 브라이언 배리가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올 때 형한테 선물로 받은 카메라라고 하더라고요. 부안의 풍경과 사람들을 슬라이드필름으로 찍어서 현상하러 미국의 형한테 보내놓고 까먹고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40여 년 뒤에 현상돼서 이 사진들이 세상에 나왔다고 그래요.”
1968년에 찍은 이 필름이 배리의 형의 집에서 묵혀졌다가 뒤늦게 발견된 것은 2012년.
부안문화원은 2014년에 브라이언 배리(1945~2016)가 찍은 부안의 옛풍경들을 모아 사진집을 냈다. 제목은 `살래여 살래야’. `산내여, 산내야’라고 산내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소리다. 예전엔 변산면이 아니라 산내면이었고, 부안 사람들이 `산내’를 `살래’라고 발음했던 데서 딴 제목이다.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서 1968년 부안 산내면(변산면) 보건지소로 파견되었던 브라이언 배리는 부안의 매력에 빠져 생을 마감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부안 부씨’로 살았다.
1968년 변산 마포삼거리 풍경을 찍은 사진엔 격포 가는 길 양쪽으로 벚꽃이 무성한 나무 그늘 아래 신작로와 사람들, 주변 초가집과 돌담이 담겨 있다.
만개한 벚꽃이 하늘을 덮고, 신작로에도 벚꽃 그림자가 피어 있다.
“1킬로미터쯤 벚나무가 주욱 이어졌어요. 이 시골길 비포장도로로 격포~부안읍 버스가 다니기도 했죠. 해안이라 젓갈을 많이 담갔고, 자연히 항아리도 많이 필요했어요. 벚꽃 피는 철에 젓갈류를 바다에서 많이 잡으니까 독아지 수요가 많았어요. 독 짓는 가마가 우리 동네에도 세 군데가 있었고, 그 중엔 우리 할아버지가 항아리 만들던 동막(독막)도 있었어요. 이날도 해안가 마을들마다 젓독아리든 장항아리든 구루마에 실어서 배달하고 동막으로 돌아가는 길일 거예요. 아부지가 소구루마를 끌고 있는디 이때만 해도 소구루마가 덤프트럭이랄까요. 소구루마 옆에서 걸어가는 할아버지는 한복 차림이죠. 그 당시 이 연배의 분들은 거의 하얀 무명저고리바지 입었었을 시절입니다.”
의도한 것도 아니건만, 3대가 함께 한 일상이 순간포착된 귀한 사진이다. 1968년 봄날의 한 순간이 개인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시절 산천과 사람살이의 기록으로 확대된다.
배리가 붙인 이 사진의 제목은 `원마포 판타지’.
“천국에서 하염없이 아무 생각없이 잘 놀던 시절이죠.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았어요.”
유년의 고향은 실락원이랄까.
“우리 동네가 많이 변하진 않았어요. 주변은 많이 변했지만 우리 동네는 관광지에서는 다행히 좀 처져서 많이 안 변했어요. 벚나무들은 도로가 확포장되면서 뽑혔어요. 그때 슬펐죠. 반대를 해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제 친구들도 아마 벚나무 영향을 좀 받았을 건디. `뉴스서천’ 편집국장인 허정균이랑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래의 원시를 쓴 박영근, 마포초등학교 동창인 그 친구들이랑은 가족처럼 살았어요.”
그는 마포초등학교 6회 출신이다. “마을에서 4킬로 떨어진 변산초등 본교에 다녔던 선배들은 나중에 여기가 개교되면서 옮겨 다녔어요. 학교를 짓고 넓힐 때 시멘트벽돌을 큰 보자기에 싸서 날랐던 기억도 나요. 우리 학교가 첫 부임지였던 박상만 선생님이 풍금을 치며 가르쳐준 고운 노래들도 늘 마음속에 있어요.”
“내가 살던 데 가서 살아야지 싶었어요”
훗날 시인이 된 박영근의 집은 바로 옆집이었다. 집 마당에서 건너편 언덕의 소나무가 바라다보인다.
“80년대 초에 뭣 때문인가 힘들어서 영근이가 내려왔는데 저 소나무밭을 한없이 바라보던 생각이 나요. 한겨울에 눈이 올 때면 북풍이 쳐서 저 소나무들에 눈이 막 달라붙어요. 소나무 볼 때마다 `샛바람에 떨지 마라’고 친구가 남긴 말을 떠올리죠.”
먼저 세상을 뜬 친구는 남은 친구에게 `웬수’가 된다. “웬수죠 웬수”라는 말에 못 다한 정과 쓸쓸한 그리움이 담긴다.
“여기 살 땐 무시로 우리집에 들락거렸어요. 같이 어울려 살라고 나도 인천으로 갔어요. 공장도 좀 다녀보다가 저는 일찍 하산했어요. 나는 농사지으러 가야겠다고.”
20대에 인천에서 공장생활도 해보고 사우디에도 나가 살아봤지만 이내 돌아왔고, 주욱 고향의 삶을 살아왔다.
“이 자리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죠. 저는 공장생활이 안 맞더라고요. 농사 짓는 사람의 정서하고는 안 맞는달까. 농사를 짓는 분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농사를 무의식적으로 경험하고 무의식적으로 몸에 뱄어요. 그러다보니 할머니 어머니에게 받았던 것들이 자연스레 전수됐죠. 도시에서 살다보니 당연히 알아지더라고요. 내가 살던 데 가서 살아야지 싶었어요.”
`한살림’의 부안 지역 생산자공동체인 `산들바다공동체’ 회원으로, 쌀농사는 물론 양파 작두콩 우엉 돼지감자 단호박 옥수수 등등 다양한 밭작물을 짓고 있다.
“일은 `좀 하지말자 주의’예요. 일이란 게 힘들면 재미없어지고 오래 가지 못하잖아요. 그래서 적정선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죠.”
하루의 노동 끝엔 그가 애정하는 막걸리가 있다.
“막걸리가 최고로 맛있는 때는 머리 굴리는 일 말고 농사일 힘들게 하고 와서 먹을 때죠. 날마다 그런 행복한 순간이 있습니다, 막걸리 덕분에.”
종종 기타도 친다. 장르는 `막걸리 기타’.
수염과 벙거지 같은 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수염은 왜 기르냐”는 귀찮은 질문을 천 번도 더 들었다고 한다.
“비틀즈가 불렀던 `렛 잇 비’란 노래 제목이 전라도말로 풀면 `냅둬 기냥’이잖아요. 내 몸땡이도 냅두자는 마음 같은 거. 유기농을 하는 이유도 아마 그래요.”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