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본질에 대하여
반복하고 실행해야 나의 것이 된다
깨달음은 무진장하다. 우리는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낸다. 책을 읽다가, 길을 걷다가 문득 깨닫곤 한다. 이 가을 붉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도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오랜 명상이나 생각 끝에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깨달음은 한마디로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어떤 앎이나 통찰이다. 그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오기도 하고, 또 찰나 같은 순간, 순식간에 우리를 덮쳐 전율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순간 우리는 아르키메스처럼`유래카’하고 외칠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저런 수많은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삶의 지난한 연속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많이 생각하고 많이 궁리하면 더 많은 깨달음을 얻고, 더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가? 물론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정성과 노력을 들인 만큼 어떤 대가나 보상이 있지 않겠는가! 반대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막 산다면 어떨까? 당연히 어떤 생각과 개념도 투자하지 않았는데, 나올 만한 어떤 산출도 없지 않겠는가! 깨달음은 오직 생각과 궁리 끝에 비로소 얻게 되는 선물 같은 것이다. 어떤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나름대로 온갖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리라.
깨달음은 구도자의 전유물인가?
그런데 깨달음은 그것을 목표로만 삶을 영위하는 구도자들만의 전유물이지 않는가? 또 학식이 많고 교양 있는 사람들만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또 그렇게 생각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우리 모두가 구도자처럼 삶을 살수도 없고, 또 최고 수준의 학식을 갖춘 사람이 될 수도 없다. 구도를 위한 시간투자나 학식이 많음이 곧바로 높은 수준의 깨달음과 지혜의 획득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들이 깨달음을 약속하는 확실한 보증수표는 분명 아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구도자든 아니든, 학식이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아무런 조건 없이 열려 있는 문이다. 깨달음을 원한다면 누구든지 그 문 안으로 그냥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면 된다. 깨달음의 문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에게는 닫혀 있지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열려 있는 문이다. 깨달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솔로몬의 집, 곧 지혜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앞서 깨닫고 미리 깨달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깨달음을 날마다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최근 지구인들이 80억 명에 달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체 지구인들 중에서 이처럼 어떤 높은 수준의 삶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니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수준의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도가 높지 않은 보통 사람도 삶에 대한 이런저런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깨달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작심삼일이란 표현이 이러한 문제를 냉철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는데, 왜 그것이 이내 곧 사라져 버릴까? 왜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할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또 그 의지가 매우 나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떤 이유보다도 그것은 단적으로 머리로만 깨달았을 뿐, 그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그것이 주된 이유라고 생각한다. 사실 머리로 깨닫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몸으로 일일이 실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깨달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알면서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처럼 우리는 깨달은 바를 실행하지 않는다. 늘 생각만 하면서 아예 실행하려고 시도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머리로는 쉽고 몸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머리로 생각하기는 쉽지만, 몸으로 하는 것은 정말 어렵기 때문에 그렇다. 몸이 하는 일은 보통 그 일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몸이 익혀야 결국 가능한 일이 된다. 그래서 몸이 익혀서 실천하지 않은 깨달음은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은 그것이 실천으로 옮겨질 때, 그 의미를 온전하게 획득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깨달음은 반쪽짜리 깨달음에 불과하다. 깨달음과 그 실천이 한 몸으로 합일할 때, 그 깨달음은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본질은 망각이다.” 나는 최근에야 비로소 그 본질에 대하여 확고부동한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작심삼일의 망각하는 존재다. 따라서 깨달음은 한 번의 통찰이 아니라 수없는 반복적 실천 속에서 그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서 인류의 스승들은 아는 것을 행하는 지행합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것이다. 깨달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그 깨달음의 내용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그 실천적 함의를 음미해야 한다. 깨달음을 날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반복 실천해야 한다. 그러한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만 깨달음은 온전한 나의 깨달음이 된다. 말하자면 무수한 반복을 통한 좋은 습관과 더불어 좋은 성격의 형성을 통해서만 깨달음은 완성에 이를 수 있다.
공자도 죽기 전에 오른 경지
공자는 70세가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미루어 짐작컨대, 공자는 죽기 2년 전에 완성된 인간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삶의 실천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인간으로서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을 해냈는가! 그런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도 인생 전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작심삼일과 시행착오를 거듭했을까! 나는 생각한다. 공자도 한순간에, 하루아침에 성인이 된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수없는 깨달음과 반복적인 실천을 하나로, 지행합일의 실천, 곧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합일시킨 삶의 최종 결과인 것이다.
사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쉬운 일에 속한다. 어려운 일은 깨달은 바를 날마다 반복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삶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아는 것, 깨달은 것을 실행하는 것,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아는 것, 깨달은 것을 날마다 실천하는 것이 좋은 삶, 성공적인 삶, 잘 사는 삶을 위한 근본 원리다. 우리도 그렇게 언젠가는 공자처럼 될 수도 있다.
김양현(전남대 철학과 교수·유튜브 `철학TV’ 운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