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피리 부는 사나이는 누구인가
[백청일의 독서일기] 33.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로버트 브라우닝, 비룡소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편집자주>.
안전운임제 품목 확대와 일몰제 폐지를 주장하며 나섰던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15일 만에 총파업을 철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애초의 입장을 바꾸어 안전운임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하였고, 이에 공공운수노조가 여의도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머니투데이, 2022.12.11.).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올해 6월 국토부와 화물연대본부가 교섭테이블에 앉아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과 품목 확대 논의를 합의”한 바 있습니다(노동보다, 2022.11.23.). 그런데 연말이 닥치면서 일몰제 종료 시한이 다가오는데도 그동안 정부와 여야, 국회 어디에서도 합의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로 위의 안전은 화물노동자뿐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데도 정부와 정치권 모두 손을 놓고 있었던 거죠.
그럼에도 대통령은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에 “불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며 시멘트 업종에 이어 철강, 석유화학 분야에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면서 노동자들을 위협해 왔습니다(한겨레, 2022.12. 9). 공정거래위원회는 “공정거래법 위반, 명령서 제출 거부, 조사 방해 등으로 화물연대를 고소하겠다”며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켰습니다(광주드림, 2022.12. 9).
심지어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은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연합뉴스, 2022.12. 5)라고 하였고, 정부 또한 화물연대 파업을 “명분 없는 귀족노조의 불법 행위”(시사저널, 2022.12. 9)로 규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정부의 강경 드라이브에 여당은 파업 이후 안전운임제 3년 연장을 추진하다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대통령의 “처벌을 공언한 법치”, “응징의 리더십”에 입을 닫고 있는 겁니다(한겨레, 2022.12. 9).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떠나지 않습니다. 화물노동자뿐 아니라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몰제 폐지와 안전운임제 품목 확대는 무리한 요구였을까.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거처럼, 그렇게, 오롯이, 화주와 운송사의 비용 절감의 희생양이 되어 위험비용을 자신들이 떠안고, 하루 14시간 장시간 노동, 과적, 과속, 졸음운전으로 대한민국의 도로 곳곳을 누비면서 자기 살과 뼈를 깎아 내는 희생을 감당해야 할까. 화물연대의 파업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나아가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북핵만큼 위험할까. 합의를 이행하지 않고 그동안 손 놓고 있던 정부와 정치권의 어떤 자성도 없고, 화주-운송사-차주로 이어지는 구조와 제도의 개선에 대한 논의와 대안 마련도 없는데,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책임져야 할까.
오늘 우리가 맞닥트린 작금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입니다. 필자는 ‘교훈’, ‘대가’, ‘이데올로기’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작품에 대한 간략한 소개
하멜른은 독일의 작은 도시입니다. 중세시대 이곳에서는 민담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를 19세기에 독일의 그림형제와 영국의 로버트 브라우닝이 동화와 시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브라우닝의 시를 영국의 유명한 화가였던 케이트 그리너웨이가 그림을 그려 넣어 출판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피리 부는 사나이, 나무 위키).
어린 시절의 동심을 다시 떠올려 보자는 차원에서 줄거리를 다소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이야기를 사건(또는 장면) 중심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중세 시기 독일의 지방에 있는 작은 도시 하멜른에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답니다. 쥐 때문에 시민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던 거죠. 어느 정도냐면 쥐들이 개와 싸우고, 고양이를 죽이고, 요람의 아기까지 물어뜯고, 보관해 놓은 치즈를 먹어 치우고, 수프를 핥아 먹고, 절인 생선이 든 통을 갉고, 남자들의 모자에도 들어가 살고,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곳에 나타나 시끄럽게 찍찍 거립니다.
시민들이 참다 못해 시청으로 몰려가 소리지릅니다. 심지어 시장과 시의원들에게 우리를 살려 낼 방법을 찾지 못하면 죄다 쫓아버린다고 협박까지 합니다. 시장과 시의원들이 얼마나 벌벌 떨었겠어요. 하지만 오랜 시간 회의를 해도 시장과 시의원들은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덫만 있으면 좋겠다고, 푸념만 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때 한 사나이기 회의실에 들어오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마법으로 쥐떼를 몰아내겠다고 합니다. 자신은 타타르에서는 엄청난 모기 떼를 쫓아 주었고, 인도에서는 흡혁박쥐로부터 사람들을 구했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얼룩 옷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 부른다면서, 천 길더를 주면 쥐떼를 몽땅 없애주겠다고 합니다. 시장과 시의원들이 얼마나 반겼겠어요. 당장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지요.
피리 부는 사나이가 거리로 나서 피리를 불며 걸어가니 놀랍게도 쥐떼들이 그 뒤를 춤을 추면서 따릅니다. 그리고는 딱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베저 강으로 풍덩 뛰어들어 죽어버립니다. 그제서야 시장은 쥐구멍을 막으라고 수선을 떱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는 약속한 천 길더를 주라고 요구하지만, 시장은 말을 바꾸어 오십 길더만 줍니다. 자신을 비웃는 시장에게 피리 부는 사나이는 후회를 할 거라면서 다시 거리로 나가 피리를 붑니다.
피리소리가 퍼지자 집안에서 길거리에서 시내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달려 나와 사나이를 뒤따릅니다. 소리를 지르고 웃음을 터뜨리며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따라갑니다. 베저 강을 지나 코펠 산으로 향하던 사나이를 따라 아이들은 모두 산으로 오릅니다. 다리를 저는 딱 한 아이만 제외하고. 그렇게 하멜른에서 아이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저는 아이가 돌아와 울면서 말합니다. 피리 부는 아저씨가 자신들을 과일 나무가 자라고 꽃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으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고, 그곳에 가면 자신의 다리도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브라우닝이 쓴 시는 전체 15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지막 15연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얘야, 너나 나나 사람들한테 진 빚,
특히 피리 부는 사나이들한테 진 빚은 꼭 갚아야겠지!
사나이들이 피리를 불어 시궁쥐를 없애 주건 생쥐를 없애 주건
우리가 약속한 것이 있으면 그건 반드시 지켜야 한단다!”
교훈은 간단하지요. 약속은 지켜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보다 더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끔찍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건 당연하다 등.
너무도 끔찍한 대가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으면서 했던, 약속을 잘 지키는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겠다, 나중에 커서도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겠다, 하는 생각들을 했던 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능력도 없는 시장과 시의원들에 비해 시민들이 고통 받고 힘들어 하는 쥐떼들을 몰아낸 피리 부는 사나이를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 버전으로 보면, ‘영웅’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거기에 피리를 불어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과일과 꽃이 풍요로운 아름다운 곳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으니, 심지어 다리를 저는 아이에게 다리가 나을 수 있다는 환상까지 심어주었으니, 이런 ‘수퍼 히어로’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쥐떼를 몰아내 주면 천 길더를 주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대가’가 너무 크고도 끔찍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시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라며 한 행위는 바로 `유괴’이니까요.
그런데 어린 아이 한 명이 아니라 자그마치 하멜른의 ‘모든 아이들’입니다. 이것은 법과 선거로 뽑힌 시장의 권력과 재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중세 시대라 해도 시장의 권력 그 어디에도 자신이 다스리는 시의 모든 어린 아이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친구들끼리 보통 우스개소리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고대 함무바리 법전을 인용하면서 서로 치고받는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자신이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건 고대시대에서나 통했던 잔혹한 법이라는 걸 아니까 그러는 거죠. 이와 운율은 비슷하지만 뜻은 전혀 다른 박완서님의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이라는 널리 알려진 동화도 있습니다. 달걀 가지고 장난쳤더라도, 그 달걀에 선한 의도를 담아 갚으라는 의미입니다.
끔찍한 함무라비 법전의 법과 비교해도 피리 부는 사나이의 대가는 너무도 가혹합니다. 그러니 피리 부는 사나이가 한 행위는 대가라고 할 수 없고, 자신에게 약속했던 걸 지키지 않는 시장과 시에 대한 자기 나름의 ‘복수’이자 ‘응징’이었겠죠. 박완서님이 말한 달걀의 의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오늘날 ‘유괴’는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부모님들의 사랑을 악용한 중대한 범죄입니다. 유괴의 경우, 보통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동 폭행, 아동 살해, 아동 성범죄 등 여러 범죄들이 잇따르기도 합니다(유괴, 나무 위키). 범죄에 희생된 어린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겪어야 할 피해와 상처까지 생각하면, 거기에 집단 유괴라니, 어찌 보면 피리 부는 사나이는 살인죄 이상의 큰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감옥에서 종신형도 부족해서 수백 년이나 수천 년을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잔혹함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
어느 나라 동화일지라도 보통 그 안에 담긴 구조와 교훈은 다소 선명합니다. 세계적인 동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요. 어린 아이들의 사고 발달 정도가 복잡한 구조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주제가 선명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이런 전략들을 따르겠지요. 거기에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고(주입시키고) 싶은 교훈을 명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소 끔찍한 장면과 사건, 결과일지라도 기꺼이 집어넣었겠지요.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의 ‘사실 왜곡’과 `부당한 이데올로기’가 담기기도 합니다. 간단한 예시로, 그림형제의 또 다른 작업인 ‘헨젤과 그레텔’이나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을 들 수 있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의 사실 왜곡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선녀와 나무꾼’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산속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은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숨겨주었는데, 그 사슴이 은혜를 갚는다며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는 곳을 일러줍니다. 그곳으로 몰래 가서 선녀들이 입는 날개옷을 하나 훔치면 옷을 잃은 선녀는 하늘로 올라 가지 못하는데, 그 선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라고 합니다. 사슴의 말대로 한 나무꾼은 이후 그 선녀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무꾼은 선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날개옷을 보여주었는데, 선녀는 그 날개옷을 입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제는 자신을 떠나지 않겠지 하며 안심했던 나무꾼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아내이자 선녀가 보고 싶어 슬피 울게 되지요.
동화의 관점이 그러하기에 읽는 독자들 또한 자연스레 나무꾼의 관점으로 읽게 됩니다. 그래서 나무꾼의 상황에 공감하고 슬퍼하면서 선녀를 원망하게 되지요.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지고 생각해 볼까요.
‘날개옷을 잃은 선녀’는 어떠했을까요. 자신의 부모와 가족, 친구들과 이웃, 자신의 세계로부터 강제로 납치당해 나무꾼과 원치 않은 삶을 수십 년 동안이나 살았던 선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왜 읽는 독자들과 사람들은 은혜를 갚은 사슴을 칭송하고 나무꾼의 슬픔에만 공감할까요.
선녀의 입장에서 보면, 사슴은 자신을 납치하라고 방법까지 알려준 ‘알선책’입니다. 나무꾼은 ‘납치범’이지요. 이 같은 끔찍한 사실을 숨긴 채 버젓이 어린 아이들의 동화로 널리 읽혀 지고 있는 이 동화에는 그래서 여성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처벌을 당연시하면서 남성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슬픔에만 공감하게 만드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요.
먼저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간략하게 분석하면, ‘시장’은 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입니다. 시의 골칫거리였던 쥐떼를 몰아낸 ‘피리 부는 사나이’는 그래서 ‘능력자’입니다. ‘대중들’은 무능력한 시장에게는 아우성을 치고 협박을 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피리 부는 사나이가 쥐떼를 몰아낸 후, 자신의 아이들을 유괴했을 때는 `침묵’합니다.
이제 동화의 상징과 은유를 풀어볼 수 있습니다.
시장을 전임 또는 현직 통치자로 볼 때 시장은 ‘무능력한 통치자’입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현직 또는 새로 부임할 통치자로 본다면, 그가 부는 피리 소리는 ‘새로운 정책’과 ‘권력’을 의미하겠지요. 그 새로운 정책과 권력은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큰 상처를 가져다주는 실패한 정책이 되기도 하고, 시민들을 위협하는 `폭력’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대중들의 힘과 침묵은 “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를 나타냅니다. 대중들의 공포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들이 ‘느끼는’ 공포입니다. 대중들은 시장의 무능력에는 항의하고 협박하면서 공포를 ‘만들어내지만’, 피리 부는 사나이의 폭력에는 공포를 ‘느껴’ 입을 다물거나 순종합니다.
이를 정리하면,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통치자의 무능력과 실패한 정책, 폭력적인 권력을 감싸면서, 양가감정처럼 양극단을 왔다갔다 하는 대중들의 공포를 도덕적인 교훈으로 이끄는 겁니다. ‘국가주의적인 향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19세기 영국과 독일의 상황을 고려하면 브라우닝과 그림형제의 의도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정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입니다. 실제로 독일의 여러 문서에서 1284년 6월 26일 130명의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기록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나무 위키’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참고하여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가설’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아이들이 사라진 사건을 당시 독일 젊은이들이 동부를 개척하기 위해 떠난 사실과 연관지어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리 부는 사나이가 베를린 동부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역할을 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지역 문서에서 명시하는 1284년 6월 26일 날짜는 당시 이교도의 한여름 축제 기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교도 샤먼을 상징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한여름 축제에 하멜른 출신의 어린이들을 이끌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당시 지역 가톨릭 분파는 이 지역의 개종을 강력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교도들이 아이들을 학살했거나, 지역 수도원으로 강제로 보냈을 거라고 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는 작업은 계속해서 진행되겠지요. 다만, 이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왔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피리 부는 사나이 ‘pied piper’가 화려한 언변이나 강력한 카리스마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정치인이나 연예인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영어 ‘pied piper’에는 ‘선동가’라는 뜻도 있습니다. 필자가 앞서 피리 부는 사나이를 통치자로 풀어낸 건 이를 참고한 거지요.
동화 속 시장처럼 무능력한 통치자가 당면한 정치, 경제,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선동적인 통치자가 온갖 미사여구로 대중을 선동하고 미혹하여 실시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 시민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책 실패와 통치의 실패를 무능력했고, 돈을 안 준 시장/전임 통치자 때문이라며 자신을 합리화, 정당화하는 건 더 불행합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하멜른 시민들의 안전과 생명, 복지에 대한 생각이 있었을까요. 그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온갖 동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피리 소리로 얻을 수 있는 이익만이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돈을 안 준다며 130명의 아이들을 유괴해 버린 행태를 보면 애초부터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통치자들이 시민들을 위한 거라며 내세우는 선동과 통치 행위가 자신의 무능력함을 가리고 폭력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좀더 나아지는 내일이 되기를
대통령은 이미 대선 후보 시절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노동관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한겨레, 2022. 12. 9). 하지만 대통령에 부임한 이후 6월 화물연대가 파업을 했을 때, “정부는 법과 원칙, 중립성을 가져야만 노사가 자율적으로 자기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역량이 축적돼 나간다고 생각한다”며 “노동에 적대적인 사람은 정치인이 될 수 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한겨레, 2022. 6.10)
그러나 이번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대통령은 강경발언을 쏟아내면서 두 차례의 업무개시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은 ‘정당한’ 사유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어 자의적 권한 행사 여지가 크기에 기본권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성격이 강합니다. 또한 강제 노동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 원칙과 모든 형태의 강요에 의한 노동 철폐 원칙을 명시하고 있는 한-EU FTA에도 위배되는 등 국제법에도 어긋납니다(노동보다, 2022.11.29.).
또한 국제노동기구에서 한국 정부에 보낸 긴급개입 공문에서도 확인되었듯이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노동3권이 보장되는 노동자입니다. 무엇보다 공정위가 운송업계의 `갑’인 화주와 운송사를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시키지 않고, ‘을’인 화물연대 운전기사들을 상대로 조사와 협박을 하고 있기에 직장갑질119는 공정위를 공익침해행위 등의 내용으로 국민권익위원회에 신고하기도 하였습니다(광주드림, 2022.12. 9).
아직, 2022년 12월이 보름여 남았습니다. 이 시간이면 많은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통령과 정부, 여야정치인들 모두 10.29참사로 힘들어하는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목소리에, 대한민국의 화물운송을 책임지고 있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연말연초는 누구의 것도 아니니 우리 모두 아주 조금이라도 좀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부디, ‘국민들을 위해’, ‘나랏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 본문 삽화는 모두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 참고문헌
로버트 브라우닝,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비룡소, 2006.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b, 2007.
유괴, 나무위키
피리 부는 사나이, 나무위키
빈 손으로 끝난 화물연대 총파업 … ‘안전운임제’ 미래는? 머니투데이, 2022.12.11.
`빈손 철회’ 눈물 흘린 화물연대…정부는 ‘총파업 청구서’ 준비, 시사저널, 2022.12. 9.
윤 대통령 `응징의 정치’ … 화물연대 무릎 꿇리기식 대응, 왜, 한겨레, 2022.12. 9.
윤대통령, 화물연대 파업에 “정부가 노사문제 개입하면 안돼”, 한겨레, 2022. 6.10
윤대통령 “화물연대 파업,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 연합뉴스, 2022.12. 5.
윤석열 정부는 ‘업무개시명령’ 철회하라. 화물연대 파업은 안전운임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다, 노동보다, 2022.11.29.
화물연대 투쟁은 정당하다. 국토부는 흑색선전 겁박 말고 대화로 사태해결에 나서라, 노동보다, 2022.11.23.
화물연대 “파업 조사, 공정거래법 위반 협박”, 광주드림, 2022.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