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5·18과 특전사 화해, 진실이 먼저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이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유대인 게토(유대인 거주지)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수행원들도 폴란드 정부 누구도 예상 못 했던 행동. 독일을 대표해 폴란드 국민에게 사과한 역사적인 장면이 탄생한 순간이다.
2차대전을 촉발한 독일로부터 직접 침략당한 폴란드의 가해국에 대한 감정은, 식민지 지배 일본에 대한 한국의 그것처럼 원한이 사무친 지 오래. 이날 브란트가 꿇은 무릎은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한 독일인의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행동도 뒤따랐다. 브란트의 독일은 수십 년간 갈등해온 국경 문제를 폴란드에 양보했다. 2차 대전 종전 후 패전국으로서 획정된 국경 라인에 민감했던 독일은 폴란드와 오랜 기간 대립해 왔지만 이후 고집을 꺾은 것이다.
“폴란드가 독일과 미래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 결정적 계기”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후일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이유에 대해 질문 받은 브란트는 이렇게 답했다.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김연철 저 ‘협상의 전략’ 중)
‘피해 호소자’로 다시 광주에 온 특전사
지난 2월 19일 국립5·18민주묘지. 일요일이었던 이날 오전 9시55분 특전사 동지회 등 20여 명이 이곳을 참배했다. 황일봉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장과 정성국 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 회장 등과 함께 였다.
1980년 5월 계엄군으로 광주에 진주해 수많은 시민을 살상한 그 부대가 피해자들이 묻힌 묘지를 찾아 추도한 것이다. 하지만 논란만 키웠다. 진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그들은 특전사 군복과 군화에 검은 베레모까지, 43년 전 복장 그대로였다.
보다못해 김범태 5·18묘지관리소장이 간곡히 청했다고 한다. “이대로 참배하면 오월영령들이 벌떡 일어날 것이다. 베레모만큼은 벗어달라.” 그 베레모는 스스로 벗은 것이 아니었다.
이날 광주에선 ‘용서와 화해를 위한 대국민 공동선언식’이 예정돼 있었고, 특전사동지회는 이의 일환으로 5·18묘지를 찾았다. ‘5·18과 특전사와 화해’라는 의미가 부각돼 전국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그날이다.
서둘러 묘지 참배를 마친 이들은 같은 날 오후 광주 5·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포용과 화해와 감사’라는 제목의 이벤트를 진행했다.
당초 프로그램엔 군가 ‘검은 베레모’ 제창 순서도 포함돼 있었다. “사과 행보가 맞느냐?”는 성토가 이어졌다. 당일 식순에서 빠진 건 다행이지만, 용서와 화해를 앞세운 이들의 둔감한 감수성이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더 키웠다.
특전사와 화해에 앞장선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황일봉 회장은 “(1980년 5월)당시 특전사 군인들은 계엄 상황하 어쩔 수 없이 상부 명령을 따랐을 뿐”으로 “그들 역시 광주에서의 일로 43년간 고통받아왔다”며 화해를 강조했다.
“광주가 용서해야 이들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도 했다. ‘왜 화해가 먼저냐?’는 물음엔 “용서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의 진실을 고백하면 민형사상 책임 추궁에 직면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렇게 특전사는 다시 광주에 왔다.
1980년 5월 가해자로, 그리고 2023년엔 피해 호소자로….
진짜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속이고 진실은 미궁인데, 특전사는 어떻게 이같은 태세 전환이 가능했을까? 5·18 일부 단체와 특전사동지회의 화해와 포용 행보엔 이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납득할 수 없는 태도 변화, 갖가지 억측과 설이 난무한 배경이다.
‘광주’가 전해 들은 그들의 입장은 “고통당하지 않게 해달라. 그러면 증언하겠다”는 것 외에 달리 기억나는 게 없다.
진실 고백엔 고통이, 그래야 가능한 화해
‘진실과 화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가 있다.
‘마디바’(‘존경받는 어른’이란 의미) 만델라가 인종차별정책 반대 투쟁을 벌이다 백인 정권에 의해 수감된 게 44세(1962년). 국가반역죄라는 명목으로 27년간 복역한 그가 석방(1990년)후 남아공 대통령이 된 게 1994년 4월이다, 그는 인종차별정책이 남긴 증오와 폭력이 너무 깊은 나라를 물려받았다.
이때 만델라가 내세운 게 진실화해위원회다. ‘진실을 고백하면 사면해주겠다’는 것. 인종차별정책에 앞장서 폭력을 행사했던 경찰들이 처벌받지 않을 길을 열어준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확립된 국제사회의 질서, 이른바 뉘른베르크 모델을 배제한 결단이었다. ‘상부의 명령이었더라도 반인륜적 범죄라면 처벌할 수 있다’는 게 당시의 국제 질서였다.
진실과 화해, 과정은 이름만큼 아름답거나 간단치 않았다. 조건이 엄격했다. 정치적 목적에 한정된 범죄 행위만 대상이었으니, 사적인 이득을 취했거나 개인간 원한과 복수로 인한 범죄행위는 제외했다.
둘째가 중요한데,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행위를 충분히 공개해야 했다. 남아공에선 청문회를 열어 이들을 증언대에 세웠다. 120여 차례 열린 청문회에서 4000여 명이 증언했다는 게 당시 기록이다.
진실을 대면하는 데는 고통이 수반된다. 고백하는 이도, 받아들이는 이도 마찬가지.
집에선 믿음직한 가장, 자상한 아빠였던 이가 어느 날 TV에서 살인과 고문의 죄를 고백할 때, 가해자의 수많은 가정이 파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생사조차 몰랐던 가족의 비극적 말로가 밝혀지면서 피해자들 역시 충격에 빠졌다.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요구가 절절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국가가 강요한 용서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진실 고백에 고통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이 같은 화해가 가능했을까?
채정희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