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타자화
[백청일의 독서일기](40)타인의 방, 최인호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시범사업과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2022년 한국의 출산합계율은 0.78명입니다. 정부는 그 동안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주택자금 또는 전세자금 일부 지원 또는 탕감, 자녀 셋 낳은 아빠에게 병역 면제 방안 등을 발표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검토한 후 시범사업 실시한다고 발표한 정책이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입니다(오마이뉴스 2023. 5.19).
이 방안은 2022년 9월 오세훈 서울시장과 2023년 3월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이 발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안과 정책은 심각한 여러 문제들을 안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2022년 6월부터 가사근로자법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 법은 “국적에 상관없이 가정에서 돌봄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와 똑같이 대우받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그런데 조 의원 등이 발의한 내용은 가사근로자법을 고쳐, 외국인 가사노동자에게 최저임금법 적용을 제외하는 안을 담고 있습니다(한겨레 2023. 3.27).
대통령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비교 검토하라고 제시한 국가들이 싱가포르, 홍콩, 대만입니다. 그런데 각각 1978년과 1974년 외국인 가사인력 제도를 도입한 싱가포르와 홍콩에서는 임금체불과, 수수료 갈취, 폭언, 폭력, 심지어 성폭행까지 발생하는 등 심각한 인권 침해가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경향신문 뉴스레터, 2023. 8.11). 무엇보다 제도를 도입한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 합계출생률과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유의미하게 증가하지 않았다고 하지요(한겨레 2023. 5.25).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OECD 국가 중 외국인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는 나라는 없다고 합니다. “가사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정책은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입니다(경향신문 뉴스레터, 2023. 8.11).
저출산의 문제는 저임금과 외국인노동자가 핵심도 아닐뿐더러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도 없겠지요. 양성 평등과 함께 가사와 돌봄의 권리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노동조건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최인호의 ‘타인의 방’(1971년, 문학과 지성, 봄호)을 다루려고 합니다. ‘타인의 방’은 “도시의 일상생활에서 겪는 현대인의 소외와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작품(위키백과)”, “‘그’라는 주인공의 의식세계를 통하여 삶에 내재한 개인적 고독 내지는 단절된 현대적 삶의 의미를 보여주며, 이를 하루 저녁의 생활을 통하여 적절히 서사화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한국 현대문학의 여러 유명한 작품들은 고등 수능시험 문학 영역에도 나오기 때문에 한두 페이지로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들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의 극단적인 소외 현상”,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현대인의 실존문제”,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현대인, 방에서 나가야 해결” 등 여러 평가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 다르게 ‘아내의 부재’와 ‘타자화’, ‘여인/타자의 귀환’에 초점을 맞춰 작품을 풀어볼까 합니다.
‘거리’에서 ‘방’으로
“그는 방금 거리에서 돌아왔다. 너무 피로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아파트 계단을 천천히 올라서 자기 방까지 왔다. 그는 운수 좋게도 방까지 오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했었고 아파트 복도에도 사람은 없었다. 어디선가 시금치 끓이는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더듬어 문 앞에 프레스라고 쓰인 신문 투입구 안쪽의 초인종을 가볍게 두어 번 눌렀다. 그리고 이미 갈라진 혓바닥에 아린 감각만을 주어 오던 담배 꽁초를 잘 닦아 반들거리는 복도에 던져 버렸다. 그는 아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문을 열어 주기를, 문을 열고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를 맞아 주기를,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댕기었는데도 방 안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그는 다시 그 작은 철제 아가리 속에 손을 넣어 탄력감 있는 초인종을 신경질적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손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그는 또 기다리기 시작했다.”
작품의 도입부를 다소 길게 인용해 보았습니다. 아주 짧은 소설인데다 갈등 구조가 이분법적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 작품인데, 이를 도입부에서부터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입부는 작품의 특징이 ‘거리’-‘방’의 두 개의 대립하는 세계와 ‘그(아내)’-‘타자’의 대립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거리의 세계’는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일을 하는 세계이기에 그를 “쓰러져 버릴” 정도로 “피로”하게 만듭니다. 거리의 세계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그가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복도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걸 “운수 좋”은 걸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방의 세계’는 ‘아내’가 “다소 호들갑을 떨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가하는 자신을 맞이해 주는 아늑한 공간입니다. 그가 아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이 방의 세계를 위해 거리에서 헌신했으니 집에 돌아오는 자신을 아내가 최상급의 표정과 행동으로 자신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본인이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인종을 눌러 아내가 방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방 안쪽에서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는 결코 열쇠를 꽂고 스스로 방문을 열지 않습니다. 신경질이 나도 “손 끝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아늑한 공간인 ‘방의 세계’에 존재하는 아내는 결코 거리의 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타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아내는 그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의 존재와 인격을 존중해 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연인 사이라도, 평생을 약속한 부부 사이라도, 자신의 신장 한쪽을 기증할 수 있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공동체나 조직 생활에서, 커뮤니티나 동아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형님/언니, 동생 하면서 허물없이 지낸다 해도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으려고 서로 노력하게 됩니다. 친하게 지낸다는 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과 결코 동의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선의’가 절대 ‘권리’일 수는 없는 법이지요.
작품의 도입부에서 보이는 그의 행동은 그와 아내 사이의 ‘거리’와 서로 지켜야 할 ‘선’이 희미해졌거나 사라지고 없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아내는 ‘타자’의 자리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타자로서의 가치, ‘타자의 값’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아내의 관계는 ‘그-아내’가 아닌, ‘그=아내’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생각과 의도대로 따르고 행해야 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또 다른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거리와 대립되는 ‘방의 세계’는 ‘나’와 ‘아내’, 자아와 타자라는 두 존재가 만들어가는 세계가 아닌, 내가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나만의 세계’에 타자인 아내는 따르고 순종해야 할 존재로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는 보통 이를 ‘동일성의 세계’라고 합니다. 아내 또한 타자로서가 아닌, 나에 의해 왜곡되고 변형된 존재로서 ‘대상화’, ‘타자화’된 존재라고 하지요.
‘아내’의 부재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화가 나서 투덜거리며” 열쇠를 꺼내들고 방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땅히 존재해야 할 아내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지릅니다. “여보.” 하고. 그런데도 아내의 응답이 없습니다. 대신 화장대 위에 쪽지가 놓여 있는 걸 발견합니다.
“여보, 오늘 아침 전보가 왔는데, 친정 아버님이 위독하시다는 거예요. 잠깐 다녀오겠어요. 당신은 피로하실 테니 제가 출장 가신 것을 잘 말씀드리겠어요. 편히 쉬세요. 밥상은 부엌에 차려 놨어요.…당신의 아내가.“
그가 얼마나 “울분에 차서 한숨을 쉬”며 “화를 내”었을지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코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와 바지를 벗”고 그는 “아주 화를 내면서” 옷장 속에 옷들을 겁니다. 이런 일들은 마땅히 아내가 도와서 해야 하고, 마땅히 아내의 일이었는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욕을 퍼부으면서도 “겨우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니”, 하며 심한 고독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일단 뭐라도 먹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화가 더 납니다.
“그는 우선 배가 고팠으므로 부엌 쪽으로 갔는데, 상 위에는 밥 대신 빵 몇 조각이 굳어서 종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무슨 고무질을 씹는 기분으로 차고 축축한 음식물을 삼켰다. / 이건 좀 너무한 편인걸. / 그는 쉴새없이 투덜거렸다. 그는 마땅히 더운 음식으로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그뿐인가. 정리된 실내에서 파이프를 피워 물고, 음악을 들어야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운수 나쁘게도 오늘 밤 혼자인 것이다.“
신문을 보려고 사방을 훑어 보아도 신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계를 보니 일주일 전 날짜로 죽어 있습니다. 바늘을 돌려 시계를 고치다 시계를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습니다. 욕실에 들어가보니 청소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아내의 게으름을 거리의 창녀에게보다도 더 심한 욕으로 힐책”합니다.
“그는 화를 내었다. 그는 우울하게 서서 엄청난 무력감이 발끝에서부터 자기를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으며 욕실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우송되는 소포처럼 우표가 붙여진 채 부옇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는 거울에 무엇인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세계에서 낯설음을 경험하다
그는 거울에 껌이 붙어 있는 걸 발견합니다. 아내는 밥 먹을 때나 목욕할 때 밥상 위나 거울 위에 껌을 붙여 놓곤 했습니다. 나중에 송두리째 뜯어내어 다시 씹으려는 치밀한 계산 하에 타액을 충분히 적셔 놓은 채. 그는 낄낄거리며 웃고는 껌을 떼어 입에 넣고는 씹어 봅니다. “아내의 껌이 그를 유일하게 위안”해 줍니다.
아내가 씹던 껌은 아내를 상징하는 대상이자 아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의 부재로 화가 잔뜩 나 있던 상황에서 아내가 씹던 거울에 붙여진 껌을 발견하고 떼어 내 씹으면서 느꼈던 그의 감정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저녁식사와 여러 서비스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아내의 껌을 통해 아내와의 일체감(동일성)을 느꼈겠지요. “그래서 그는 한결 유쾌해졌고 때문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물건을 통해 행복함을 느끼는 건 욕실 거울 앞에 놓여 있는 확대경을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확대경은 아내가 겨드랑이의 털이나 코밑의 솜털을 제거할 때 사용하는 겁니다. 그는 아내의 확대경을 통해 형광등 불빛을 한 곳에 모으려 “뜨거운 열기를 집중시키려고 땀을 흘리”다 지난 여름날의 하지를 느낍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행복했다는 걸 느끼고 입 밖으로 행복했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아내의 확대경은 아내와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고 느끼게 하는 매개이자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만드는 소설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는 그것을 들고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가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었다.”
거울을 통해 자기를 보는데 왜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었을까요? 그리고 자신의 모습은 왜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의 모습으로 보였을까요? 여기에 그가 껌을 씹으면서 유쾌하게 노래를 부르는 노래 가사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르는 노랫말의 의미를 알고 부르는 걸까요?
“나뭇잎에 놀던 새여. 왜 그런지 알 수 없네. / 낸들 그대를 어찌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
그는 나중에 고독감을 느끼며 거실에서 술을 한 잔 하다 ”술기운이 그를 달아오르게 하고 그를 격려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를 보면 그는 기분이 좋을 때 무의식적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래 가사가 아내의 부재 상황과 맞물려 있는 걸 고려해 보면, 이는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하는 정교한 소설적 장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내가 씹던 ‘껌’과 아내의 ‘확대경’과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노래’.
세 가지는 작품의 주제를 보여주고 풀어내는 장치 역할을 합니다. 출장 다녀온 후 아내가 부재한 집이었지만, 아내가 씹던 껌을 발견하고 그걸 씹으면서 그는 잠깐의 위로와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면적으로 그가 평소 아내를 껌 씹듯이 대해왔기에 아내의 분신인 껌을 씹으면서 즐거웠을 거라고 읽는 건 그리 무리는 아니라고 보여지기는 합니다.
하지만 거리의 세계와 대립되는 방의 세계는 그가 대상화하고 타자화한 아내가 있을 때에만 완성되는 세계라고 읽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그러니 경쟁과 일로 피로함을 주는 바깥 세계와 달리 방의 세계는 그를 위해 아내가 준비하고 실행하는 온갖 것들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아내의 부재 상황에서 아내의 분신인 껌을 떼어내 씹으면서 터져 나오는 화와 욕지거리들을 대리만족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확대경은 아내의 미용 전용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가 확대경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 보았을 때 “뚜렷한 형상을 가지지 않은 사내가 이상하게 부풀어서 확대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얼굴 모양이 아니라는 거지요. 날마다 욕실에서 면도를 하면서 거울을 보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거울을 볼 거니 누구보다 자신의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을 텐데요.
이러한 표현은 아내의 물건으로 비쳐 보는 자신의 얼굴, 즉 아내를 통해 보여지는 자신의 얼굴 모습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낯설음을 경험하는 순간은 방이라는 그의 세계가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다는 신호이겠지요. 균열은 이미 그 이전부터 진행되었겠지만, 이제야 그걸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봐야겠지요. 진실과 대면하는 시간은 언제나 인정하기 싫고 회피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가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새를 아내와 유비시킬 수 있습니다. 나뭇잎에서 놀던 새와 방에서 일하던 아내로. 자유롭게 지저귀던 새도 하물며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으니, “낸들 그대를 어찌하리. 내가 싫으면 떠나가야지”라며 노래합니다. 그런데 방에서 지내던 아내는 새처럼 자유로웠을까요? 그렇지 않았겠지요.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새가 떠난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아내가 부재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겠지요. 붕괴를 향한, 세계의 균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타인의 소리로 가득한 방
그러나 독자들은 이해하는데, ‘그’만 이러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아내의 확대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뚜렷하지도 않고, 이상하게 부풀었어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타자를 대상화, 타자화하면 그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이해 또한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가 겪은 방 안에서의 경험은 그대로 낯선 것, 타자의 것들이 됩니다.
“역시 집이란 즐겁고 아늑한 곳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무심코 중얼거렸지만 그는 순간 그 소리를 타인의 소리처럼 느꼈으며 그래서 놀란 나머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개의치 않기로 하였다. …. 그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욕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 그러자 이번엔 부엌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는 엄청난 고독감을 느낀다. / “누구요.” / 그는 조심스럽게 소리를 지른다. 그의 목소리는 진폭이 짧게 차단된다. 그는 갇혀 있음을 의식한다.”
“타인의 소리”는 이내 심화되어 소켓, 트랜지스터, 크레용, 옷들, 혁대, 성냥개비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허공을 떠돌아다니며 춤을 춥니다. 자기의 세계가 붕괴되고 있음을 작가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의 세계가, 동일성의 세계가 타인의 소리와 타자들이 돌아다니며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다리 부분이 경직해 오는 것을” 서서히 느끼더니 이내 “온몸이 굳어 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방에서 도망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아내’가 아닌 ‘여인’, 타자의 귀환
“다음다음 날 오후쯤 한 여인이 이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방 안에 누군가가 침입한 흔적을 발견했다. …. / 그러나 그는 곧 잃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이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 며칠 동안은 먼지도 털고 좀 뭣하긴 하지만 키스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중엔 별 소용이 닿지 않는 물건임을 알아차렸고 싫증이 났으므로 그 물건을 다락 잡동사니 속에 처넣어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그 방을 떠나기로 작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다.”
결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건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이 아내가 아닌 “한 여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여인은 ‘그’의 아내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여인”일까요?
‘그’가 만든 ‘방의 세계’는 이미 붕괴되었고, 그는 이미 사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전까지 맺어왔던 ‘그-아내’ 관계는 사라지고 ‘그=사물’ / ‘아내-여인’으로 변화된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돌아온 타자로서의 가치를 지닌 여인이 방을 나가면서 남긴 메모 내용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처음에 남편이 보라고 썼던 메모와 똑같으니까요. 메모 내용이 거짓이라는 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똑같은 메모를 쓰고 있으니, 남편을 속이는 뻔한 거짓말입니다.
초현실주의적 문학 기법들로 펼쳐진 소설 세계를 현실로 끌어 내려 보면, ‘그-아내’ 관계가 ‘사물-타자’ 관계로 변했다는 건, 겉으로는 ‘부부’이지만, 속으로는 이미 ‘남남’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요.
타자의 귀환은 항상 충격적입니다. ‘나만 주체’라는 사람과 집단, 정당, 민족, 인종, 국가들은 다른 존재들을 폭력적인 말과 행동으로 공격하고 정복해 왔습니다. 오로지 ‘나’와 ‘우리’만(이때의 ‘우리’ 안에는 타자는 없고 나와 동일시된 타자만 있겠지요) 항상 옳고, 선하며, 진실을 말합니다. 상대방은 무조건 나만 따르거나 나에게 복종과 순종을 해야 한다고 설파합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아내와 여성들이, 장애인들이,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이 조금의 문제제제기를 하고 벽에 막혀 집단행동을 하면,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된다고 천하태평이거나 마치 큰일이 나는 거처럼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양극단을 오가는 행보를 보이는 거겠지요.
자기 세계의 범위 안에서만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니 타자라는 존재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가 없는 거지요. 자아든, 타자든, 좌파든, 우파든, 흔들거리는 위기 속에서 자신과 상대와 주변 상황과 조건들을 면밀히 돌아보고 성찰하면서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건 당연하겠지요.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어느 한 사람의 희생만으로 유지되거나 이해될 수 없습니다. 부모 양쪽의 노력과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국가와 기업, 공동체 모두의 노력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조건과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겠지요. 그런 점에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급하는 건 그야말로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가려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겠지요.
정부의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정책을 ‘돌려막기’라고 비판한 어느 누리꾼의 말을 인용하는 걸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가슴 아픈 지적이면서도 생각거리가 많아집니다.
“부모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라날 아이는 행복할까요?”(경향신문 2023. 8.11).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고용부 “외국인 가사노동자, 거부감 적은 국가부터”, 한겨레 2023. 5.25.
반값 외국인 가사 노동자 도입, 답이 아닙니다, 오마이뉴스 2023. 5.19.
“가사노동자 100만원짜리 식모 된 기분 … 평가절하에 분노”, 한겨레 2023. 3.27.
외국인이 출생률을 구할까?, 경향신문 뉴스레터 2023. 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