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백청일의 독서일기](44)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리얼 판 코헤이/사계절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휠체어를 탄 채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 장애인들, 이들을 막으려는 경찰들. 바쁜 출근길이 아수라장이 됩니다. 한 번씩 방송에 나오는 장면으로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싸우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방송에 나온다고도 하고, 시민들의 발을 볼모로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은 “장애인에게도 시민권을!”(전장연 보도자료, 2023.12.21) 구호를 외치며 지하철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장연이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며 싸워온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2005), 장애인 차별 금지법(2008)이 만들어졌고, 장애인도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이전보다 분명 좋아진 거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20년이 넘는 동안 계속 싸우고 있는 걸까요? 이들은 왜 지하철을 주요 대상으로 싸우는 걸까요?
비장애인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도 집을 나서 이동을 해야 ‘일’을 하거나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택시 잡기는 어렵고, 저상버스는 낮은 보급률로 탈 수 없고, 전용차 또한 부족합니다. 휠체어를 탄 채 시외버스를 탈 수도 없고, 비행기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지하철역 리프트를 타거나 휠체어 리프트를 타야 하는데 이들을 이용하다 떨어져 중상이나 사망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광주드림, 2023.11.3).
전장연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도 이동해야 교육받고 교육받아야 노동한다”면서 장애인의 광역 이동을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이 증액되어야 하는데, 국회 상임위에서 여야가 합의한 특별교통수단 증액분만 보장된다면 출근길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고까지 발표하였습니다(JTBC, 2023.12.4)
그리고 지하철 탑승 시위를 유보하고 지하철 승강장이 아닌 개찰구 밖 대합실로 시위 장소를 바꾸면서까지 침묵 시위를 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경찰은 철도법 위반, 퇴거 명령에 불응한다며 전장연 활동가들을 계속하여 체포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집회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연합뉴스, 2023.12.18.).
연말인데 장애인 관련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장애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고 미스테리하다고 알려진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를 배경으로 풀어낸 청소년 장편 역사소설입니다. 작가 리얼 판 코헤이는 그동안 화가들과 평론가들, 관객들조차 주목하지 않았던 한 등장인물에 주목하고 있는데, 바로 난장이가 발로 밟고 있는 ‘개’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참신한데, 세상에, 그 개가 원래는 사람이었다니, 그것도 장애인이었다니. 벌써 흥미가 동합니다.
장애인 바르톨로메를 들키지 않고 글공부 시키려는 가족들과 재능을 알아보고 화가로 키우려는 궁정화가와 제자, 조수들의 사랑과 헌신, 진심 어린 배려, 그럼에도 바르톨로메는 그림뿐 아니라 역사 그 어디에도 자신의 모습과 이름을 드러낼 수 없다는 슬픔과 비애, 이를 중심으로 당대의 역사, 미술사, 미술, 르네상스 시기 화가들이 조직한 길드, 시대의 변화상까지 읽다 보면 이야기할 거리가 참 많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분량상 바르톨로메의 변화가 주는 의미에 주목하여 서술하고자 합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에 얽힌 비밀
이 작품을 대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많은 등장인물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렇게나 많은 인물을 배치해 놓은 구도가 참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궁중화가들이 주로 왕과 왕의 가족들을 그리는 게 익숙한 전통이었다면, 이 그림은 일단 그 기본 전통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습니다.
중심인물이 공주인가 하면, 주변 인물들이 모두 저마다의 개성과 시선을 취하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를 모델로 그렸다던데 하면, 이들은 화면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겨우 공주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모습 정도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왕과 왕비보다 더 중요하게 전면에 내 세운 인물이 공주까지는 이해해도, 그 외의 인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왕족도 아니고, 신하도 아닌, 하녀들과 심지어 공주의 장난감 취급을 받던 난장이들까지 등장시켰으니, 당대의 왕인 펠리페 4세가 이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한 것도 신기합니다. 거기에 그림의 맨 앞에는 왕의 충실한 사냥개가 떡 버티고 앉아 있습니다.
‘시녀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페인 화가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 출간한 스페인화가들의 연대기 중 ‘시녀들’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팔로미노는 벨라스케스와 친분이 있던 궁정 인사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글을 작성하였다고 합니다(시녀들(라스 메니나스), 네이버 지식백과(미술백과)). (그림과 관련한 내용은 인터넷에 자세하게 설명된 자료들이 많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저자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난장이가 발로 밟고 있는 개를 당대 천시받던 장애인이었다는 참신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덧붙였습니다. 더 나아가 작가는 이 그림을 그린 벨라스케스가 실은, 개에게서 자신을 밟고 있는 난장이의 발을 기꺼이 감당해내고 있는 ‘힘’이 느껴지도록 그려내었다는 감동스런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작품을 읽고 나면 실제로 그렇게도 보이니 가히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게도 됩니다.
바르톨로메, 가족을 따라 마드리드에 정착하다
바르톨로메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곱사등에 다리는 짧고 가느다랬으며 발은 진흙덩어리를 뭉쳐 놓은 듯 작고 뭉툭했습니다. 발가락들도 심하게 뒤틀려 있어 걸을 때면 힘이 들어 휘청거렸으니 뛰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에 비해 팔은 다리와 곱사등에 비해 무척 길었기에 손을 땅에 짚고 걸으면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바르톨로메는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움직였습니다.
어머니 이사벨은 바르톨로메가 기어다니는 걸 볼 때마다 “넌 짐승이 아냐! 너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야! 알겠니?” 하고 매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바르톨레메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르톨로메는 어머니의 말이 맞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형제자매들과 똑같지 않았으니까.
바르톨로메는 10살인데 그에게는 형제자매가 많습니다. 후안나(14), 호아킨(13), 베아트리스(6), 마누엘(1)이니 위로 누나와 형이 있고, 아래로 두 명의 동생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후안은 시골 출신이면서 출세욕이 강합니다.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은 가까운 소도시로 나가 날품팔이를 하며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는 정도입니다. 부유한 대지주의 집이나 귀족의 장원에서 일하는 게 보통이지요.
그런데 아버지인 후안은 마을 가까운 소도시보다 더 먼 수도 마드리드까지 갈 용기를 내었고 왕실 마구간 머슴으로 일했습니다. 말 다루는 솜씨가 좋았던 후안은 마구간 감독의 눈에 띄어 마부로 승진되었는데, 펠리페 4세가 궁 밖으로 출타할 때 마차를 끄는 마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마르가리타 공주의 마부를 하고 있으니 고향 마을에서 후안은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자신들과 똑같은 옷차림에 터벅터벅 걸어 고향을 방문해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귀족 대하듯 해 왔습니다.
일도 힘든 데다 집에 한 번씩 오려면 사흘이나 시간을 내야 했고, 그 노정도 힘들었기에 후안은 집에 자주 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후안이 어느 날 수레와 당나귀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드리드로 이사를 하려고. 후안의 성실함을 높이 산 시종관이 후안에게 가족을 데려와도 좋다고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모두 들떠하며 좋아합니다.
하지만 후안은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경하게 바르톨로메를 고향 친구에게 맡겨두려고 합니다. 장애인이 도시에서 병신 취급 받으며 교회 앞에서 구걸하며 발길질 당하고 놀림 받는 걸 익히 잘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자신들도 늙고 병들면 돌볼 사람도 없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를 몰래 듣고 있던 바르톨로메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떼를 씁니다. 결국 후안은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되고, 집 밖으로 나가서도 안 되고, 집에 손님이 오면 골방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바르톨로메를 데리고 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출발할 때부터 후안은 바르톨로메를 마차의 나무 궤짝 안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벗어날 때만 밖으로 꺼내 궤짝들 사이에 앉게 합니다. 약속 지키기는 마을을 출발할 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까.
온 가족이 땡볕이 내리쬐는 길을 하루 종일 걸어 기진맥진한 채로 한밤중 물방앗간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바르톨로메는 다시 궤짝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바르톨로메는 물방앗간이 밤하늘 속에서 오히려 하얗게 빛나고 있는 걸 느낍니다. 그런 느낌을 가슴에 담은 채 궤짝 안으로 다시 기어들어갑니다. 하룻밤을 지나고 다음 날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강행군을 하는 일이 반복되고 사흘째 되어서야 후안네 가족은 비로소 마드리드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바르톨로메, 서기의 꿈이 좌절되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하루 종일 도시를 쏘다니며 경험했던 신기한 걸 모두 이야기하는 저녁이 되어서야 바르톨로메는 작은 골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을 수 있습니다. 제빵 기술을 배우던 호아킨은 어느 날 바르톨로메처럼 난쟁이인데 가마를 타고 윤이 나는 검은 비단옷을 입은 엘 프리모, 왕의 편지와 서류들을 대신 써 주는 왕 서기를 본 걸 이야기해 줍니다. 그날부터 바르톨로메는 서기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형인 호아킨은 바르톨로메가 글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누나인 후안나와 궁리를 한 끝에 마침내 호아킨은 수도원을 찾아가 크리스토발 수사에게 동생에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들은 걔를 난쟁이, 병신, 기형아”라고 놀리지만 “어쨌든 제 동생이에요. 영리하고 배우는 것도 빨라요”라며. 그리고 수사가 동생을 가르치는 동안 수도원 정원일을 하며 양초 봉헌을 하기로 약속합니다.
후안나와 호아킨은 어머니 이사벨에게 이를 털어놓습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빨래통에 바르톨로메를 담아 두 사람이 직접 들고 수도원으로 가겠다고. 그러나 이사벨은 남편인 후안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알게 되었을 때 발생할 폭력이 공포스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을 배우고 싶다는 바르톨로메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는 허락을 하고 말지요. 아버지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글자를 배우더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늘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결국 바르톨로메는 어머니에게 책을 사달라고 합니다. 누나인 후안나는 어머니가 자신에게 혼인할 때 물려주려고 한 반지를 기꺼이 전당포에 맡기자고 합니다. 그 돈으로 책을 빌려볼 수 있다고. 그렇게 자신의 꿈을 키우던 바르톨로메에게 호아킨이 취직을 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신을 빨래통에 숨겨 수도원으로 이동시킬 사람이 없어지게 된 겁니다.
세상 끝난 거처럼 낙담하고 있던 바르톨로메를 위해 후안나는 같은 건물의 로시타 부인에게 부탁해 빨래를 하러 가는데 딸 헤로니마를 데리고 가겠다고 합니다. 헤로니마는 스무 살 처녀이지만 네 살 아이처럼 순진한 행동을 합니다. 하루 종일 난로 옆에만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니, 로시타 부인도, 헤로니마 본인도 아주 좋아합니다. 그렇게 스무 살 처녀인 헤로니마가 바르톨로메가 든 빨래통을 메게 됩니다. 빨래 하러 가는 도중에 잠깐 수도원에 들를 일이 있다며 얼른 수도원에 바르톨로메를 내려줍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만 사고가 납니다. 기분이 좋은 헤로니마가 주체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골목길을 달려가고 후안나는 그 뒤를 쫓아가기 바쁠 때, 갑자기 반대편 골목에서 아버지 후안이 공주를 모시고 끌고 오던 마차가 튀어나옵니다. 말들과 부딪힐 뻔했던 헤로니마는 당황해 도망쳐 버리고 벗겨진 빨래통은 비탈진 골목을 굴러 내려가더니 마침내 벽에 부딪혀 박살이 납니다. 놀란 말들을 후안이 급히 진정시키지만 공주가 무슨 일인지 밖을 내다보는 그때, 빨래통 조각들과 빨래감을 헤집고 기어나오는 바르톨로메.
후안과 후안나가 얼마나 놀랐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저 밑에 이상한 게 앉아 있어. 생긴 건 사람 같은데 하는 짓은 꼭 개 같아. 저 인간개를 갖고 놀고 싶어. 저걸 갖고 오라고 해!” 공주의 이 한마디 말로 모든 게 결정되어버립니다. 바르톨로메는 더 이상 서기의 꿈을 꿀 수 없고, 공주의 장난감 인간개로 살아야 할 운명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스승이 그린 “인간개”의 의미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는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4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다섯 살 마르가리타 공주가 있는데, 공주에게는 동물과 난쟁이들로 이루어진 동물 오락단이 있습니다. 바르톨로메는 그곳에 배치되어 인간개로 분장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물감으로 분장을 해야 했던 바르톨로메는 궁정화가 벨라스케스의 제자와 조수들을 만나서 알고 지내게 됩니다.
조수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 데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낙담해 있는 바르톨로메에게 조수인 안드레스가 초벌칠을 한 목판과 팔레트, 낡은 붓을 가져다주며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라고 합니다. 안드레스가 말해 준 “빛의 포착”을 가슴 깊이 새기며 고향을 떠나면서 머물렀던 한밤중 물방앗간의 풍경을 그리는데, 어느새 안드레스와 제자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처음인데, 재능이 있는 걸 조수들이 알아본 겁니다.
그 순간 벨라스케스의 제자 파레하가 국왕과 스승이 급히 이곳으로 온다고 알립니다. 그곳에서 펠리페 4세는 “어린 공주가 시종들을 이끌고 방금 부모의 초상화를 그린 화방에 들르는 장면을 화폭에 담겠다”는 벨라스케스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대만족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그려가던 벨라스케스는 우스꽝스럽게 의상을 입은 불구 아이가 개처럼 길게 누운 모습을 도저히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공주만 아니었더라면. 결국 그림을 지우게 되는데, 조수인 안드레스가 대스승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왕이면 바르톨로메를 충직한 개로 그려달라고. 바르톨로메는 무척 용감한 아이라고. 결국 결심을 굳힌 벨라스케스는 개를 다 그린 후 그림을 보려 하지 않는 바르톨로메에게 한 마디 합니다.
“화가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것을 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 넌 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너를 공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그릴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너의 내면을 보았고, 폐하의 애견 주피터 속에 너의 내면을 집어넣었다. 자, 여길 봐라. 개의 힘이 느껴지지 않니? 이게 바로 너의 힘이다!”
그림을 보고 희미하게 웃음 짓던 바르톨로메는 머릿속이 환해지면서 대스승의 말뜻을 깨닫게 됩니다. 개의 힘을 느낀 거지요. 난쟁이가 개를 지배하는 게 아닌, 오히려 개가 난쟁이 니콜라시토의 콧대 높은 자세를 의연하게 참아내고 있다고.
그 순간 바르톨로메의 머리에 번개가 내려치듯 하나의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자신이 처음 그린 그림을 보고 모두 놀라워했지만, 벨라스케스의 제자인 파레하가 왜 한밤중인데 물방앗간을 하얗게 그렸는지 물어보았을 때 대답을 하지 못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에 대한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바르톨로메는 파레하에게 외칩니다. 생각났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하던 벨라스케스에게 제자인 파레하가 바르톨로메가 그린 그림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림을 보던 벨라스케스도 놀랍니다. 자신이 말한 내면을 보는 능력과 힘이 이 그림으로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르톨로메가 이제는 조수들과 파레하뿐 아니라 궁정화가이자 대스승인 벨라스케스에게서도 인정을 받는 장면입니다.
“기나긴 하루의 목적지였기 때문이에요. 제 아버지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이 곳에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뙤약볕 아래에서 우리가 너무 천천히 걸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어두워져 있었어요. 그래도 지금 제 기억 속에는 물방앗간이 진회색보다는 흰색으로 남아 있어요. 마치 한낮의 햇빛을 오래 품은 채 지친 나그네에게 편하게 밤을 쉬어 가라고 손짓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죠.”
현실에서는 여전히 멀리 있는, 장애인 이동권
공주의 눈 밖에 난 바르톨로메의 처지를 어떻게 할 건지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파레하는 스승 벨라스케스에게 바르톨로메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허락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함부로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흑인인 파레하를 모래바닥에 그렸던 그림을 보고 재능이 아까워 제자로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제자가 화가조합에도 들 수 없었고, 어떤 그림에도 자신의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스승인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파레하가 자신보다 더 못한 바르톨로메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니.
한참을 침묵하던 벨라스케스가 한마디 합니다. “저 아이가 앞으로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걸 이해한다면 허락하겠다.” 이어지는 파레하와 바르톨로메의 대화는 참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입니다. 감동스런 대단원이지요.
“잘 들어라, 바르톨로메. 너는 절대 화가가 될 수 없다. 여기 있는 안드레스와 레온과는 애초에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라. 우리 같은 흑인이나 노예, 난쟁이들은 사회 주변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조합이나 단체에 가입할 수도 없고, 출세나 성공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고 이 사회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는 한 그저 우리를 참아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파레하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이제껏 제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던 과거보다는 백배 더 나아요. 저는 화가가 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던 시대였음에도, 가족들은 모두 바르톨로메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자신의 많은 걸 쏟아 부었습니다. 수많은 제약 속에서도 궁정의 화가와 조수들은 능력의 빛을 보여준 바르톨로메를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분차별이 심했던 중세시대인데도 가족애를 바탕으로 신분과 계급, 인종, 장애를 뛰어넘는 작품의 결말은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오늘날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애인의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한 거처럼 우리 사회에는 법과 현실과의 거리는 아주 멀리 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예산 책정이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12월 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2024년도 예산안에 전장연이 요구하였던 교통약자 특별교통수단 예산 271억 원 증액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장애인 콜택시 유지에 필요한 그야말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이미 여야가 합의한 안이기도 하였는데 말이지요. 전장연은 내년 1월 2일부터 지하철 시위를 재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한겨레, 2023.12.21.).
내년 초 우리 사회는 전장연 박경석 대표가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을 기며 “장애인도 사람이다. 장애인의 시민권을 보장하라”며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바르톨로메가 인간개 노릇을 하지 못하게 가족들과 궁정화가들과 조수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돌아보면 가슴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21세기 민주주의가 발전한 세계 10위 안에 드는 선진국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한 단체의 대표가 바르톨로메처럼 바닥을 기며 “장애인 이동권”을 외치는 그 모습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뼈속 깊은 아픔이 될 거 같습니다. 부디, 다가오는 새해에 그런 슬픔이 오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리얼 판 코헤이, 사계절.
시녀들(라스 메니나스), 네이버 지식백과(미술백과).
“22년 외쳤지만 장애인 이동권 해결 안돼”, 광주드림, 2023.11.3.
전장연 “특별교통수단 예산 증액안 통과되면 지하철 시위 중단”, JTBC, 2023.12.4.
전장연 1월 2일부터 지하철 시위 … 장애인콜택시 예산 미반영에, 한겨레 2023.12.22.
지하철 침묵시위까지 연행? … “철도법 위반” vs “집회자유 억압”, 연합뉴스, 2023.12.18.
보도자료 ‘장애인에게도 시민권을!’ 출근길 지하철선전전 493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202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