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드림 취재기·뒷얘기]경찰 무전기 훔쳐듣고 특종 찰칵
주한 미 대사 5·18묘지 참배
올해 창간 20주년 특집 중 하나로 광주드림은 역대 취재기·뒷얘기를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그때’ 광주드림에 실려 지역사회 큰 파장을 일으켰던 기사들이 어떻게 작성됐는지 이면을 알려주는 읽을 거리입니다. 독자들에게 제공된 정제된 기록으로서 기사가 아닌 ‘비사’라 할 수 있는 정황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한 편의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해당 기자들이 감당한 수고의 일단도 느껴볼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취재기자 관점에서 정리한 기록은 2018년 본보가 출간한 ‘호랑이똥은 멧돼지를 쫓았을까-광주드림 취재기’ 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2004년 9월,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였다.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국 대사가 비엔날레를 참관하러 광주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비슷한 시기 ‘광주 아메리칸 코너’도 개소식을 앞두고 있어 힐 대사의 광주 방문은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80년 5월 18일 신군부의 광주 민중 항쟁 진압을 위한 병력 동원은 미군의 승인 없이 이뤄질 수 없는 것이어서,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 사그라 들지 않았던 때다. 80년대는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 작전통제권을 미군(한미연합사)이 갖고 있던 시절이다.
때문에 80년 5월 이후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투쟁했던 대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 광주 미문화원 등에 방화하며 사죄를 촉구한 배경이 이와 무관치 않다.
여하튼 이 같은 시기에 미문화원의 후신인 광주 아메리칸 센터가 개소하고, 미국 대사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은 학생들의 투쟁을 부추기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학생들은 미 대사의 동선에 맞춰 비엔날레전시관 입구에 진을 쳤다. 경찰도 이에 맞서 많은 병력을 배치해둔 상황.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현장에 김태성 기자가 있었다.
하지만 힐 대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경찰차량 주변에 있던 김 기자는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들었다. 경찰들 무전 교신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온 건데 “힐 대사가 망월동 5·18묘지에 갈 것 같다. 도로 통행로를 확보하라”는 내용이었다.
오후 5시가 다 돼가는 시각, 김 기자는 망월동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사실이었다. 그 시각 힐 대사 부부는 망월동 5·18 묘지를 참배하고 있었다.
80년 5월, 신군부의 쿠데타를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미국. 해서 이후로 진행된 학생 운동에서의 ‘반미’ 정서 토대를 제공해준 미국의 대사가 광주 민중항쟁의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5·18묘지를 참배한 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현장은 김 기자만 기록할 수 있었다.
“비공식적인 참배여서 취재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힐 대사 부부가 5·18묘지관리소장 안내를 따라 참배할 때, 관리사무소 직원인양 따라 붙어서 찍을 수 있었던 거예요.”
‘용감한 희생자들을 추도하기 위해 깊은 존경심과 슬픔을 안고 이곳에 왔다.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고 그들의 기억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킬 것이다.’
당시 힐 대사가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