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경 교수 필사이언스]과학 자본(Science Capital)을 키우는 소중한 만남들

중학생때 조언받은 소녀가 켄텍 학생으로 ‘과학을 멘토링하다’ 과학커뮤니케이션 성과

2024-03-05     조숙경
과학자본 개념도.

 하얀 눈과 촉촉한 비가 교차로 내리며 새봄을 재촉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꼬맹이들은 사춘기의 중학생이 될 것이고, 고등학생들은 이제 대학생이 되어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것이다. 다른 대학교에 비해 조금 이른 입학식을 치루면서 올해 는 어떤 신입생들을 만나게 될까? 또 그들은 어떤 근사한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왔을 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던 중 이른 봄에 만났던 두 가지 만남이 특별히 생각이 났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과학박물관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던 필자는 2013년 새로 개관하게 될 국립광주과학관의 전시본부장이 되었다. 이론적인 연구를 실행으로 옮겨볼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기 때문에,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새롭게 기획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광주광역시 시각장애인연합회의 회장이라는 그 분은 광주MBC 라디오에서 방영되던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을 애청하고 있으며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다는 말씀을 꺼내셨다.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라디오 방송에서처럼 과학 특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며 대답을 했다. 하지만 정작 강의 날이 다가오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보통 때 사용하던 많은 시각 자료들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진행자와의 대담 형식이 아닌 상태에서 과학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강연장에 들어서자 그 동안의 걱정은 걱정도 아니었다. 강연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시각장애 청소년들이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중장년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나도 모르게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 얼굴 예쁘죠?”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청중들은 “이뻐요”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시각 대신 청각으로 보다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이해하는 그분들에게 그날 강연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아주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강연을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몇 일 후 멀리서 버스를 타고 과학관의 1층 카페로 찾아온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두꺼운 안경을 낀 소녀는 수줍은 듯이 <세계의 과학관>이라는 책을 내밀며 싸인을 부탁했다.

  <세계의 과학관>은 런던, 파리, 프라하, 피렌체, 도쿄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도시 9개를 선정하여, 그곳에서 살다 간 과학자들의 흔적과 과학의 기억을 추적하는 여행 컨셉의 책으로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된 책이었다.

중학교 1학년때 필자를 찾아와 과학자기 되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었던 소녀가 몇년 뒤 한국에너지공과대 신입생이 돼 찾아왔다. 과학 멘토링으로 대중들에게 과학을 전달하고 청소년들을 이공계로 진출하도록 안내하는 과학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 사례로 여긴다. 중학생 시절 필자와 만난 한민솔(왼쪽) 학생.

 소녀는 장차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과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또 고등학교에서는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 지 등등을 차분하게 물었다. 두 시간이 어찌 지나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대화에 푹 빠져들었던 것 같다.

   역시 나는 그때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향해 정진할 수 있는 용기, 힘들지만 견뎌낼 수 있는 끈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사실상 과학의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 대부분은 천재로 태어났다기 보다는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용기와 끈기를 발휘한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 딱 한번 만났던 그 소녀가 다시 나를 찾은 것이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향해 정진해 온 소녀는 근사한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켄텍의 입학식에 신입생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고 반가웠다. 그동안의 고통스러움이 한순간에 녹는 것 같았고, 나름 인생을 잘 살아온 것 같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이처럼 라디오 과학방송으로, 과학 대중강연으로, 그리고 과학 멘토링으로 대중들에게 과학을 전달하고 청소년들을 이공계로 진출하도록 안내하는 활동 등을 총체적으로 과학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른다.

 과학과 사회, 과학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미디어, 강연, 도서, 과학관, 페스티벌, 토크쇼, 연구실 개방 활동들은 모두 과학커뮤니케이션 활동들이고, 이것의 궁극적 목적은 한 사회의 과학자본(Science Capital)을 키우고 과학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함이다.

 과학자본이라는 개념은 과학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2020년부터 영국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개인이 과학과 기술에 관해 가지는 지식, 태도, 사회적 접촉, 그리고 경험의 총합을 일컫는 말이다.

 과학문화를 지식과 정보의 영역으로 한정하지 않고 사회문화적 자산으로 이해하는 과학자본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은 과학 지식에 매료되거나, 과학의 중요성을 인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요소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어렸을 적부터 과학 활동에 얼마나 참여하는가, 주변에서 과학자들을 얼마나 자주 만나고 접촉하는가 그리고 과학과 관련된 책과 영화와 전시와 이벤트에 얼마나 노출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기후변화, 새로운 질병, 에너지 등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를 잘 그리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가 있어야 하고 또 대중들의 과학에 대한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연구개발을 통한 기술적 혁신이 절실한 만큼 정치화되지 않고 합리적인 정부 정책 역시 매우 절실하다. 자연스럽게 과학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자주 그리고 더 쉽게 만듦으로써 과학자본을 확대해야 할 때다.

   필자가 지난 수 십 년간 실천해 왔던 과학커뮤니케이션 활동은 바로 과학자본을 확대하기 위한 일이었으며, 이러한 노력과 실천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함으로써 더욱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다.

 조숙경 (한국에너지공과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