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

[백청일의 독서일기] (46) 인간에 대한 예의, 공지영

2024-04-30     백청일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인간에 대한 예의, 창비.

 연초에 주목할 만한 보고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스웨덴의 세계적인 가구업체 이케아에서 발표한 ‘2023년 라이프 앳 홈 보고서.’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이 보고서는 세계적인 ‘행복한 집 생활’에 관한 연구 조사라고 합니다. 전 세계 38개국 3만 7428명을 대상으로 작년 한 해 동안 설문조사를 진행하였습니다(국민일보 2024.1.16.).

 몇 개 항목을 보면, ‘집에서 혼자 시간 보내는 게 가장 즐겁다’가 10명 중 4명으로 응답국 중 가장 높은데, 평균은 30%. ‘가족과의 좋은 관계가 집에서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는 10명 중 2명.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속감을 느낀다’는 9%로 응답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국가 중 대한민국이 가장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워진 ‘각자도생’, ‘생존경쟁’, ‘극한 싸움’이라는 말들과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경제와 정치, 사회, 교육, 의료 현상을 볼 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K - ○○’을 가능하게 만든 ‘다이내믹 코리아.’

 그럼에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사람들과의 관계, 유대, 연대도 중요하게 생각할 거고, 승진, 성공, 명예, 투자(투기), 부의 축적, 이익과 혜택이라는 개인적 가치보다 공공성, 나눔과 희생, 복지,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사회적 가치를 더 중시할 거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케아 보고서는 이런 마음 한 켠에 씁쓸함을 깃들게 합니다. 그래서 나와 우리 사회를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작품은 1993년 실천문학 여름호에 실렸던 공지영 작가의 단편소설 제목인데 199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9개의 단편을 묶어 출간한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2006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개정판을 발간했습니다(인간에 대한 예의, 위키백과).

 작품은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를 회상하고, 더 과거를 회상하다 현재로 다시 돌아오는 구조입니다. 필자는 이를 ‘갈등’과 ‘예의’를 중심으로 분석한 후, 갈등하는 나, 갈등의 정체, 변해버린 강선배와 이민자 순으로 재구성하여 서술하고, 결론으로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갈등하는 ‘나’

 화자인 ‘나’는 여성지 기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달에 화제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그 작가를 인터뷰하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6페이지짜리 기사”를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는 권오규 선생 인터뷰를 이미 끝내놓았는데, 데스크에서 그걸 다음 달로 미루고 이민자를 취재하라고 변덕을 부리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나’는 이국 생활을 한 이민자에게서 왠지 거부감이 들었지만,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그녀를 만나고 온 데스크가 그녀에게 푹 빠져버린 후, 젊은 기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던 나이 든 카리스마적 노련함 대신 명상과 문학소년의 동경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사무실의 공기가 바뀌기도 하여 다른 기자들도 모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데스크가 훅, 빠지게 된 이민자의 사연. “스물하나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전 대상, 대학 졸업 후 도미, 뉴욕에서 큰 성공, 이어 도불하여 전시회 연달아 성공, 소더비 경매장에서 그림을 거래시킬 수 있는 유일했던 한국화가. 어느 날 성공과 성취의 허망함을 깨닫고 인도로 여행 떠남. 스승 마카호타 미르혼지 밑에서 사사. 삼 년간 인도 전역 맨발로 방랑. 아프리카 스케치여행, 어느 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 중 불현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와 고국에 정착.”

 그런데 이민자를 취재하면서 ‘나’의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따뜻한 말소리, 식물성분의 냄새가 나는 듯한, 바람이 부는 위로 비가 내릴 것 같은 표정, 넓은 뜰 위 혼자 있어도 모든 것이 이미 충족된 모습의 이민자. 그래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의 머리 속에는 “자유는 나의 의상, 명상은 나의 끼니, 이 우주도 나를 가둘 수는 없다”는 기사의 제목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건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데스크가 전해 준 희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랜 독신 생활과 쓸쓸한 시간들을 다르게 대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늦은 밤 혼자서 싸구려 포도주병을 홀짝거리거나, 누가 깨어 있어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없나 싶어 전화기 앞에 있기도 하는 대신, 이민자가 가르쳐 준 명상호흡을 통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용기같은 게 생겼으니까요. 그래서 “선배 어쩔 거야? …. 요즘이야 그런 게 특종이지 뭐. 문민정부가 출범한 마당에 웬 장기수?” 했던 함께 취재갔던 사진기자의 빈정거린 말투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던 거지요.

 실은, 권오규 선생을 취재하러 집을 방문했을 때 남대문에서 그릇가게를 하던 동생(권오원)으로부터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형님과 시내 구경을 가던 길에 형님이 길을 걷다 화들짝 놀라 멈추었다고. 이후로도 길을 걷다 깜짝깜짝 놀라시는데, 감옥에서 혼자 일곱, 여덟 걸음 걷고는 뒤돌아서 걷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다고.

 또 하나는 늦잠을 주무시던 형님을 위해 마루에 밥상을 차려 놓고 왔는데 그날 오후 늦게까지 집으로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를 않더라고. 급하게 달려와서 문을 열어 보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에서 방문만 두드리고 있었다고. 오랫동안 복역하는 장기수들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스스로 안에서 문을 열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린 거라고.

 한 시간 후에 나타난 권오규. 그는 빨치산 활동을 했던 이상우 선생이 얼마 전에 출옥을 했는데, 큰 병원에 모셔드리고 오는 길이라고. 그런 권오규를 보고 제수 씨가 이제는 당신 몸을 좀 돌보시라는 말을 하는 걸 듣기도 했지만, ‘나’는 그뿐, 돌아오는 길에는 막막함만 가득했습니다.

 “스물여덟의 나이로 무기수가 되었던 그가 이제 출옥한 지 이년만에 그동안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묶어 책(‘인간에 대한 예의’)을 펴냈다고 해서 그것을 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기사를 쓰기 시작해야 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신 저 사람 오십이 다 된 지금 장가는 갈 수 있는 건지, 책이 팔리지도 않는다는데 생계는 어떻게 할 건지, 몸도 안 좋다면서 다른 장기수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평생을 살 건지, 하는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잡지사로 돌아온 ‘나’는 사진기자와 점심 식사를 하러 갑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회색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바람이 거셉니다. 사진기자가 한마디 합니다. “오늘이 강경대 2주기잖아.”(강경대열사는 명지대학교 1학년이던 1991년 4월 26일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관 5명에게 붙잡혀 쇠파이프로 두부에 심각한 타박상을 입어 사망했습니다. 5월 20일 광주광역시 망월묘지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강경대, 나무위키)).

 설렁탕집에서 서로 별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돌아온 나에게 ‘강선배’에게 전화가 옵니다. 지하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갈등의 정체

 강선배를 만나러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5년 전’ 똑같이 지하다방에서 강선배를 만났던 걸 기억해 냅니다. 그 당시 ‘나’는 이 잡지사의 사장인 외삼촌의 주선으로 계약직 기자가 되어 처음에는 가계부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어두운 자료실 한켠에서 일하는 ‘나’는 그 당시 이곳 사람들은 조금의 죄의식이라든가 조금의 미안한 얼굴이라든가 왜 그런 것들이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은, 나는 5년 전 다섯 달 정도, “노동현장에 배치를 받기 전에 윤석과 다섯 명의 남학생들을 우리 집에 묵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간다고 말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유인물을 나르거나 책을 가방에 숨겨 거리에 나설 때 전경이라도 볼라치면 가슴이 쿵쾅대고, 방 밖에서 경찰차라도 지나가면 온몸의 신경들이 곤두서던 날들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옳았지만, 그런 날들이 싫었습니다.

 5년 전 지하다방에서 강선배를 만났을 때,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 지 삼개월만이었습니다. 수배받던 강선배는 변장을 한 채였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하던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일찍 오려 했는데, 이제야 왔다며, 괜찮느냐고, 말하지 그랬느냐고. 급한 약속으로 일어서는 강선배에게 나는 그날 받은 월급봉투를 내밀었는데, 강선배는 거기서 몇 장만 꺼내고는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다고 윤석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지금 병원에 있는데, 중태라고.

 나에게 누나가 가난을 아느냐며 술잔을 던지던 아이, 내가 보리차를 끓이려는데 수도꼭지에서 더운물이 나오는데 물을 왜 끓이느냐고 묻던 아이, 사과를 건네며 멋쩍게 사과하던 아이, 나랑 악수 한 번만 해요, 하며 손을 잡고는, 꼭 다시 뵙고 싶어요, 우리, 했던, 나를 무척 좋아했던 아이.

 강선배가 전해 준 윤석의 이야기. 일당 700원을 올리기 위한 임금인상투쟁 과정에서 마지막 교섭을 들어갈 때 몸에 신나를 붓고 들어갔다고. 사장이 지역에서 유명한 악덕사업주라 협상 과정에서 협박을 하려고 그랬는데, 라이터를 켜는 순간, 사무실에 휘발된 신나가 퍼져 있었다고.

 다시 만나자던 윤석에게, 그러자고 했지만, “네가 끌려가던 내가 끌려가든 우리들은 기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말했는데, 그게 “이렇게 망연한 죽음”으로 서로를 갈라지게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윤석이 노동현장으로 가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주기만을,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젊은 날을 보내기를 바랐”을 뿐인데. 그 뒤 강선배와는 만나지 못했고, 소문으로 강선배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갈등의 원인’ 또는 ‘정체’에 대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쳐와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과 ‘죄의식’.

 이렇게 볼 때 ‘나’의 기준점은 80년대 학생운동과 학생운동을 했던 학우들입니다. “죽어서 사진으로 남은 친구들”이 있는 나는,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그들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과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 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 버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다음 장면에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너는 도망친 사람이니 입을 다물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도 입을 다물지도 모르지만, 무서워서 도망친 비겁자라고 욕한다면 진심으로 그들에게 나의 비겁함에 대해 사죄할 용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팔십년대의 아들이며 딸이었다. 팔십년대의 아들이며 딸들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옳으면 승리한다는, 아아, 너무도 단순했지만 너무도 굳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변해버린 ‘강선배’, 그리고 이민자

 ‘5년’만에 만나는 강선배는 그때와는 다르게 지하 다방 구석이 아닌, 중앙 좌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강선배의 구속 소식이 들리고, 노동자가 되어 중학교만 졸업한 노동자와 결혼했는데 이혼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버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는 그를, 딸 둘 낳고 살던 노동자(아내)와 헤어졌는데, 그를 정신병원에 가두었다는 강선배를 만나고 있습니다.

 신입생 때 3학년이었던 강선배를 무척이나 사모했었던 나.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우리 주변의 아주 사소한 것들부터 싸워가는 거라고 가르쳤던 선배. 그 작은 일을 가지고 싸우다 감옥에 가고,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끌려 나와 우리를 울게 만들었던 선배.

 강선배는 결혼하게 되었다며 청첩장을 건네줍니다. 지금의 강선배는 첫 월급봉투를 내밀었던 그날을, 도망쳐 나왔던 죄책감을 다 씻을 수 없을 것 같던 그 가을날을, 윤석의 묘지에 다녀왔다며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거렸던 그날들을 기억할까. 서로 어색해 물만 마시며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나는 “꼭 죽음이 아니라 해도 사실 이런 만남이 이별”이라는 걸 느낍니다.

 급하게 이민자라는 사람을 취재갔었다는 나의 말에 강선배는 아는 체를 합니다. 아버지가 그 여자 그림을 한 점 샀는데, 우리 집안과 먼 일가였다고. 마누라 될 사람이 그 사람 명상법 사다 놓고 연습하고 있다고.

 나는 오늘 권오규가 아닌 이민자 취재를 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강선배와 이민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색함을 풀 수 있으니까요. 그에게 무기수였던 권오규를, 취재 갔던 그 집이, 구불구불한 골목길 허름한 한옥 문간방에, 서너평 시멘트로 발라진 마당 한쪽에 파란 비닐 화분에 담긴 촌스런 철쭉이 있고, 재생고무로 만든 대야가 널브러져 있었다고, 그의 동료들은 사형과 옥사를 당했다고, 그리고 죽어버린 윤석이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으니.

 강선배를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왜 이민자에게 갔을까. 왜 권오규란 사람을 다음 달에 소개해도 좋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권오규 선생을 이번 호에 싣든 이민자를 이번 호에 싣든 세상은 어쨌든 그렇고 그렇게 돌아갈 테니까? 나는 벌써 팔십년대를, 내 이십대가 고스란히 놓여 있는 그 팔십년대를 벗어난 걸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은 풀려난 사람들이고,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건 이젠 철 지난 유행이니까, 그래서?”

 그에 비해 대망의 90년대에 이민자는 다를 수 있습니다. 명상하는 법을 일러줄 수 있고, 혼자라는 생각에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이 우주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으며, 희귀한 냄새가 나는 차를 마시며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줄 수 있으니까.

 ‘인간에 대한 예의’란

 마감을 코 앞에 두고, 나는 감옥에서 이십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와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 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를 비교해 봅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이민자를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걸 고백합니다. 이민자가 더 매력있고 재미있지만, 권오규는 내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지만, 미안하게도,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80년대에 이십대를 고스란히 보냈듯이 그들이 보냈던 이십대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제서야 기사 첫머리가 떠오릅니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1994년 책으로 출판된 이후 10여 년이 지난 2006년 개정판이 나왔고,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는 책입니다. 필자는 30년이 되는 2024년 오늘 현재에도 제목이 주는 울림이 우리 사회에 ‘화두’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은 아쉬운 점이 있기도 한데, 이 작품은 후일담 소설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기도 하니, 이는 후일담 소설 전체에 해당되는 아쉬움이기도 합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가 오늘을 살아가는 기준점이 1980년대, 80년대 학생운동과 운동가들이다 보니 그 시절과 오늘을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들’과 ‘여기 이들’로 나뉜 이분법 구도 속에 그들이 ‘선’이자 ‘정의’라면 여기 이들은 ‘악’이자 ‘부정’이 됩니다. 이는 ‘그들’이, 오늘 이 시대에 ‘강선배’와 같은 모습이 아닌 ‘그들’이라면 여전히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고, 그들이 저지른,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부정과 범죄에 대해 ‘대의’라는 명분으로 눈을 감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 사회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들을 ‘책임자 처벌’과 ‘새로운 지도자 추대’로 치환하려고 합니다. 사회, 경제, 정치, 역사, 의료문제들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접근해서는 문제의 원인도, 해결 과정에 대한 모색도 요원할 수밖에 없겠지요.

 80년대 문학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기나긴 후일담의 시대, 희망보다는 절망과 환멸이 더 컸던 시대”에 자신을 붙들어 주었던 건 문학이었다고 했습니다(한겨레, 2023.9.6.). 정년 이후에는 “이 세상과 타협하며 추하게 늙고 싶지도, 세상이 추하다고 혼자서만 곱게 늙고 싶지도 않다”며, “건강이 허락하고 정신이 뚜렷하기만 하다면 앞으로도 부단히 생각하고 말하고 글쓰고 행동하면서 이 요지부동의 세상에 맞서”겠다고 했습니다(한겨레, 2024.4.15).

 ‘인간에 대한 예의’,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결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다만, 노교수처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찾아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백청일, (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공지영, 인간에 대한 예의, 창작과비평사, 1994.

 강경대, 나무위키.

 김명인, “기나긴 ‘후일담의 시대’ 변절 않고 버틴 건 문학 덕이죠”, 한겨레신문, 2023.9.6.

 김명인, 노년의 길목에서, 한겨레신문, 2024.2.15.

 인간에 대한 예의, 위키백과.

 “혼자가 최고”… 한국인 10명 중 4명 ‘나 홀로 집에’ 선호, 국민일보 2024.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