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대’
[백청일의 독서일기] (47) ‘먼 그대’, 서영은
필자는 그 동안 책을 읽고 조금씩 메모해 온 내용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토론'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내용은 책 소개와 정리, 간단한 소감, 또는 깊이 있는 분석과 평가 등 책에 따라 달라진다. 읽기 편한 대화체 형식으로 서술하고 1차 목표는 100권이다. 100권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독자들과의 건강한 토론이라 믿고 있다 <편집자주>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동료든,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여러 부탁을 합니다.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면 보통 들어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또 부탁을 하기도 하는데, 거절하기도 좀 뭐해서, 또 들어주게 됩니다. 잊어버리고 살기도 하는데, 작은 도움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들을 일일이 하나씩 다 기억하고 살지는 않으니까요.
식사와 술자리를 가질 때 먼저 계산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몇 번 반복이 되면 으레 그 사람이 내겠거니, 하기도 합니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아도 모두 별말이 없으면 자주 계산했던 사람이 먼저 내겠다고도 합니다. 그런 걸로 좋았던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해서.
하지만 이 모임은 이렇게 하고, 저 모임은 저렇게 하는 거처럼, 어떤 모임은 만나기 전에 이미 얼마씩 갹출하자고 하기도 하고, 회식 이후에 나갈 때 서로 1/N씩 내자고 분위기 좋게 합의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사람들이 보통 관계맺기라고 합니다. 관계의 종류야 셀 수 없이 많겠지만, 크게 혈연관계, 신뢰관계, 거래관계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혈연관계면 무엇이든지 다 가능할 거 같은 나이대도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다 해주어야지 하는 마음이 아주 강할 때이지요. 하지만 직장생활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자녀들을 결혼시키기도 하고, 퇴직하기도 하고, 손주들을 돌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어느 나이대를 지내다 보면 가족이라 해서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거래관계야 “주는 만큼 받고, 받는 만큼 준다”는 원칙대로 하면 별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은 게,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물건값을 치르는 거처럼 딱 그만큼만 주고받으면 되는데, 이렇게 하기가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보통 ‘인사’라고 하는 게 있다 보니.
신뢰관계의 핵심을 믿음, 의로움/대의/신념, 정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종교적인 생활이나 공동체에서, 의로움/대의/신념은 사회 운동에서, 정은 친구 사이나 이웃 사이, 동호회에서. 그런데 신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거래관계가 끼어들었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믿음과 신념/대의, 정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이나 사람을 대할 때면 거래관계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 심한 괴리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과 모임에서의 관계는 꼭 하나의 관계만이 아니라 여러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하게 관계를 맺고 살면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로 해결하고 극복하면서 살아게 됩니다. 그럼에도 “산 넘어 산”이라고 문제는 끝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과 상처는 깊은 흔적을 남기곤 합니다.
논의를 좁히기 위해 혈연관계를 일단 제외하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관계맺기가 어렵다고 했을 때, 아마 대부분은 지금 이 사람과 또는 이 모임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떤 건지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워 처신하기 곤란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직장생활이나 모임 활동을 하면서 신뢰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래관계인 거 같아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나에게 실망한 듯 하는 걸 보면서 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나 돌아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서 사랑을 베풀면서 사는 사람을 이제야 발견한 듯 새삼 다시 보게 됩니다. 봉사 활동과 단체 활동에서 헌신의 정도가 다른 걸 뒤늦게 알아채기도 합니다. 또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에 익숙해져서인지,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모습들이 새삼 다르게 이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생활의 각박함과 잔인함 속에서 이런 성찰의 피드백은 사라질 때가 많고, 오히려 사랑과 헌신을 실천하는 사람을 나무라거나 험담하는 거에 익숙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고맙다, 대단하다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흉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호구같다”거나 “호구 잡혔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생존경쟁이 극에 달해지고 있는 오늘날 오히려 이런 분위기가 더 심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용해 먹기 쉽다”고 말하면서, 기분 띄워주고, 분위기 띄워서 그 사람에게 덤터기 씌우기도 하고, 이런저런 부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성의’와 ‘사랑’을 마치 자신이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권리’인 거처럼. 언제나 자기 것인 양.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호구같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까요? 그 사람은 자신을 이용하고 상처주는 사람들에게 왜 한결같이 대하는 걸까요? 세속에 살면서 신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나 수도자도 아니면서, 왜 마치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걸까요?
오늘은 이런 “호구같은 인물”을 그리고 있는, 한국 문학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서영은의 ‘먼 그대’에 나오는 ‘문자’입니다.
호구같은 문자 씨
주인공 ‘문자’는 아동도서를 출판하는 H출판사에서 교정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자가 속한 편집부 직원이 부장 포함 7명인데, 문자를 제외하고는 그동안 모두 바뀌었을 정도로, 회사 전체 차원에서도 최고참입니다. 직원들은 문자가 사십을 바라보는 노처녀인데도 “한평생 있어 봐야 별볼일 없는 출판사에” 말석에서 10년 이상을 근무하고 있다는 거만으로도 자존심 상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행 지난 털장갑에, 소매 끝이 닳은 외투, 사철 내내 신고 다니는 단화, 기장이 짧아 껑충해 보이는 바지, 보푸라기 가득 한 양말, 반찬 내가 가득할 거 같은 가방. 거기다 우루루 몰려 나가 식사를 하고 커피를 한 잔씩 하고 들어오면 혼자서 도시락을 먹은 후 보리차를 마시며 자신들을 반겨주는 문자가 “측은하다 못해 마음이 언짢아”지기까지 합니다. 문자는 그걸 의식하면서도 “그래, 불쌍해 보여도 좋고, 초라해 보여도 좋다. 너희 맘대로 생각해라”고 혼자서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익숙해지다 보니 동료 직원들은 문자를 함부로 대해서, 문자가 출근해서 서랍을 열어 보면 자신의 사무용품들이 다 없어지고, 몽당연필 하나만 남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문자는 내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좋다. 내게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다 가져가라.”
다른 출판사로 옮겨간 옛 동료가 부장이 되어 월급을 더 준다며 스카웃 제의를 해도 거절합니다. “몇 푼 더 받겠다고 이리저리 철새처럼 옮겨 다닐 사람은 다니라지. 하지만 난 그깟 몇 푼 없어도 살 수 있어”라며 속으로 생각한 채.
그러다 보니 휴일의 일직이며 회사의 궂은일들은 모두 문자 앞으로 돌려지게 됩니다. 추운 겨울날 혼자서 얼음물에 청소하는 거쯤은 예삿일이 되어 버릴 정도로 문자에게 돌아오는 일들이 가혹합니다. 한 마디로, 동료 직원들에게 문자는 그저 ‘호구’일 뿐인 거지요.
10년 전 세들어 사는 자취방에서 문자는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을 거의 지붕에서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눈이 쌓여 그대로 두면 녹은 물이 언제까지나 천장으로 스며들어 방 곳곳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사다리도 변변치 않았던 그 집에서 문자는 “부삽을 들고 날개가 달린 듯 지붕으로 오르내렸습니다.” 식당을 하는 주인 내외가 대청마루에서 비웃으며 그 모습을 보던 말던.
헛간같은 부엌에는 수도가 없어서 주인집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일일이 물을 길어서 먹어야 했습니다. 부엌 뒷문으로 나가 높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물 바께쓰를 낑낑 대며 날라야 했던 “굴욕의 사다리.” 그러나 그것도 문자에게는 항상 발그레한 얼굴 표정인 게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몸속의 어떤 빛이 있어 “싱싱한 생명의 탄력”을 만들어 주는 거처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집 주인은 문자 혼자서 지붕이며, 부엌이며, 수도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나가자 오히려 물세며 불세까지도 터무니없이 물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때도 문자는 한마디 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이상해 집 주인 내외는 문자가 출근하고 없는 시간대에 몰래 문자네 집으로 들어가 보았는데 허름한 그 상태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손가락을 돌리며 문자가 돌았다는 시늉을 해 보입니다.
그러나 동료 직원들과 주변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문자는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문자는 “억센 정신”과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적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감은 “자신들의 키를 훨씬 넘어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와 겨루면서 몇만 리나 되는 고독의 길을 홀로 걸어오는 동안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낙타 한 마리
문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오빠도 몇 년 전 미국으로 이민 가서 혼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동네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있는 집에 전세로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동료 직원들은 문자의 가족사와 처지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데 여전히 알 수 없는 게 있으니 그렇게 일을 하면서 왜 지금까지 돈을 그 정도밖에 못 모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실은, 문자는 유부남 ‘한수’와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다’는 말이 참 이상한 게, 한수는 매달 얼마씩 가져가기도 하는데, 가끔 목돈이 필요할 때면 전화해서 돈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고는 정해진 날짜에 집으로 찾아 와서 돈을 받아갈 뿐인 사람입니다.
한수는 광산 일을 하면서 10년 전 문자가 자취방 생활을 할 때부터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일요일 밤에만 왔다 갈 뿐인 사람이었지만, 문자는 한수가 오기 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그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단련시켜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행복해합니다. 연금술사가 철을 금으로 연금하듯.
하지만 한수는 문자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래 전 모시던 K의원이 장관으로 발탁되어, 그의 도움으로 반관반민의 동동광업소 소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도 한수는 문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올 때마다 구두와 양복, 넥타이가 달라지고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지만, 새 집을 사서 이사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여도 문자에게는 귤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문자는 한수에게 한 번도 무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집 주인이 방세를 올려달라고 했을 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방을 옮겨야 했을 때도, 물가가 올라 한수를 위해 일요일 저녁상을 차리는 비용이 늘었을 때도, 버스를 두 번 타고 다녀야 할 길을 한 번만 타고 나머지는 걸었고 점심도 라면으로 때울 뿐이었습니다.
문자는 한수와의 사이에 옥조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일남일녀를 둔 한수는 한 달도 안 지나 “아내의 등을 떠밀어서 문자로부터 옥조를 빼앗아 오게” 했습니다. “옥조를 데려옴으로 해서, 문자를 영원히 자기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와 내각이 해체된 후, 두 달이 못 되었을 때 한수가 나타났습니다. 수염이 텁수룩하고 초췌해진 얼굴로 비틀거리며. 그리고는 문자에게 외쳐댔습니다. “난, 이제 아무것도 아냐. 우리 집 문전엔 인적이 끊겼어. 그렇지만 너까지 날 괄시하면 죽여 버릴 테다.”
우리는 한수에게 문자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착취와 폭력의 대상’일 뿐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일요일 저녁마다 문자를 찾아와 차려둔 저녁상은 보지도 않고, 준비해 두라던 돈만 밝히던 한수에게 문자는 “완전한 호구”인 셈입니다. 두고 보라며, 언젠가는 다시 재기해서 성공한다고, 큰소리치면서 요란을 떨지만, 한 여성을 착취하고, 또 착취할 뿐인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남성의 극한의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수를 대하는 문자의 정신 세계는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한수의 그런 모습들에 마음 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처들을 단련의 계기로 삼아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 불가사의한 힘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데, 작가는 문자의 이런 모습을 “불사의 낙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수는 그녀에게 천 개의 흉터를 내었을 뿐, 그녀가 그 흉터를 스스로 딛고 일어선 지금에 이르러서 그는 이미 그녀의 맘속으로부터 지나가 버린 그 무엇이었다. 그가 무자비한 칼처럼 그녀에게 낸 상처 하나하나를 딛고 일어설 때마다, 문자의 정신은 마치 짐을 얹고 또 얹었고 그러는 동안 자기 속에서 그 짐을 이기는 영원한 힘을 이끌어 낸 불사(不死)의 낙타 같았다.
아기도 자신 안의 낙타를 끌어내기를
문자는 한수가 요구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모에게 몇 번이나 부탁하고는 마침내 오늘 방문합니다. 목욕하는 이모를 거실에서 기다리던 문자는 시원한 물소리, 화려하게 장식된 거실의 소파와 양탄자, 커튼과 창 너머로 보이는 잘 가꾸어진 뜰을 보는데, “갑자기 등이 시리고 몸이 저립니다.” 또다시 자신을 타이르지요.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보드라운 소파와 양탄자와 금칠을 한 벽난로와 비싼 그림과 쾌적한 침대 위에 세운다. 그런 뒤엔 그 물질로 해서 알게 된 쾌적한 맛에 길들여져 그들은 이내 물질의 노예가 된다. 그들의 갈망은 끝없이 쓰다듬는 손길에 의해서 잠을 잘 잔 말의 갈기와 같다. 하지만 내 정신의 갈기는 만족을 모르는 채 항시 세찬 바람에 펄럭이기를 갈망한다.
사실, 문자는 옥조를 빼앗기기 전부터 밤마다 아기를 빼앗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들로, 산으로 피해 다니다 실성한 듯 아기를 찾아다니면서 비명을 지르며 깨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문자는 아기를 데리고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무릎을 꿇고 누구에겐가 간절한 목소리로 탄원도 했습니다. “혈육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 위안받기를 거부하는 일이 이제는 너무 힘들어!” 그러나 그때 또다시 자신 안의 낙타가 일어났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도달하기 위한 높은 것을 맘속에 지님으로써 너는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고통이 너를 높은 곳에 이르게 하는 사닥다리가 되는 거야.”
문자는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질의 맛에 길들여지면 “끝없는 갈망”에 휩싸여 소유욕에 불타게 되는데, 그때를 “잠을 잘 잔 말의 갈기”와 같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갖고자 하는 순간, 만족하게 되고, 그렇게 만족하게 되면, 더 나은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지요. 급기야 그것은 자신이 낳은 옥조에게까지 이어지는데, 그래서 혈육 또한 “초극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혈육에 대한 사랑 또한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니 그것 또한 버려야 하고, 그 때문에 생긴 고통이 오히려 자신을 더 높은 곳에 도달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그래서 문자는 이모의 거실 장식장에 있는 옥조의 사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미소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사진을 보며 속으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가엾은 자식. 엄마가 네게 지운 짐이 너무 가혹하지? 하지만 너도 네 힘으로 네 속에서 낙타를 끌어내야 한다. 엄마가 너의 삶을 안락한 강변도 있는데 궂이 고통의 늪가에다 던져 놓은 이유를 그 낙타가 알게 해줄 거야. 그것이 사랑이란 것을 알게 해줄 거야.
“푸른 물길”을 걷는 “불사의 낙타”
이쯤 되면 우리는 문자가 진정으로 궁금해집니다. 직장 동료들과 사랑하는 한수로부터, 아니 한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건지 의문스럽기도 하지요,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걸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계기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 하니까요. 심지어 자신의 딸을 양육하려는 마음조차 물질과 같은 갈망과 소유욕과 같은 것으로 여겨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데, 그 딸이 나이가 들면 그러한 자신의 행위가 바로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자신할 수 있는지.
작품 후반부에 너도 이제 결혼해야 햐지 않겠느냐는 이모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문자는 리비아를 여행하고 온 사람이 쓴 글의 어느 구절을 떠올리게 되는데,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해 비유적으로라도 그걸 알게 됩니다. 돈과 물질을 거부하는 자가 걷는 신의 길인 푸른 물길을. 그 길은 불사의 낙타가 평생을 걸려 걸어가는 길입니다.
리비아는 국민 소득이 1인당 1만 달러였고, 인구는 3백만밖에 되지 않았다. …. 정부에서는 다산(多産)을 권장하는 한편, 사막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내기 위해 돈다발로 유혹한다. …. / 그러나 사막에서 살아온 유목민의 상당수가 그 유혹을 뿌리치고 더 깊이 사막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 갈증의 길을 스스로 택해서 가는가.
리비아에는 조상 적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같은 지도가 있다. 그 지도에는 사막의 땅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푸른 물길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이 길을 신(神)의 길이라고 부른다. / 사막의 오지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만은 이 푸른 물길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한다.
작가는 오래전 자신의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리는 윤석화 연출에 대한 기대를 전하면서 ‘먼 그대’의 주인공 문자의 언어를 가리켜 “내면의 언어, 정신의 언어, 투혼의 언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뉴스컬쳐, 2015.5.26.). 서영은 작가의 글쓰기를 “자서전적 글쓰기”로 규정한 이병순은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문자를 “사랑과 혈육과 소유를 초극한 경지에서 ‘생의 중심’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시지프스”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이병순, 2006).
경제와 정치 위기 속에 각자 살 길을 도모해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모난 돌이 정 맞기에” 다수와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검증되지 않은 사실들을 만들고 퍼 나르는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시대. 나/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집단을 “권위”를 앞세워 손쉽게 “적”이라 규정하고 선동하는 시대. 옳고 그름을 따지며 이치와 합리를 밝히려는 행위 자체를 “의심과 회의적인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대.
이러한 시대에 문자의 모습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와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과 이웃들(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이용하든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에 비겁하지 않고, 한수(남성)의 끊이지 않는 착취와 폭력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용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고통과 상처(결코 끝나지 않는 신의 형벌)에도 자신만의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정신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모습에서 실존적인 시지프스를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긍정적 자기인식과 적극적 삶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중심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구체적 현실은 소거되고 신성을 향해 가는 구도의 모습이 핵심으로 제기되었기에 주체의 폭력성을 극복해가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지적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혈육을 도구로 삼는 문자의 행위가 물질주의적 욕망을 위해 타자를 도구화하는 남성 인물이 보여주는 주체중심성의 거울상일 뿐이니까요(김진규, 2020).
그럼에도 권위에 대한 절대 맹종과 선동하기, 가짜뉴스 만들어 퍼트리기, 좌표찍어 모욕하고 창피주기, 건강한 문제제기와 정당한 이견에 배신자로 낙인찍기, 사법의 정치화를 넘어 정치를 사법화하기, 그야말로 나찌 독일, 파시즘의 전야와 같은 이 시대(윤소영, 2024)에, 호구같은 문자일지라도, 그가 보여주는 “소극적 저항”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신의 길인 푸른 물길을 걸어 도달하려는 그곳에 있을 ‘그대’가 지금 이곳에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과 물질, 권력을 앞세워 타자를 도구화하고 이용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주체의 폭력성에 맞서 결코 비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말의 갈기같은 긴장상태를 유지한 채, 결연한 대결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백청일(논술학원장)
■ 참고문헌
서영은, 먼 그대, 1983 제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4.
김진규, 서영은의 문인해외연수 참가와 ’먼 그대‘ 창작, 한국현대문학연구 61권 61호, 249-281, 2020.
’먼 그대‘ 서영은 작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이 시대에 성찰의 시간 선사하길”, 뉴스컬쳐 2015. 5.26.
윤소영 외, 한국사회성격 논쟁 세미나 Ⅳ, 공감, 2024.
이병순, 서영은의 ‘먼 그대’론, 현대소설연구 30권 30호, 315-333.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