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돌봄 통해 서로 온전히 보호될 수 있다”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 재난 마주한 인간 앞 ‘공동체성’ 의미
지난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가족과 커뮤니티의 풍경들’을 연재한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 가족커뮤니티 사업단 교수진이 올해도 칼럼을 이어갑니다. 본란은 넓은 범위에서 가족과 커뮤니티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성찰을 시도합니다. 사업단은 ‘초개인화 시대, 통합과 소통을 위한 가족커뮤니티인문학’이라는 주제 아래 인문학적 성찰과 상상을 바탕으로 열린 가족, 신뢰와 조화의 공동체 문화를 연구·확산하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코로나19로 대표되는 전염병은 전 인류가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한 계기가 되었다. 국가 간의 경계가 무력할 만큼 탈경계적 상황을 보여준 전염병은 역설적으로 개인과 사회, 국가가 상호연결성으로 연계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이로 인해 인류는 전염병이라는 ‘재난’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개인, 지역 사회,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현재적 상황으로만 국한될 성격이 아닌 게, 주지하듯이 전통시대에도 가뭄과 홍수, 지진, 전염병 등과 같은 자연 재해가 무수히 발생했다. 자연 재해가 발생하면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하고, 그것은 곧 국가적 손실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문제적 상황이 닥쳤을 경우 대처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중요했다. 특히 재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군주의 역할이 강조되었는데, 자연 재해인 관계로 사전에 대비하는 게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터라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양상이 다분했다.
반면 전쟁으로 대표되는 재난은 자연 재해와 같이 재난이라는 측면에서는 유사하나, 이를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개인·사회·국가가 상호 연결된 측면이 강조된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즉, 전쟁은 인간과 자연의 대결 국면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정치적 각축에 의해 야기된 ‘인적 재난’이라는 점에서 사건의 발생과 경과, 결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다기한 형상을 확인하게 되는 특수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 당대적, 국지적 ‘재난’이 아닌 역사성을 띤 사건으로 다가오며 그 여파는 단순히 인명, 재산의 피해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권력의 변동까지 야기하는 파급력을 강력하게 가진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다.이런 측면에서 17세기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펼쳐진 전쟁은 거시적으로 3국을 둘러싼 권력의 역학 관계를 전면적으로 전변함과 동시에, 미시적으로 거대한 재난에 휩쓸려 부유하는 인간 군상의 나약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인적 재난, 개인·사회·국가 상호 연결돼 있어
각국에서 펼쳐진 다양한 사건들은 역사란 이름으로 기억되면서 상호 연결되었고, 각자의 시각에 따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또한 진행되었다.
‘임진일기’는 전쟁이라는 재난에 대응하는 개인, 가족, 국가의 행위 양상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검간은 직계 가족과 친인척, 지역 사회인 상주를 중심으로 한 백성들, 피란처를 떠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기록으로 남긴다. 그들은 어찌 보면 신분 계급을 막론하고 다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기에 사대부나 평민, 하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목숨을 보전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그렇기에 신분을 막론한 생존은 공서(共棲)가 관통된 지점으로 이해된다.
공서는 무엇보다 서로 다른 계급의 공존이 계급성을 극복하는 윤리의 발현을 통해서 구현되는데, 그 핵심은 인정이라는 보편적 인류애의 실천에 있다. ‘임진일기’에는 상호 의존이 실천되는 지점에서 인정이 주된 요소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다수 발견된다.
지금 멀리 찾아온 것은 좋은 경치를 찾아나선 게 아니다. 대개 어린 두 아들을 보정 선사에게 맡기고 얼마 남지 않았을 목숨을 보호하고자 도모하려는 것이다.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중에 다섯 명이나 되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서 만일 위급한 변고가 생기면 모두 온전할 리가 만무하니, 두 자식을 덜어두고 떨어져 지내면 앞으로 살아남을지 죽을지에 대해 비록 어느 것이 이롭고 어느 것이 해로울지를 미처 따지지 않더라도, 눈앞에 경황이 없을 때 혹 조금이라도 근심이 덜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어찌 태평한 세상에서 졸지에 난리를 만나 심지어 부자의 목숨을 서로 돌보지도 못하게 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선사 또한 나의 말을 듣고서 안타까워하고 측은해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허락하니 지극히 위안이었고 크게 위로가 되었다. 그대로 수락암의 절에서 묵었는데, 선사가 기장밥을 지어 정성스레 대접하여 인정이 남달랐으니, 비록 평소에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할지라도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검간은 피란 중에 관음사 수락암 보정선사에게 어린 두 아들을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약자인 두 아들을 지키는 것임과 동시에 만약 불가피한 화를 당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가문의 후사를 잇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검간의 입장에서는 가문의 존망과 연결되는 것이기에 차마 실행으로 옮기기 어려웠을 것이나,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간이 이렇게 결정해도 이해해 주는 상대가 없다면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인데, 다행히도 보정선사는 거리낌없이 허락해 주었다. 평소에 서로 내왕하는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검간의 요청을 받아준 보정선사의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 차원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재난은 종교를 예외로 구분하지 않기에, 산속에 위치한 사찰이라 할지라도 침탈의 공포와 위협에서 벗어난 곳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사찰을 떠나 타지로 피난해야 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측면에서 검간의 두 아들을 받아준 보정선사의 행동은 공서의 실천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임진일기’에는 재난을 둘러싸고 빚어지는 인정의 실천이 여러 곳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초개인화된 세태서 공동체성 강화 필요성
기운이 편치 못하여 주인집에 머물렀다. 같이 피난을 온 신여주와 박천식 군들이 국수와 떡이며 보리술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주었는데, 몇 달 동안 굶주렸던 지경에서 지금 철에 맞는 음식을 맛볼 수 있었으니 그 감격스러움이 어떠하였겠는가?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재난이라는 공통 상황 속에서 상호 의존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하지만 상호의존은 누군가의 요구로 수행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상호의존은 윤리, 도덕에 기반하며 법적 규제로 강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에 어떠한 구속력도 가지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별다른 책임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자율 의지에 해당되는 행동이다. 그런데 재난 상황이라는 이기적 속성이 발현되는 상황 속에서 헌신, 희생에 기반한 이타적 행위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은 어떠한 전통과 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상호의존의 적극적 발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개인이 아닌 우리’를 확인하는 공통 경험을 통해 상호의존의 가치를 인식하고 재난 극복의 행동 요소로 활용하는 것에 해당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재난 상황에서 이타적 행위를 실천하지 않고, 이기적 행동으로 일관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적 시선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변변치 못하고 졸렬한 무리들은 남몰래 거두어 취하였으니 많이 얻어간 자는 거의 여덟아홉 마리에 이르렀고, 헐값에 매매되어 다투어 서로 잡아먹으니 산골짜기에서 하룻동안 죽어나간 것도 10여 마리에 모자라지 않았다. 열흘도 되지 않아 마을에서 길렀던 가축들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에 이르니, 설사 난리가 끝난들 사람들이 본업으로 돌아가서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 것을 장차 무슨 가축물에 기대겠는가? 예로부터 병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으랴만, 사람과 가축이 다 없어진 것은 어찌 오늘 같은 경우가 있겠는가? 통탄스럽고 통탄하였다.
“나를 위해 시작됐으나 내게만 국한되지 않기에”
이처럼 재난 상황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누구도 생명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재난에 홀로 남겨진 인간은 생존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마련이다. 그것은 살고자 한 본능에서 배태된 것이기에 윤리의 구속을 쉽사리 비웃으며 지나가곤 한다. 재난이라는 상황은 이러한 세태가 발생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이기에 공동체에 대한 윤리를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나 나에게만 국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현실 또한 재난의 시대와 비교해서 별반 다른 게 없어 보인다. 오히려 자연 재난보다 인적 재난이 훨씬 상황을 심각하게 만들고 공동체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일까?
흔히들 이러한 위기를 사회 체계의 문제나 시스템의 부재로 돌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체계나 시스템의 위기를 추동하는 건 결국 운영을 시행하는 주체인 인간의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러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건 무엇일까? 윤리나 도덕의 강조가 나이브한 인식과 반응이라 비판할 수 있을테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 건 본질이 아닐까.
초개인화된 오늘의 세태에서 공동체성의 강화를 다시금 외치는 것은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며, 곧 상호돌봄을 통해 서로가 온전히 보호될 수 있음을 자각하기를 바라는 것일테다. 지금은 본질의 의미를 성찰하는 시기로 우리를 돌아보는 게 필요한 때이다.
한의숭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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