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앎이 삶이 되는 이들
어느 비 오는 날 밤, 교사인 친구 A의 발걸음이 자꾸 뒤처진다. 모임을 마치고 함께 걸어서 귀가하는 길이었다. 가만 보니 보도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를 열심히 옮기는 중이다. 그가 맨손으로 집어 들어 가로수 아래 흙으로 데려간 것은 지렁이들이다.
보도로 기어 나온 이들이 보행자들에게 밟혀 죽을까 하는 측은지심이었으리라. 요행히 이 밤 구둣발 비명횡사를 피한다 해도 다음 날 해가 떴을 때도 포장된 도로를 벗어나지 못하면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생태적 습성을 아는 이의 절박한 구조 작업이었다.
피부 호흡을 하는 지렁이는 비가 와 흙이 축축하면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기어 나온다. 이들을 살리려면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이 없지만, 맨손으로 잡아서 옮겨줄 이는 얼마나 될까.
또 다른 친구 B는 지역에서 친환경 세제를 제조·판매하는 중소기업인이다. 폐식용유를 수거해 비누를 만드는데, 합성 첨가물을 일체 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제품을 직접 먹어 보일 정도로 친환경에 진심이다.
그는 이웃과의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다. 한 끼 식사, 여럿이 모이는 놀이판에 필요한 물질적 지원은 도맡다시피 하며, 그 수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다. 그러고도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 “더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다.
“혼자만 잘 살믄 별 재미 없니더. 뭐든 여럿이 노나 갖고 모자란 곳을 두루 살피면서 채워주는 것, 그게 재미난 삶 아니껴.”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중)
저자 전우익 선생의 혜안이 아니더라도 ‘혼자만 잘 사면 무슨 재민겨’가 인간사 기본 정리다. 이를 누구보다 앞장서 실천하는 B는 앎이 삶이 된 이들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물이다.
알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삶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심 도로 위, 운행 중인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멈춰선다. 운전자 C가 차에서 내리더니 도로 위에 나뒹굴고 있는 장애물을 치운다. 누군가 보도에 내놓은 쓰레기봉투가 바람에 날려 도로로 날아든 것이었다. 가만두면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됨이 분명하고, 어쩌면 사고를 유발할 수 있음을 모를 운전자는 없다. 안전을 위협하는 쓰레기 더미를 들고나와 보도 한켠에 놓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조지까지 마친 뒤 차에 올라타고 사라졌다.
곡예 하듯 피해서 주행하는 데 급급한 대부분의 운전자들과 달리, 차를 세우고 행동에 나선 단 한 사람이었다. 앎이 삶이 된 이들이다.
역사 속에서 훨씬 더 치열했던 인물을 만날 수 있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우리 강산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조선 후기 매천 황현이 남긴 절명시 중 한 구절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항한 선비의 고뇌와 한계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일생 유교 사상을 학습하고 내재화해 이른바 잡은 의가 ‘충’과 ‘효’였으니, 망국이라는 벼랑 끝에서 지식인이므로 피할 수 없었던 결기의 단면을 보여준다.
동일한 시대, 개인의 한계를 시대의 한계로 치환해 망국을 도운 변절자들에게 새겨진 ‘매국노’라는 주홍글씨는 황현과 같이 앎과 삶이 일치된 행적과 대비되기에 더 명징하다.
이들뿐이겠는가만, 기록으로 전하는 역사적 인물의 삶은 액자 속 명화처럼 박제된 거리감이 있어 정서적 교감이 쉽진 않다.
차라리 예의 A·B·C와 같은 주변 인물의 삶이 현실감 있어 강렬하다. 하여 등불과도 같은 이들이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 효과, 다른 이들의 동참을 끌어내는 유인 효과가 선명하다.
또 다른 지인 D도 그런 류의 사람이다. 그의 삶의 양태는 지구인의 당면 과제인 탄소 배출 줄이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동 수단은 대부분이 자전거이고, 일회용품은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다. 몸에 걸친 옷·가방 등도 생산 과정이 공정하고 소재가 환경친화적인 제품만 착용한다. 가격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기후 위기가 일상화된 시대, 어느 누구도 모르지 않을 바람직한 자세지만 앎을 삶으로 체화한 D와 같은 결단에 이른 이는 미미한 게 현실이다.
D가 동석한 모임에 무심코 일회용기에 든 커피 음료를 들고 갔다가 스스로 낯 뜨거워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다. 앎에서 그치고 삶으로 이어지지 못한 필자의 한계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존재다. 그 당혹감이 각성의 계기가 되고 앎에서 한 단계 더 진화를 촉진하는 매개가 되니 한편 고마운 이다.
주변 밝히고, 다른 이들 동참 끌어내
A의 구출 작전이 뇌리에 박혀 있는 필자는 비 오는 날 유독 지렁이들이 눈에 밟힌다. 실제 몇 마리쯤은 도구를 이용해 들어서 흙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세계 곳곳 재난과 굶주림 현장 구호 단체의 후원금 모집 광고를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B와 같은 이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안온한 삶은 그것에 탐닉하는 사람들에게 좀처럼 자기 성찰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평온한 삶에 안주하면서 자아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는 한, 인간은 삶에 대한 궁극적 지혜를 달성할 수 없으며 결국은 바보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암흑의 핵심’(조셉 콘래드) 해설 중/ 이상옥>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앎, 참된 지식이며 지혜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자아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시민들, 그 지혜의 채찍질로 ‘안온한’ 바보의 굴레에 빠지기 않기를 소망한다.
채정희 편집국장 good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