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다역 연기로 풀어낸 오월 여성들의 한
[임유진의 무대읽기] ‘지정남의 환생굿’ 한 배우의 변화무쌍하고 매혹적인 무대
지난 4월26일부터 27일까지 광주 극단 ‘토박이’ 전용 ‘민들레 소극장’에서 굿판 하나가 벌어졌다. 1993년부터 마당극 배우로 활동해 온 지정남이 ‘지정남의 환생굿’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했다. 지정남은 극에서 혼자 여러 역을 해내는데, 극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무대를 위해 극작, 기획, 연출까지 맡았다.
초짜 무당 고만자에게 굿 의뢰가 들어온다. 오뚜기 밥집 주인 김윤희는 미화원으로 일하다가 화장실에서 죽은 변미화를 환생굿으로 불러내달라고 한다. 극은 스승에게 인정받는 당골이 되고 싶은 고만자가 생애 첫 굿판을 시작하는 것에서 굿을 무사히 마무리 짓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동시에 환생굿으로 불러내야 하는 변미화는 어떤 삶을 살다 간 사람이었는지, 김윤희는 왜 죽은 자를 불러 달라는 것인지도 극의 또 다른 큰 줄기다. 이 두 개의 줄기가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완벽하게 만나서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다.
우선 1인 다역을 해낸 배우 지정남의 에너지가 무대를 꽉 채운다. 당골 고만자를 연기할 때와 식당 주인 김윤희를 연기할 때, 그리고 변미화를 연기할 때 관객은 각기 다른 세 여인을 만난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게 지정남의 연기는 변화무쌍하고 매혹적이며 한 배우가 연기해 낼 수 있는 연기의 총량을 뛰어넘는다. 지정남이라는 배우를 잘 몰랐던 관객 중에는 지정남이 배우가 아니라 진짜 당골이 아닐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80년 5월 봉인당한 망자들, 환생 거부
이번 작품 ‘환생굿’은 사실 ‘지정남의 오월 1인극 환생굿’이라는 긴 제목을 가지고 있다. 1980년 오월 광주에는 신군부의 억압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됐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나 사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를 받기까지는 이후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계엄군에 맞서 싸운 시민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총을 든 시민군이고 그들은 남자다. 하지만 그때 광주에는 남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들도 있었다. 계엄군에게 맞서는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주고, 마스크와 검정 리본을 제작하고, 투사 회보를 나르고 가두 방송을 하고, 상무관에서 시신을 지키며, 때로는 헌혈을 해가면서 80년 광주 오월 투쟁의 현장 곳곳에 존재했던 여성들. 김윤희와 변미화는 그 여성들 중 일부였다.
이 여성들은 27일 도청 진압 후, 유치장에 끌려가서 감금됐다. 100여 명이 그런 일을 당했다. 그들은 감금 기간 동안 행방불명 처리됐고, 신군부는 여성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리대도 지급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사회나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윤희와 변미화 역시 80년 오월, 그 열흘 간의 시간을 철저히 봉인한 채 나머지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한이 너무 깊었던 것일까. 변미화는 환생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변미화를 불러내려고 하는 당골은 변미화와 함께 그때의 영혼들을 다 불러주겠다고 약속한다.
불려나온 혼들이 절규한다. ‘우린 밥만 했어라. 사람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우린 밥만 했어라.’ 기존의 오월 연극(1980년 오월민주화투쟁을 그린 연극)이 여성들의 역할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당시에 활동했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오월극 무대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80년 오월 여성들의 역할과 한을 보여 준 무대는 없었다.
또, 총과 칼로 무장한 계엄군으로 분한 배우들이 등장하여 시민군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재현하지 않으면서도 그때 그 엄혹한 시간의 좌절과 슬픔을 이리도 절절하게 묘사한 무대 역시 찾기 힘들다. ‘환생굿’에서는 생리대를 받지 못해 그냥 흘러내린 여성들의 피, 진압군의 총칼에 의해 죽은 이들의 몸에서 무력하게 흘러나왔을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조명과 악사가 연주하는 꽹과리와 자바라의 소리로 그 모든 것을 해낸다. 물론 그 중심에 배우 지정남이 있다.
배우 지정남 오래오래 무대에 서길
혼맞이굿으로 시작한 굿은 제석굿과 오구굿(망자의 천도를 위한 씻김굿)까지 간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극은 또 다른 성격을 드러낸다. 관객의 참여다. 관객 모두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면서 쓸 하얀 꽃을 만든다. 몇몇의 관객은 무대로 불려 나가 혼들을 천도하는 길에 함께 한다. 고를 풀고 관객이 합심해서 만든 꽃을 망자가 가는 길에 놓는다. 능청스럽고 때로 귀엽고 심하게 코믹한 지정남의 연기에 웃고 울던 관객석이 숙연하다. 1980년에 가야 했던 넋들도, 모진 세월 내내 숨죽이고 없는 듯 살다가 서럽고 아프게 간 넋들도 모두 평안을 얻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한 가지 마음만이 관객석을 관통한다.
지정남은 고만자 역을 위해 화순능주씻김굿 보유자인 조웅석에게서 1년간 사사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 화순능주씻김굿 보유자인 조웅석이 제자인 지정남(고만자)을 위해 악사를 맡았다.
극과 음악의 어울림이 유달리 뛰어난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까. 극의 말미에 고만자(지정남)는 스승(조웅석)에게 인정받는다. 당골로서 첫 굿을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면에선 극단에 소속되어 연기 생활을 하던 지정남이 혼자 독립적으로 만든 첫 작품, ‘환생굿’이 멋들어지게 성공한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정남은 광주의 마당극단 ‘신명’의 작품 ‘언젠가 봄날에’서도 당골로 나온다. ‘언젠가 봄날에’는 지금도 오월이면 공연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지정남은 80년 오월 도청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연기한다. 이번 ‘환생굿’ 공연 소식을 들었을 때, ‘언젠가 봄날에’의 당골 지정남과 ‘환생굿’의 당골 지정남이 겹치는 건 아닌지 내심 우려했다. 정말 하등에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봄날에’의 당골을 이번 ‘환생굿’에서 새롭게 확장하고 연계했다. 배우 지정남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배우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오래오래 그녀의 연기와 작품을 보고 싶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