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태 교수, 복잡하게 단순하게] 지식 생태계의 확장
"지식이 권위 낮출 때 지식 진보 문턱 낮아져"
전통적인 지식 공유 논문·학회…
학문은 토론과 합의를 거쳐 발달한다. 새로 발견한 사실이나 이론을 글로 정리하여 비판과 검증을 거치고, 유효성이 인정된 성과는 논문을 통해 공유된다. 현대 사회의 논문은 최소한의 공통된 틀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지식 공유의 규격화를 가능케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학문적 사실과 정보를 효과적으로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논문 출판은 그 자체가 지식 검증의 과정이자 공유의 수단으로서, 눈문은 가장 공식적이고 전통적인 학문 소통의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논문을 통한 과학 소통에도 아쉬움은 있다.
논문 출판 과정에서 겪게되는 동료 평가는 건전한 학문 생태계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적절한 동료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과학적 성과는 영원히 공유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문제점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가 없지만, 매우 경쟁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분야나 보안이 매우 중요한 연구 내용인 경우, 악의적으로 출판이 거절되거나 동료 평가 과정에 얻은 정보로 먼저 논문을 내버리는 사례가 도시 전설처럼 언급되는 것을 보면, 시스템적인 한계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논문에는 모든 연구가 마무리된 후 정리된 결론을 발표한다. 그래서, 독자는 이미 끝난 일을 나중에 전해 듣게 될 뿐이고, 지식 생성의 과정에는 참여하는 것은 제한된다.
마지막으로, 논문은 매우 전문적인 글이기에, 조금이라도 그 분야의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해당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어려움은 각오해야 한다.
논문 이외에 지식을 공유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형태는 학회다.
학회 현장에서는 다양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토론의 장이 열린다. 학회에서는 논문으로 출판된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현재 진행 중인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청중의 피드백을 구하기도 한다.
구두 발표 넘어 포스터 발표도
학회 발표에는 일반적으로 슬라이드쇼를 활용하여 일방적으로 내용을 설명하는 구두 발표와 연구 결과를 한 장의 커다란 종이에 정리하여 걸어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포스터 발표가 있다. 보통 포스터 발표보다 구두 발표를 더 상급의 발표로 간주하는 경우가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구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포스터 발표는 구두 발표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발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필자의 지도교수이자 NetSci Fellow인 Petter Holme 교수도 “two-way communication”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포스터 발표를 더 선호하기도 했다. 구두 발표와 포스터 발표를 보통 ‘oral presentation’, ‘poster presentation’이라고 부르지만, 구두 발표가 show에 가깝다면 포스터 발표는 좀 더 talk에 가까운 느낌이다.
학회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운 소통이다. 유교 문화가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고, 사제간의 위계가 뚜렷한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학회가 매우 권위적인 경우가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학회는 복장 규정이 있는 곳도 있고, 지도 교수가 배석하지 않으면 구두 발표를 금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보수적인 분위기는 때로는 자유로운 학문적 소통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아래 사진은 필자가 얼마전 참석한 국제학회의 포스터 발표장 모습이다. 발표장 가운데 섞여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포스터를 관람하는 손에는 음식과 음료, 심지어 술도 있다. 다양한 곳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이 모이는 만큼 장거리 여정에 가족을 동반하는 일도 자연스럽고, 매우 캐주얼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러한 학회에서는 지식이 생생하게 공유되고 질의 응답과 토론을 통해 서로가 지식 생성의 과정에 참여할 수도 있다. 포스터 발표를 들으며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저녁이나 같이 먹으며 더 얘기해보자’는 경우는 흔하다.
기술의 진화 과학커뮤니케이터까지
최근에는 논문도 학회도 아닌 새로운 지식 소통의 형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바로 크리에이터나 작가들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다. 물론 이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각종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덕분에 그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그 중 과학커뮤니케이터는 대중에게 낯설고 어려울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지식 생산보다는 지식 공유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으며, 특유의 우수한 설명력으로 인해 어려운 내용도 알기 쉽게 전달하는데 특화돼 있다.
이러한 과학커뮤니케이터의 등장에 날이 선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설명 당사자가 지식 생산자가 아니니 전문성이 결여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설명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과학커뮤니케이터가 스스로 증명해야 할 일이다. 쉽게 설명한다는 이유로 왜곡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려를 이유로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과학커뮤니케이터션은 과학 저변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으며, 사회 전반의 과학적 소양을 쌓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과학의 대중화’를 외쳤다면, 요즘은 ‘대중의 과학화’가 되고 있는 것도 과학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크다. 이렇듯, 커뮤니케이터들은 지식 생태계에서 핵심 지식과 비전문가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지식이 생성되어 공유되고 확산하는 과정이 유기적이고 원할해야 사회의 지식 진보도 용이해진다. 논문과 학회, 그리고 지식 커뮤니케이션은 저마다의 특성을 가진다. 보통 논문>학회>지식 커뮤니케이션의 순으로 권위를 갖지만, 참여자의 수는 그 반대다. 논문보다는 학회가, 학회보다는 지식 커뮤니케이션이 더 지식 생산에서는 멀어지고, 같은 순서로 소위 더 ‘캐주얼’해진다.
여행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문서로 소식을 전하는 것이 가장 용이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우편 배달로 논문을 받아보는 것 만이 새로운 소식을 듣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교통 수단이 발달하고 이동이 용이해지자, 직접 모여 소식을 나누는 학회를 점점 많이 활용하게 되었겠다. 그리고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하자 지식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고 있다.
논문, 학회, 지식 커뮤니케이션은 인류의 기술 발달에 따른 소통 형태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능해진 활동이 새롭게 등장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 사회의 역량이다.
지식 생산과 공유의 형태를 논문으로 한정할 필요도, 학회로 국한할 필요도 없다.
지식이 권위를 낮출 때 지식 진보의 문턱이 낮아진다. 우리가 활용 할 수 있는 각자의 역할을 강화하고 서로가 지식 생산의 큰 고리 안에서 잘 어울어질 때, 학문의 진보도 인류의 진보에 발맞출 수 있을 것이다.
김희태 한국에너지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