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만용 교수, 한국 과학과 과학 한국] 한국엔 왜 자연사박물관이 없는가?
과학관 간판 아래 전시·연구 기능 수행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배경이 되었던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자연사박물관은 1억 4800만 점의 소장품을 갖추고 2023년 440만 명의 관람객을 맞이했다. 자연사박물관은 고생물, 지질, 우주 등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 전반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자연사는 ‘다양한 생물학적, 고생물학적, 지질학적 수집품의 수집, 보존, 연구 및 해석, 세계의 자연 유산과 자연 환경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정의되며, 간단히는 자연에 대한 학문이나 탐구라 설명된다.
자연사라는 표현에 대해 영어권에서도 다소 논란이 있는데, 자연사(natural history)의 history가 역사가 아닌 서술 또는 묘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자연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자연사박물관 대신 자연박물관이나 자연학박물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최근 중국·일본 등에서 자연박물관이라는 이름의 기관이 설립되고 있다. 이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많은 언론과 관련 자료들이 자연사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에 이 글도 자연사로 표기하겠다.
사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연사박물관이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오랜 레토릭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한국과학관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2021년 기준으로 한국에는 15개의 자연사박물관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한국은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라고 지적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OECD 회원국인 일본도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다. 대신 일본에는 도쿄의 국립과학박물관이 우주와 공룡에서부터 일본 고유의 생태계까지 자연에 대한 다양한 전시를 통해 자연사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도쿄에는 과학미래관이 있어서 첨단과학기술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일본은 과학관(science center)과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이 구분되어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해방 직후부터 자연사에 대한 전시·연구와 과학·산업을 포괄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과학관의 기능이 합쳐진 상태였다. 일제강점기의 은사기념과학관을 이어받아 해방 후 새롭게 출발한 국립과학박물관의 관장은 곤충학자 조복성이었고, 동물학부, 식물학부 등의 연구실에는 나비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정태현 등 여러 생물학자가 근무했다.
한반도 자연·연구 수행에 경제성이 중요 잣대인가
1949년 국립과학관으로 이름을 바꾼 이 기관은 현재 한국 국립과학관의 원조 격이다. 하지만 자연사의 비중이 컸던 국립과학관은 한국전쟁 중 폭격을 당해 건물과 소장품이 불에 타면서 사실상 이름만 존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들어 국립과학관이 새롭게 태어났고, 1970년대는 시대적 과제였던 중화학공업 분야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사박물관의 역할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지속적으로 자연에 대한 연구와 전시를 담당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1988년 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 표현과 함께 국가 위상에 맞는 자연사박물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1995년 대통령이 나서 국립자연사박물관 건립을 지시했으나 곧이어 소위 IMF 사태를 만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2001년 재개된 자연사박물관 설립 시도는 새롭게 도입된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를 통과하지 못했으며, 이 같은 상황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예타는 재정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기에 경제성이 매우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하지만 국립자연사박물관은 투입되는 막대한 예산에 비해 관람객 숫자 등 수입이 그리 크지 않아 경제성이 낮다고 평가를 받았다.
한편 1990년 대전에 새롭게 들어선 국립중앙과학관은 자연사를 중요한 분야의 하나로 선정했으며, 2008년 문을 연 국립과학천과학관도 자연사관을 설치했다. 국립중앙과학관은 2017년 별도의 자연사관을 개관하면서 자연사에 대한 비중을 더 높이고 있다. 한편으로 환경부가 국립생물자원관, 국립생태원 등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자연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으며, 최근 문화재청이 국립자연유산원 건립을 추진하면서 ‘부산판 스미소니언’을 내걸고 있다.
학자들의 오랜 요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아직 정부가 세운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다. 몇 차례 설립 시도는 예타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과연 한반도의 자연을 잘 보여주고, 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자연사박물관에 경제성을 요구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 땅의 자연환경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사박물관은 꼭 필요하며, 그 가치는 경제적 지표만으로 따질 수 없다. 특히 자연사박물관이 전시만이 아니라 관련된 연구도 해야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동안 산업기술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과학기술정책이 기초연구로 확대된다는 차원에서도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국립과학관의 자연사관 등 이미 자연사를 전시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일본이 자연사박물관과 과학관의 기능을 분리하여 별도의 기관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과학관이라는 간판 아래 이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과학관이 처음 등장할 때 박물관 기능과 과학관 기능을 같이 추진하는 종합과학관으로 설립되었고, 이러한 전통이 현재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새롭게 설립된다면 과학관은 기존 자연사와 관련된 기능을 신설 기관으로 모두 이양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만 없다”는 단순한 논리 넘어
마지막으로 국립자연사박물관 설립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기관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의 합의는 물론이고, 납세자이자 시민들이 납득하고 동의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우리만 없다는 주장보다 현실에 뿌리내린 미래지향적 구상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연사박물관이 오랜 역사의 해외 자연사박물관처럼 공룡 표본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추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한국의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한반도의 자연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 자연사박물관이 무엇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
한국의 역사적 궤적과 현실적 조건에서 자연사박물관이 국립과학관을 완전히 배제하고 세워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관과 어떠한 면에서 공통되고,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도 충분히 살펴야 한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은 언제쯤 우리 곁에 들어서게 될까?
문만용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 K-학술확산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