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무엇인가, 왜 서서 죽는가
[임유진의 무대읽기] ‘나무는 서서 죽는다’ ‘진짜’의 감정과 생각으로 연기한 배우들
한국연극배우협회 광주광역시지회가 열여덟번 째 정기 공연으로 스페인 작가 알레한드로 카소나(1903~1965)의 ‘나무는 서서 죽는다’를 무대에 올렸다. 작품은 지난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에 걸쳐 ‘미로극장’에서 공연됐다. 배우들은 광주시에서 배우 활동을 하는 이들이 모였고, 연출은 서울에서 내려온 연극인이 맡았다고 한다.
20년 전에 하나뿐인 손자와 의절하게 된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손자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아내를 위해 거짓 편지를 써 왔다. 가짜 편지에서 손자는 대학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도 가진 데다 결혼까지 한다. 그런데 갑자기 손자가 돌아온다는 연락이 오고 할아버지는 난감해진다. 이 상황에서 손자가 타고 오던 배가 난파돼 모두 죽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다. 진짜 손자가 와서 자신의 거짓된 행동이 밝혀지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바로 손자의 죽음으로 인한 아내의 슬픔이었던 할아버지는 ‘영혼의 집’을 운영하는 소장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영혼의 집’ 소장은 마르따라는 여인과 함께 가짜 손자, 손자며느리가 되어 할머니를 찾아온다. 눈이 어두워 손자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할머니는 가짜 가족하고 행복한 며칠을 보낸다. 이때 죽은 줄 알았던 손자가 돌아온다. 20년 전에 가출할 때도 행실이 좋지 않았던 손자는 돈을 요구한다. 돈이 없다고 하는 할아버지에게 진짜 손자는 조부모의 집을 팔아서 돈을 마련하라고 윽박지르고, 자기를 사랑했던 할머니는 줄 거라며 할머니를 크게 외쳐 부른다.
연극의 첫 부분에서 ‘영혼의 집’이라는 사설 기관이 나와서, ‘봄에는 자살 금지’라는 카소나의 다른 작품과 연관된 작품인가 싶었으나 ‘자살자의 집’이라는 기관이 등장했던 ‘봄에는 자살 금지’와 ‘나무는 서서 죽는다’는 별 관련이 없는 작품이었다. 물론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을 돕는다는 ‘자살자의 집’이나, 영혼이 다친 사람을 치유하려 하는 ‘영혼의 집’이나 작가가 쓰는 장치의 유사성을 보면 카소나라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공통된 주제를 뽑아내는 레퍼런스(reference)로는 합당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두 작품의 유사성을 염려한 우려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봄에는 자살 금지’에서 ‘자살자의 집’이 중심 공간이며 배경이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면, ‘나무는 서서 죽는다’에서 ‘영혼의 집’은 그 정도의 층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연극은 처음에 가족도,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도, 집도 없이 일자리까지 잃은 마르따가 자살 시도를 하는 부분에서 ‘영혼의 집’ 소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는 부분까지는 그저 나중에 나오는 중심 서사를 위해 초석을 깔 뿐이다. 가짜 손자 역할을 하는 소장이 그저 연기에 충실하려고 하는 거에 비해 마르따는 따뜻한 할머니에게 정을 느끼면서 정말 가족 같은 감정을 느끼고 이에 몰입한다. 그래서 도중에 두 사람이 부딪히는 장면이 있는데, 연극에서 배우의 역할과 연기 방식의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매우 흥미로웠다. 맡은 캐릭터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입장과, 그 역에 완전히 몰입되어 진짜처럼 연기하는 것 중 배우나 관객은 어느 쪽을 더 선호할지 생각하니 말이다.
극의 말미에서 할머니는 진짜 손자를 알아보게 된다. 하지만 손자를 알아보면 아낌없이 다 퍼줄지도 모른다는 주변 사람들이나 관객의 우려와 달리 할머니는 버릇없는 손자를 따끔하게 꾸짖어서 내쫓는다. 그리고 당신이 진짜 손자를 알아보았다는 티를 누구에게도 내지 않는다. 가짜 가족의 행복과 평온은 유지된다. 할머니가 가짜 손자에게 처음부터 속은 것인지, 그냥 속아준 것인지는 사실 알기 어려웠는데, 진짜와 가짜가 나란히 있는 장면에서 할머니가 진짜를 단박에 알아차린 것은 관객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무대 위의 사람들은 모르고 관객만 알 수 있게 그 느낌을 전한 할머니 역의 배우(정경아)가 참 대단했다고 하겠다.
이 극에서 ‘나무’는 무엇인지 왜 서서 죽는다는 것인지 오래 생각했다. 나무가 눕거나 앉아서 죽을 수는 물론 없다. 왜 하필 제목을 ‘나무는 서서 죽는다’로 했을까. 처음에는 ‘나무’를 한 개인으로 생각했다. 나중에는 ‘나무’가 혹시 ‘가족’을 뜻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진짜든 가짜든 가족에게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서로를 향한 애정과 따뜻함, 존중과 보살핌 같은 덕목들이 아니겠는가. 개망나니 같은 짓을 하며 조부모의 속만 썩이다가 결국 가출해서는 오래 세월이 지난 뒤 그들의 마지막 보금자리마저 빼앗으려 했던 진짜 손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가 아니다. 오히려 늙은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대했던, 사람이 사랑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소장과 마르따아말로 진짜들이다. 나무(가족)는 가족 구성원의 사랑으로 계속 서 있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도 그럴 것이다.
할머니가 가짜 가족을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에는 가짜 손자며느리인 마르따의 진솔한 감정과 행동이 계기로 작동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연극에서도, 가짜라는 걸 다 아는 관객 앞에서 진짜처럼 몰입해서 연기하는 배우만이 관객에게 진짜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저 ‘척’하는 연기는 관객도 금방 안다. 배우가 그저 역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진짜의 감정과 생각으로 연기를 수행하는 배우 앞에서는 관객은 스르르 무너지게 된다. 이번 광주광역시배우협회의 ‘나무는 서서 죽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관객에게 감동을 안긴 것 같다. 할머니 역(정경아)뿐 아니라 할아버지 역(노희철)의 연기도 매우 훌륭했고, 다른 배우들의 열정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