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대하는 삶의 자세] 1764년, 오사카 조선인 살인사건

선린우호 상징 통신사 사절단, 문화적 차이로 공격받아

2024-10-08     강은영
쓰무라별원(津村別院). 현재 오사카시 주오구(中央區) 혼마치(本町) 4정목에 위치한 쓰무라 별원은 1954년 화재 이후에 재건된 것이고, 위의 사진은 화재 이전의 모습으로 제11차 조선통신사가 거처했을 당시의 건물로 사진은 메이지시대의 것이다.(출처:北御堂)

 임진·정유의 7년 전쟁이 끝나고, 일본 열도에는 1603년 에도 막부의 개창으로 평화와 질서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607년 3월 3일, 정사 여우길(○祐吉)이 이끄는 조선통신사 476명이 쓰시마 후추(對馬府中)에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사행은 선린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양국의 서로 다른 학문, 예술, 문화 등을 교류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문화 마찰이 벌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1764년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을 축하하는 제11차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머물렀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에도성에서 공식행사를 마친 일행은 4월 5일 오사카로 돌아와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쓰무라별원(津村別院) 즉 일반적으로 기타미도(北御堂)라고 불리는 사찰에 묵게 되었다. 쓰무라별원은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사원으로 총 9차례에 걸쳐 조선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경내 면적이 약 2000평이었고, 본당(17칸×19칸), 서원, 대면소(13칸), 부엌(9칸×11칸)을 갖추고 있어서 능히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4월 7일 새벽에 통신사의 중관(中官) 최천종(崔天宗)이 목을 찔려 절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천종을 찌른 범인은 도망가면서 발을 헛디뎌 격군(格軍) 강우문(姜右文)의 발을 밟았고, 강우문의 비명 소리에 놀라 깬 조선인 10여명은 일본인 복장에 칼을 찬 범인을 목격하였다. 현장에는 ‘어수(魚水)’라는 글씨가 새겨진 창의 칼날도 남아 있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4월 13일에 쓰시마번의 임시 통역관을 맡고 있었던 스즈키 덴조(鈴木傳藏)가 하인을 시켜서 스스로가 범인임을 밝혔다. 쓰시마로 도망가려 했던 덴조는 4월 18일, 셋츠(攝津) 오하마촌(小浜村)에서 붙잡혀, 5월 2일 통신사 측 54명의 입회 아래 겟쇼섬(月正嶋, 오사카)에서 처형되었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조선 측과 일본 측 기록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공통된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건의 발단은 에도에서 오사카로 돌아온 4월 6일 낮, 오사카 나가하마(長浜)의 선착장에서 하역을 하던 중, 최천중의 거울(면경)이 분실되는 일에서부터였다. 최천중은 일본인들이 도둑질을 잘한다고 하며 일본을 비난하자 덴조도 조선인이 도둑질을 더 잘한다고 하면서 말다툼을 심하게 하게 되었고, 화가 난 최천중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막대기로 덴조를 마구 때렸다. 이에 앙심을 품은 덴조가 무사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최천종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조선통신사선(출처:北御堂).

 선린외교의 표상인 조선통신사 사행 중에 일어난 살인사건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사건을 주제로 가부키와 죠루리(淨瑠璃) 등이 다수 제작되었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범행 동기로는 인삼 밀매의 대금을 최천종이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덴조가 앙심을 품고 살해했다는 이야기, 덴조는 조선인 아버지와 나가사키 유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장사를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고향의 정실와 조카가 사통하였고, 이 일이 발각되자 둘이 합심하여 덴조의 아버지를 살해하였으며, 후에 최천종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온 조카를 덴조가 아버지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그러나 한일 양측의 공식기록이라 할 수 있는 정사 조엄의 사행기록인 『해사일기』와 「종가문고사료(宗家文庫史料)」를 보면, 사건의 발단은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연도를 사행하고, 호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쌓인 감정들이 폭발한 것으로,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는 점이다.

 에도 막부는 막부 개창 이래로 쇄국주의 정책을 고수하였으나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는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쓰시마는 조선 관계를 알선하는 역할을 막부로부터 부여받았고, 통신사를 호행하며 연도에 위치한 번들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었다.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년에 걸쳐 함께 생활하는 동안, 조선 사행단 사이에 쓰시마 도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고, 쓰시마 호행인들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특히 「종가문고사료(宗家文庫史料)」의 보고에 따르면, 덴조의 살해 동기는 최천종이 대중 앞에서 막대기로 때린 것인데, 조선에서는 아랫사람을 막대기로 때리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무사가 맞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제11차 조선통신사 사행은 1763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해 1974년 7월 8일 귀환해 복명하기까지 총11개월이 걸렸다. 최천종 살인사건으로 오사카에서 예상치 못한 한 달 동안의 체류를 감안한다면 10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사행길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사행과 호행 동안 양측의 감정과 문화적 차이가 최천종 살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불러온 것이다. 이번 사행단은 마지막으로 에도 입성을 하였고, 이후 덴메이의 대기근으로 인해 조선통신사 초청은 연기되었으며, 최후의 사신단(1811년)은 에도가 아닌 쓰시마까지만 가게 되었다.

  강은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