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소중한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이
[임유진의 무대읽기]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배신과 부도덕에 웃지도 울지도…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제27회 ‘광주연극제’ 참가작으로 상무지구에 있는 ‘기분 좋은 극장’에서 9월 27일부터 10월 2일까지 공연한 작품이다. 서술어로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이 여지가 많은 제목을 들으면 대부분 세 가지 정도에 집중할 것이다. 하나는 시간이다. 네가(내가) 집을 비운 그 시간. 두 번째는 장소다. 집이라는 장소. 마지막은 사건이다. 내가(네가) 잠시 비운 그 시간에 내(네) 집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일까.
이 세 가지가 뇌리를 점령하면 대개는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이나 혹은 기대도 따라올 것이다. 더구나 집이라고 하는 공간은 편안함, 보호, 안전망 같은 개념과 상호작용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나를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나의 사적 공간이고, 내가 가장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그곳에 (주인인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바로 그런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조금은 불안해하면서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을 보러 갔다. 2020년에 나온 동명의 영화(감독 강민규)가 있어서 혹시나 했지만, 영화와 연극은 다른 작품이었을 것 같다. 영화는 안 봤다. 그렇지만 두 작품이 제목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작품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연극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서는 집주인이 없는 사이 도둑이 집을 털러 침입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느 채널에선가는 반드시 방영하는 미국 영화 ‘나 홀로 집에’가 떠오르면서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주인 없는 집에 도둑이 든다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전개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홀로 집에’에서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 꼬마에게 두 도둑이 된통 당하듯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집에 들어간 도둑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집주인이 돌아온 상황이다. 목표물로 삼은 집에 아무도 없어야 마음 놓고 물건을 집어서 나오는 것이 도둑질인데, 주인이 돌아왔으니 미처 도망을 가지 못한 도둑은 숨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집주인은 아내 몰래 만나는 여자와 함께 돌아왔다. 이들에게도 상황은 맘대로 되지 않는데,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한 부인이 갑자기 귀가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없는 집에서 연인과 밀회를 즐기려 했던 남자와 그 남자의 연인은 어쩌면 도둑보다 더 당황한다. 남자의 밀회 상대는 도둑과 마찬가지로 숨기에 바쁘다.
여기까지는 꼬이고 꼬이는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이 어떻게 상황을 풀어가는지 볼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도도하고 고고해 보이는 부인도 사실은 남편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는데, 그 남자가 남편이 만나는 여자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러니까 그들 네 명이 서로의 배우자를 탐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거기에다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맘 편히 도둑질을 하고 있을 남편(도둑)을 보러 온 아내까지 등장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이렇게 글로 풀어놓으니 우습고 재미있는 상황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잠깐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은 들었지, 남편은(아내는)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것 같지, 어떤 방법을 써도 상황은 해결될 것 같지 않지,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사면초가는 우습거나 재미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전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무대에 펼쳐놓고 연극은 관객을 웃기려 했다.
코미디는 참 위험하다. 관객을 웃겨야 하는 배우에게도, 웃기려 애쓰는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별로 혹은 전혀 우습지 않은데, 상대가 혼신의 힘을 다할 때가 가장 위험할 때다. 저렇게도 나를 웃기려 하는데, 내가 그 노력을 헛되게 하는구나 싶으면 난감해지니 말이다. 때로는 웃지 않은 자신에게 환멸까지 느껴야 한다.
서로 상대방의 배우자와 외도를 하는 상황이 한국적이지 않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그렇다고 그런 상황이 한국적 문화와 잘 어울린다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도대체 내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는데, 내 애인의 배우자와 바람을 피우는 남편 혹은 아내, 거기에 도둑까지 맞닥뜨리는 상황이라니.
이번 극단 ‘논다’의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는 줄거리며, 대사며, 배우의 연기까지 모두 관객에게 말초적 재미와 웃음을 선사하느라 가진 에너지를 다 쏟는 것 같았다. 지금이 그런 때인가, 싶어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연기를 보면서 한바탕 웃고 잊어버려야 할 정도로 사회가 각박하고 힘든가 싶어졌다. 왜냐하면 정말 폭소를 터트리면서 재미있게 보고 무대와 소통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당신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 무언가는(누군가는) 당신의 것을 가져가려고 한다. 당신의 소중한 공간을 망가뜨리려고 한다.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 당신이 당신의 소중한 것을 돌아보지 않는 사이, 당신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진부하지만, 진부한만큼 마음에 다가오는 어떤 무대를 기대했다가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돌아서면서 괜스레 사회만 탓하고 말았다.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맥컬리스터 가족은 집을 비운 사이 훌쩍 커버린 꼬맹이 케빈을 보게 된다. 그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게 된다. 연극 ‘당신이 집을 비운 사이’에서는 뭘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극에서 난무한 건 배신과 부도덕뿐이었다. 영화에서는 남의 것을 훔치려 했던 이들을 응징했지만, 연극에서 도둑은 온정을 얻는다는 차이는 있었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