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이었던 한 남자와 가족의 삶

[임유진의 무대읽기] ‘아버지의 해방 일지’ “사람인께 글제. 오직허믄 그라겄냐”

2024-11-13     임유진
놀이패 신명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

 지난 8월 23일과 24일 광주 서빛마루문화예술회관에서는 ‘아버지의 해방 일지’라는 제목의 공연이 있었다. 놀이패 신명이 마당극 50주년을 기념하면서 제44회 정기 공연으로 올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소설가 정지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마당극 형식을 취한 무대극으로 만들어졌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아버지가 죽었다. 이렇게 말하는 화자는 전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에서 몹시 힘들게 살아내야 했던 외동딸이다. 즉 ‘아버지의 해방 일지’는 지난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방점을 찍은 좌우 사상의 충돌과 투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한 남자(아버지)를 바라보는 한 여자(딸)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구체적으로는 빨치산으로 살았던 아버지가 죽고 장례를 치르는 3일 간의 이야기다.

 마당극 형식이라지만 무대에 올리다보니 빨치산 아버지가 활동했던 지리산을 형상화한 배경이 뒤쪽 무대에 고정적으로 세워져 있다. 소설에서는 주로 화자의 회상신에서 아버지가 나온다. 문자언어로 돼 있는 소설에서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배우가 연기해야 하는 연극에서는 이미 죽은 아버지를 어떻게 처리할지가 문제였을 텐데, 신명은 처음부터 아버지를 무대에 세운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유령 되겠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씩씩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동안 꼭 어느 대목에선가는, 그것도 꼭 중요한 대목에서 딸은 아버지의 사상과 활동이 걸림돌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데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삶은 딸에게뿐만 아니라 친척에게도 삶의 걸림돌이 되어 그들을 넘어지게 만든다. 장례식이라는 현실적인 시간 3일 안에 소설은 70여 년의 세월을 망라하여 빨치산이었던 한 남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친척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과 수난을 보여준다.

 그 방대한 서사를 무대에서 형상화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어떤 에피소드는 보여주고 어떤 것은 넘어갈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서 그 일을 진행할 것인가.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신명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가 출간되자마자 인구에 회자되고 소설로서는 보기 드문 판매고를 올린 동명 소설을 완벽하게 형상화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놀이패 신명의 ‘아버지의 해방 일지’.

 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는 해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가 소위 ‘빨갱이’라고 부르는 그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을 조금은 허물었다는 것이다. 20년 가까운 옥살이를 마친 뒤, 자본주의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버스도 다니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에 고향이랍시고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전직 빨치산(빨갱이) 고상욱. 그의 신념은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인께 글제. 오직허믄 그라겄냐.

 그가 좌익 활동을 하고, 자본주의를 타도하려 했던 것의 근간에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모든 일에 이렇게 말한다. 다 이유와 사정이 있겠지. 이것이 그의 휴머니즘이다. 빨치산이라는 직업을 행하고 있을 때 말고는 약간 어리숙하면서 자신은 모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코미디적인 삶을 사는, 살았던 한 인간 고상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또 하나는 특별한 아버지 때문에 오랜 시간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던 딸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찾아온 화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결국은 핏줄이니까라든가, 아버지는 아버지니까와 같은 이유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 삶과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갈등을 끝내는 과정을 관객은 확실하게 전달받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어쩌면 소설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신명의 작업은 거칠고 투박한 면이 없지 않았고, 배우의 연기적인 측면에서도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오랜 세월 대한민국에서 편견과 선입견으로 덕지덕지 발라진 채 거의 누명이라고 할만한 그물을 쓰고 살아갔던 그리고 죽어갔던 그들에게서 그물을 벗긴 점. 그리고 남은 이들이 오해와 원한을 풀고 사람으로서의 그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지점.

 마당극 전문 연희패를 표방하면서 신명이 활동한 지 벌써 수십 년이 흘러 45회 정기 공연을 앞두고 있다. 여러 가지 여건상 마당극다운 마당극을 올리지 못할 때도 이렇게 우회적으로 무대 위에서나마 마당극 형식의 극을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이번 제44회 정기 공연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디딤돌로 하여 한층 더 성장하고 발전하는 놀이패가 되어 우리 곁에 늘 머물기를 바란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