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백성을 더이상 광장으로 내몰지 말라

2024-12-13     채정희 기자

 1898년 11월 5일,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설렘 가득하게 맞이할 날이었다. 독립협회와 고종 황제의 합의로 중추원 의관(의원)을 선출키로 한 날, 왕정-황제국으로 이어진 대한제국에 ‘의회’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선출될 의원은 50명으로 독립협회 25명, 황제가 25명을 추천키로 했다. 왕정에서 권력을 분산해 입헌군주국으로의 전환, 백성들은 환호했지만 황제가 이를 반겼을리는 만무한 일. 수구파들과 합세한 반격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만민공동회를 주도해온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려 한다’는 익명서에 기반해 의관 선출 전날인 4일 밤, 황제가 행동에 돌입했다. 경무청(경찰) 병력을 총동원해 독립협회 지도자 20명을 적시, 체포토록 한 것이다. 이상재·정교·남궁억·이건호·방한덕·김두현·윤하영·염중모 등 명단에 든 17명이 체포·구금됐다. 윤치호 등 몇몇은 체포 직전 피신했다. 독립협회도 해산시켰다.

 대한민국 최초 의회의 탄생사는 이토록 험난한 것이었다.

 2024년 12월 3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인 이 장면이 오버랩됐다.

 대통령이 헌법상 기관인 국회 장악을 모의하고 실행하기 위해 계엄군을 투입한 날이다.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봉쇄했고, 체포·구금하라는 정치·사회적 인사 명단이 군경에 하달됐다. 우원식(국회의장)·이재명(더불어민주당 대표)·한동훈(국민의힘 대표) 등 14명이었다.

 정치가 길 잃을 때마다 열리는 광장

 암울한 시대,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그 힘은 국민으로부터 나왔다.

 1898년 11월 5일 아침, 17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독립협회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분노했다. 배재학당 학생들을 비롯해 일반 백성까지 수천 명이 삽시간에 경무청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시민들이 외쳤던 구호가 “나도 잡아가라”였다.

 시위는 밤에도 그치지 않았다. 횃불을 밝힌 밤 거리가 대낮처럼 환했다고 한다. 시위대에 힘을 보태는 지원 물품도 쇄도했다. 어떤 이는 장국밥 300그릇을 보내고, 또 다른 이는 은화를 기부했다는 기록이다.

 황제와 수구파는 당황했다. 무력 진압 등 수습책을 논의했지만 실행하진 못했다. 시위가 6일 째 되는 날, 황제는 체포된 17명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1월 23일까지 19일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백성들은 차가운 겨울비 속에도 만민공동회를 이어가 해산된 독립협회의 복설(없앴던 것을 도로 설치함)까지 쟁취했다.

 2024년 ‘12·3’ 사태 이후 우리 국민의 행보 역시 126년 전 그들과 다르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으킨 ‘12·3 비상계엄 사태’ 당일 밤, 국회를 지키겠다며 여의도로 모여든 시민들은 계엄군의 본청 집입을 막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이후 국민들은 매일 저녁 국회 앞에서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 행진을 벌이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같은 목소리의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사정상 집회에 참석하진 못한 시민들은 집회 현장 주변 가게에 ‘선결제’, 시위대를 물적 지원하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이름도, 번호도 밝히지 않은 이들의 마음은 분명하다. 추운 날씨 속 시위에 나선 시민들이 조금이나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다.

 광장의 힘으로 밀실의 권력을 깨부수는 역사가 재현된 것이다.

 윤 대통령 탄핵, 이번엔 기필코

 하지만 광장의 힘은 지속적이지 않다는 게 한계다. 다시 120여 년 전 상황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광장 권력을 무력화시키려는 황제와 수구파의 작업은 집요했다.관변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한 물리적 습격도 그중 하나였지만 별 효과를 거두진 못했다.

 황제는 제도적으로 권력을 공고히 해 나갔다. 11월 29일 황제가 지명한 중추원 의관 50명이 그 산물이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계열 17명, 황국협회 계열 16명, 황제파 17명이었다. 황제와 황국협회 등 수구파(33석)가 3분의 2를 차지한 것이다.

 이같은 황제의 반격에, 백성들은 만민공동회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만민공동회 재개 18일째(12월 23일),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독립협회 측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광장에 모여 구세주가 돼줬던 백성들의 투쟁 동력이 미약했다. 초창기와 달리 민심과 괴리된 독립협회 측 행보가 미친 영향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결정적인 건 두 달여째 이어져온 광장에서의 투쟁이 ‘생업 차질’이라는 현실적 한계에 봉착한 게 컸다.

 이렇게 광장을 접수한 고종은 이듬해인 1899년 ‘대한국국제’를 선포했다. ‘대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주권을 누린다(3조)’. 광장의 힘으로 한때 입헌군주제를 바라봤던 대한제국은 다시 절대 왕정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광장을 비워두면 밀실이 성행하고, 그곳에만 매몰돼 있으면 생업이 흔들린다. 광장에선 ‘밥’이 나오지 않는다, 정치 부재 시마다 국민들이 열어제낀 광장의 역설이다. 백성을 광장으로 내모는 정치가 민생에 얼마나 패악인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해서 100여년 전 그 실패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백성을 더 이상 광장으로 내몰지 말라.” 오는 14일, 국회가 윤 대통령을 반드시 탄핵시켜야 할 이유다.

 채정희 편집국장 goodi@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