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위에 새긴 염원…국장생과 고인돌을 찾아서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심란한 마음 안고

2025-01-03     전고필
죽정리 국장생.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12월은 요란하게 시작되었고 그 달은 아직 내게 가시지 않았다. 내가 고대하던 그달은 12월 10일 한강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을 실감하는 것이었는데, 3일 밤 난데없는 비상계엄이란 말에 억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80년대를 관통하며 살아왔던 삶에서 다시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내 분야에서 묵묵히 견디며 한걸음씩 나아갔는데 모든 시간이 다시 되돌이표로 돌아가는 허망한 순간을 마주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명한 이들의 대처는 망연자실한 나와는 달랐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내고, 총부리를 거두어내고, 촛불이 아닌 응원봉을 들고 국회로 광화문으로 헌법재판소 앞으로 운집하는 새로운 미래를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미래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는 나에게 한 선배는 우리는 군사독재와 경제 부흥이라는 시기의 곤궁한 시대였다면 광장에 나온 젊은이들은 OECD국가는 경제적 안정과 한류라는 문화적 자긍심을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세대이니 오늘 낙후된 독재 치하에서 사는 나라의 국민들과는 성향이 아예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기준점을 던져주었다. 그러니 우리 시대부터 불렀던 민중가요라는 단호하고 투쟁적인 문법보다는 “다시 만난 세계”와 같은 리듬과 조화로움이 더 필요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보니 일터에서나 밖에서나 온 신경은 초유의 혼란인 이 상황에 대해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고 일상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런 일들로 연말이 다가왔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무안공항에서 참사가 발생하니 이제는 걸어 다닐 의욕조차 꺾이고 말았다. 어찌 우리 공화국에 이런 시련을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주는 것인지 원망스러워 하늘을 째려보았지만 공허한 메아리일뿐. 모처럼 새해 휴일임에도 책도 손에 잡히지 않고, 고작 하는 일이 테블릿을 켜고 뉴스나 지켜보며 한숨만 쉬고 있는 내가 답답해 망설이는데 문득 우리 수호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월출산의 구림마을로 해가진다.

 수문장 찾아

 그가 있어 우리내 삶과 삶이 이어주는 땅을 잘 보듬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며 가까이 있는 그런 수문장을 찾아보는 길을 나서 보기로 했다. 재작년 초여름 지하여장군, 천하대장군과 같은 장승의 원형이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던 경험이 또렷했음도 한몫했다. 그런 이후 영암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바쁘다는 혹은 관심의 부재로 찾아뵙지 못했음도 몸을 움직이도록 부추겼다. 한분 한분의 장승은 기억해도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니 네이버에 주소 검색을 하고 다시 내비게이션에 의탁했다.

 평소에도 자주 뵙는 죽정리의 장승은 가장 나중에 가기로 하고, 내가 만나야 할 분은 소전머리의 황장생이다. 지방문화재명에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사람 사는 근동 특히 시장 근처가 분명할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마을 안으로 들어가 밭을 가로질러 대숲 언저리였던 것이 떠오르는데 차는 들판 한가운데에 있다. 하필 주소지가 잘못된 곳을 내가 선택해버린 결과다. 지금이야 영암 곳곳을 자주 다니니 어디가 어디에 있는줄 아는데 그때는 초행길이라서 장승을 만나는데에만 집중했지 이렇게 어렵게 찾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영암 소전머리 황장생.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각각 주소지가 다르게 나온다. 그런 다른편을 믿어 보기로 하고 다시 내비에 의지한다. 분명 멀지 않은 곳이라는 감이 드는데 6킬로 미터는 돌아야 한다고 뜬다. 못 믿을 내비. 지도를 보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도로번호와 지도에 의지해서 차를 가지고 다니고 마침내 못 찾으면 근처의 논밭에서 일하시는 분들이나 가게에 들어가서 물어 기어코 찾아갔던 날이 벌써 이십여년 전 일이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과 정보통신의 발달이 물밀 듯이 몰려올 때 나는 어디에 서야 할지 주춤거렸던 적이 있다. 대저 이 정체모를 도구와 매체들이 자꾸 인간의 영역을 축소해 버리려는 것 아닌가 하고 째려보고 적응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타자기도 자판기도 아닌 연필로 글을 밀고 나가는 김훈 선생님을 존경했고, 아직도 핸드폰을 지니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살고 있는 누군가를 흠모했다.

 내가 굴복해버린 것은 대학원 다닌다고 서울로 올라가서 리포트를 작성하던 때인 1996년부터이다. 학교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니 “아래 아” 한글을 배우고 덤으로 “테트리스” 라는 게임도 배웠다. 그렇게 나는 컴퓨터에 길들여지기 시작해서 이것저것을 배우고 마침내는 지면으로된 신문도 잘 안보게 되고 네이버의 뉴스스탠드에 내가 정한 신문사와 방송사를 취사해서 본다. 대부분의 검색도 버릇이 되어버린 네이버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그 언저리만 맴돈다. 그러니 잘못된 정보도 내가 공부해 놓지 않으면 진짜로 믿는 경우가 태반인 것이 늘 한계라 생각할 수 밖에 없고, 어쩌면 새로운 것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더듬거리거나 긴장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흐릿하게 황장생이라는 글의 윤곽이 보인다.

 매년 개설되는 새로운 도로 덕분에 지도를 샀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린다. 지도가 있었을 때 내 눈은 도로 표지판이 언제 나오는가에 집중되며 주변의 풍경도 덤으로 보았는데, 딱딱 갈곳만 가르쳐주는 내비 덕분에 내가 가는 길의 배후에 대한 정보조차도 생략해 버렸다.

 이제 잠시 내비를 켜둔 체 내가 원하는데로 길을 택한다. 10여분 걸린다는 소요시간이 4분으로 바뀐다. 샛길에 서성이는 나에게 큰 길로 가서 다시 내려와 샛길로 들어가라는 배려가 6분을 앗아간 것이렸다. 소소한 나의 승리를 자축하며 동구림리 326-8번지로 접어들었다. 2년 전에는 이길이 아니었는데 대숲을 보니 여기가 맞다. 황금교회라는 건물을 지나니 정자가 나오고 그 왼쪽편으로 밭이 있고 대밭이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200여미터를 걸어서 밭의 한 귀퉁이에 검은 빛깔의 돌로 황장생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황실이 세운 장생이란 표식이다. 안내판을 보니 도갑사 아래 죽정마을에 있는 죽정리 국장생과 동시대에 세워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전설이 깃듯 죽정리 장수 발자국.

 언제부터 장승이라 불렸나

 사실 우리가 장승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후기부터이고 삼국시대와 고려전기까지는 장생이라고 불렀다 한다. 장생-장승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우리는 늘 장승만 보고 살았다. 그것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라는 이름으로만 만났다. 하지만 이런 장승의 연원을 찾아보면 고려 선종 2년때인 1085년 양산통도사에 국장생 석표가 현존하고 있다. 이 절을 국가가 후원하며 관리하는 곳이 이곳까지임을 알리는 12개의 표석중 2기가 남아있는 것이고 이를 좀 더 파악해보면 사찰의 풍수적인 보호까지도 도모했던 것이다. 이제 내 발걸음은 진짜 연식이 표시된 곳을 찾는 것이다.

 다음 코스는 내가 너무 잘 아는 곳이다. 여름 어느때는 그곳에서 영지버섯을 채취해 술을 담그기도 했다. 그곳은 영암 군서면 죽정마을에서 도갑사로 가는 길 카페 하루를 지나 200여미터를 가면 왼쪽 개울가에 장수발자국이라는 안내판이 하얗게 보이는 근방 도갑리 291-15에 있다. 기왕 왔으니 김완장군인지 도선국사인지 모르지만 비범한 분이 발을 딛어서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패인 바위도 친견했다.

 ‘햇빛에 바래면 신화가 되고, 달빛에 그을리면 전설이 되고, 삼대가 우기면 진실이 된다’는 그런 말이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모두가 입의 말, 즉 구전으로 전하며 이야기가 확장된 시기의 일이 된다. 지금은 유튜브로 우기면 진실이 되는 시기인데 거기에 AI까지 가세하니 설상가상으로 거짓이 구별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오늘까지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용산에 또아리를 틀고 나오지 않고 있으니 나라의 꼴이 말이 아니다.

국장생이라는 명문이 또렷하다. 그 아래에 석표사좌는 가뭇하다.

 발자국 바위의 맞은편 봉긋하게 있는 산자락으로 간다. 계단으로 길이 나 있다. 과거 어느 집안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장을 하고 참나무 군락 사이로 비석이 보인다. 국장생이다. 영암문화원에서 발간된 영암의 금석문이란 책에는 국장생이라는 한문 글씨 아래에 석표사좌(石標四座)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써진 자료가 있다. 국장생 네 번째 자리라는 뜻이니 먼저 만났던 것과 함께가 분명하다.

 바로 맞은편 바위도 넘어갈 수 없다. “건릉향탄봉안소표내금호지지”라는 한자가 각인되어 있다. 정조의 능인 건릉에 사용하는 향과 숯을 공급하는 곳이니 보호하라는 의미다. 사찰의 경계영역 표시와 건릉에 쓸 재목을 보호하는 곳이 묘한 일치감이 든다.

고인돌 위에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이란 글이 새겨졌다.

 잠시 걸음을 옮겨 삼거리로 가다 풀이 사라진 수풀더미 속을 본다. 4기의 고인돌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도 암각문이 있다니 찾아본다. 관음보살정(觀音菩薩亭)이란 글씨가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세로의 글 사이 가로 방향으로 돌을 털어내기 위한 정자국이 보인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자리에 석연치 않은 채석작업은 필시 이 돌을 입상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닌가 상상해 보는 것이다.

 고인돌의 상석돌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파져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자국, 성혈이다. 발복이나, 자식을 점지해달라는 사무친 기원이 처절하게 바위를 파낸 것이다.(이어집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