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힘

[작은책방 우리책들] 너라는 생활 (2020, 문학동네)

2025-01-13     호수

 2025년 을사년. 새해를 맞이한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래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역할은 달력의 끝과 시작을 나누는 것일 뿐, 시간을 식빵 자르듯 갈라내지 못한다. 나는 새해가 시작되는 그 날에 거제에서 한화오션 조선하청지회 투쟁문화제에 함께했고, 해가 넘어가고서도 몇 번이나 거리에서 시간을, 그리고 밤을 지새웠다. 달력은 넘어갔지만 일상은 넘어가지 않았고, 이 넘어가지 않고 연결되는 모든 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정말 원하는 새해는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4년 12월 초부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는,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다. 수없이 많은 차이와 격차 속에 함께 걷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응원봉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함께라면, 우리는 이 차이와 격차에 대해서 상상해보아야 한다.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라는 인상 깊은 문장 덕분에 젊은 시민들 사이에서는 노동조합, 노동자, 복직투쟁 같은 용어들이 낯설지 않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나에게도 그러했다. 또한 거리를 오가며, 사람들의 말을 듣고 또 생각하며, 사실 이것은 정말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간편한 동정이며 값싼 동조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위험성에 어떻게든 숨구멍을 내고 새로운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상상의 힘이다.

 김혜진의 ‘너라는 생활’(2020, 문학동네)은 이러한 간편함과 값싼 감정들을 향해 푹푹 내지르는 언어를 묶은 소설집이다. 수많은 ‘너’와 ‘나’의 경험을 담은 이 소설집은 거주권, 계급성, 퀴어성,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틀어 ‘너’와 ‘나’의 차이에 대해 쓰였다.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타자화되는 감각에 대해 쓰였다. 김혜진의 언어는 섣부른 결론을 내지 않지만 항상 적확하여서, ‘나’의 감정이 어떻게 요동치는지를 직접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건넨다.

 2020년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장소와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는 장소에 순간순간을 의탁하여 살아가는 것에 가까운 일이다. ‘너라는 생활’은 이러한 의탁, 불안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 불안정 위에서 관계들이 어떻게 유지되는지, 과연 유지될 수는 있는지, 유지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떤 감정들이 오가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나’들은 “나 혼자”라는 감각 속에서 ‘너’와 함께 나의 생활을 인식한다. 그러다 그것이 연약하고 아프고 불쾌하다는 사실을 알기도 하고, 그럼에도 계속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선한 것이 선하지만은 않고, 조악하고 비열하게 느껴지는 감정들이 진실되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고백이 별 수 없는 세계의 불합리한 균열들 속에서 그 균열을 어떻게든 채워나가는 개인들에 대한 헌사라고 느껴졌다. 너라는 생활에 엮여있던 내가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고.

 이렇듯 직접적인 언어들은 직접적으로 들어야 한다. 마음을 열고 내가 ‘나’라면, 혹은 ‘너’라면 어떻게 느꼈을지 면밀히 더듬고 상상해보아야 한다. 타자화를 논하는 글을 타자화하며 값싼 동조로 언어들을 차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말과 상황들이 누군가에게는 책장을 덮는다고 해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진실로 알아야 한다.

 나는 연말 연초에 부끄럽고 또 오래 괴로웠다. 책장을 덮으면, 고개를 돌리면 사라지는 이야기로 그 모든 것들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집 없는 자들의, 당장 내일이 두려운 자들의 이야기를 타자화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너’들 중에 내가 이미 속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잔인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내가 이렇듯 뒤늦게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너라는 생활’이 넌지시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여기 있었다’고. ‘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고. ‘너라는 생활’은 악역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고자 부던히 노력해온 이야기다.

 상상의 힘은 강하다. 얼마나 아프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 제대로 상상해본다면, 그리고 그것이 항상 실존하는 일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침내 나를 이 세상에 묶어두는 결속이 된다. 땅에 발붙이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지 않게 해준다. ‘너라는 생활’은 그 상상의 물꼬를 터주는 책이다.

 원하는 테이블에 앉아 주문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만족스러운 저녁 시간을 보낼 자격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우리도 그만한 값을 치렀다고, 나는 당연한 요구를 했을 뿐이고 때론 요구하고 주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그건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너라는 생활’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당연해 보이는 세계에서 ‘미안해야 할 일’, ‘불필요한 일’을 해내며 살아간다. 당연한 것을 누리지 못하므로 요구하고 주장하고 시끄럽게 구는 것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노총이, 전장연이, 그리고 새로운 을사년의 폭죽이 터져도 이전과 한치도 달라지지 않은 채 계속 노동하고, 이러한 생활이 왜 이어져야 하는지 고심하는 수많은 ‘나’들이 그렇다.

 상상해보자. 그들은 ‘그들’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도 아니고, ‘너’다. ‘내’가 있으면 언제나 존재할 수 밖에 없는 ‘너’. 그리고 제발, 2025년에는 이 ‘너’라는 생활들을, 우리가 진정으로 상상하고 고심해볼 수 있기를, 그래서 그들의 요구와 주장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문의 062-954-9420

 호수(동네책방 ‘숨’ 책방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