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만용 교수, 한국 과학과 과학 한국] 한국 과학기술의 압축적 성장 요인

과학기술자들 오랜 갈망, 과학정책 견인

2025-02-04     문만용
과학기술처 개청식: 출처 국가기록원.

 2014년 말레이시아 알로 세타르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한국의 현대과학사에 대한 필자의 발표 후에 필리핀의 한 학자가 질문을 했다. “1960년대까지 필리핀의 경제와 과학기술이 한국의 그것보다 나은 수준이었지만 7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필자가 볼 때 한국과 필리핀의 과학기술 발전 궤적에 결정적 차이를 주었던 요인이 미국의 기술 원조인데, 왜 미국은 필리핀에 기술 원조를 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1950년대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고, 농업 중심의 경제구조에 해외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필리핀은 당시 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국가 중 하나였다. 1960년대 들어 한국이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경제 모델을 채택하고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지만, 필리핀은 다소 더딘 성장세 속에서도 여전히 한국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 수치를 보였다. 하지만 필리핀은 1970년대 들어 정부의 부패와 경제 정책의 실패로 경제성장이 크게 둔화되었고, 반면 한국은 고도 성장기에 진입하면서 양국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필리핀의 상황에 대해서는 필자가 충분히 얘기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로 볼 때 필리핀 학자의 의견은 올바르지 않았다. 물론 미국이 한국에 물적 지원과 노하우 등을 기술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한 것은 맞고, 2차대전 후 미국이 지원한 30개국 중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안정적 민주주의를 모두 달성한 나라는 한국과 대만뿐이라는 평가도 유효하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이 한국 과학기술의 빠른 성장에 가장 중요하거나 유일한 요소는 아니었다.

  “과학기술 진흥, 진정한 독립의 요건”

 우선 해방 직후부터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과학기술의 진흥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면서 정부가 과학기술 육성에 나설 것을 요구한 과학기술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들은 과학교육을 강화해 관련 인력을 늘리고, 제대로 된 연구소를 설립하고, 과학기술 행정을 책임질 정부 부처를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한국전쟁에 의한 파괴 속에서 그들의 주장은 현실적인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정부는 각 지역에 이공계 단과대학을 갖춘 종합대학을 설치함으로써 이공계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응답했다.

 과학기술자들의 갈망은 1960년대 중후반 정부가 과학기술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하나둘씩 실현되기 시작했다. 1966~67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과학기술처가 설립되고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었으며, 과학기술자들의 대표 기관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조직되고 한국과학기술후원회(한국과학창의재단 전신) 등 과학기술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들도 하나씩 설치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언론으로부터 “과학기술 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이는 한국에서 현대적 과학기술체제가 갖추어지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정부는 1970년대 들어 한국 과학기술을 이끄는 기관차로 불리는 대덕연구단지의 건설과 분야별 정부출연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과학기술 연구 개발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이러한 정부 시책에 발맞추어 과학기술자들은 연구 개발을 위한 노력을 펼쳤으며, 이는 1980년대 들어 국가연구개발사업으로 이어져 한국의 위상을 새롭게 한 여러 과학기술 성과를 낳았다.

  국제 협력과 한국의 대중 

 이러한 기획의 구체화에 필요한 기술적·경제적 자원을 제공했던 국제적 협력 활동도 뺄 수 없다. 1966년 KIST의 등장에는 미국 정부의 연구소 설립 지원 제안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연이어 설치된 정부출연연구소들도 여러 국제기구로부터 차관이나 기증을 받아 필요한 장비와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한 연구소에서 일하던 한국인 과학자 중 상당수는 해외에서 공부하고, 관련 연구 경험을 쌓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또한 기업이나 연구소들은 기술 이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술을 해외에서 들여왔고, 이는 한국 과학기술의 성장에 국제적 협력이 의미 있는 역할을 했음을 뜻한다. 물론 해외 기술의 소화·개량에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대중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과학지식보급회를 시작으로 과학기술의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언론이나 과학기술계의 ‘과학 기술 풍토 조성’ 노력에 다수 한국인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KIST 초기 핵심인력으로 합류한 연구자들에 대해 중앙 일간지가 사회면 톱기사로 널리 소개하는 등 언론은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홍보를 아끼지 않았다.

 필자가 인터뷰한 두 명의 원로 과학자들은 1970년대 초반 택시를 타고 KIST에 출근했을 때 택시 기사가 “나라를 위해 해외의 편안한 삶을 버리고 귀국한 과학자들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며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는 얘기를 전했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당시 대중이 과학기술 혹은 과학기술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잘 보여준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대성공을 거두게 된 배경에는 한국인들이 과학에 대해 보여주었던 큰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

  ‘최소량의 법칙’과 한국 과학기술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로 시작한다. 여기서 생겨난 ‘안나 카레니나 법칙’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고, 하나의 조건이라도 갖추어지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실 톨스토이에 앞서 독일의 식물학자 리비히가 “필수 영양소 중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넘치는 요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최소량의 법칙’을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이 원리가 식물뿐 아니라 가정이나 회사, 국가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즉, 성공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요소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한다. 한국 과학기술의 압축적 성장도 미국의 기술원조나 정부 정책이라는 특정한 원인 덕분이 아니라 그 과정에 참여한 여러 주체와 요인의 다양한 역할이 결합된 결과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만용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 K-학술확산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