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 눈맞추며 놀멍놀멍 걸은 오름과 올레길

[전고필의 터무니를 찾아서] 제주의 겨울

2025-02-07     전고필
내수면 방파제에 꽂힌 올레길 표식.

 눈이 풍성하게 내리는 날이다. 전방위로 이동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눈은 풍년을 예감해주는 행운의 표징이었다. 사람과 사람, 도시와 도시간의 이동이 잦아지며 비와 안개와 눈은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도 문명의 발달과 함께 효용의 가치가 달리 표현되는 시대를 걷고 있다.

 눈이 내리면 나는 먼저 시인 백석을 떠올린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여우난곬족, 흰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와 함께. 연이어 최승호의 대설주의보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오탁번의 폭설, 김진섭의 백설부, 김광균의 설야 라는 시 등을 연상하게 된다.

 눈 내리면 온세상은 삼수갑산이 되고, 이 정경이 선물한 감성은 나를 다시 길 위에 서성이게 한다. 영암의 회사나 집, 카페, 식당 어느 곳이든 문을 열면 환하게 산정을 드러내는 월출산은 더욱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고 주구장창 그 산만 탐닉할 수 없기에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는 찰나 제주로부터 전화가 왔다. 청춘을 함께했던 형이 성읍에 식당을 연지 2년여만에 새로 집을 장만했다고 한다. 2층 집인데 1층은 셰어 하우스로 언제고 이용하게 할 터이니 다녀가라는 전갈이다. 거기에 난데없는 E-메일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 항공 두 항공사가 2024년도 마일리지 말소분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끈다랑쉬를 움켜쥔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한라산이 보인다.

 회사의 여건상 쉬이 운신하기 힘든 터이지만 물경 30여년을 쌓아온 창공 위의 행적을 그냥 소멸시키기에는 내상이 컸다. 그래서 1월 말경으로 제주 왕복 티켓과 8월말로 일본 오사카 왕복 항공권을 예약했다.

 성사된 제주여행

 그렇게 나의 1월 제주여행은 성사되었다. 제주허씨 족속인 렌트카에 종속되지 않기로 맘 먹고, 오로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여 성산일출봉 근처 형의 집에서 숙박하며, 걷기에 주안점을 두는 뚜벅이 여행이었다. 이른 아침 광주공항에서 40여분만에 제주에 입도했다. 동편으로 가는 버스는 성산행과 성읍행으로 나뉘는데 40여분에 한대 꼴이었다. 거의 풀로 기다려도 오지 않자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터미널로 들어가 마침내 성읍행 버스에 올랐다.

 고요하게 창밖으로 펼쳐진 중산간 지대의 표정을 읽다가 어느덧 성읍. 승합차를 몰고온 형과 정류장에서 만나 식당에 이르렀다. 흑돼지와 더덕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한가해 보였다. 500여명을 수용하는 식당이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계절은 수학여행철인 봄과 가을이고 그 나머지는 여행사 예약과 현지에서 검색해 들어오는 분이라고 했다. 늦은 점심을 먹었다. 더덕과 고사리와 함께 먹는 흑돼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용눈이 오름 왼편으로 다랑쉬오름과 오른쪽 둔덕같은 아끈다랑쉬오름의 모습.

 배가 든든해지니 이제는 정해지지 않는 길에 편입해야 할 시간. 나는 다랑쉬 오름을 호출하고 여건에 따라 아끈다랑쉬 오름을 갈지 아니면 다랑쉬오름을 갈것인지 결정하기로 했다. 형의 차를 타고 그렇게 두 오름의 사이에 내렸다. 바람이 세찬 제주의 겨울 날씨지만 시야는 청명하게 트여 있었다.

 새끼(아끈) 오름으로 오르기로 결정하고 사부작사부작 산정으로 향한다. 수없이 올랐던 오름길의 탐방로가 새로운 길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답압(토양이 압박을 받아 숨구멍이 없는 상황)으로 인해 지반의 침하와 생명체의 생육에 지장이 초래되어 이런 사달이 난 것 같아 보였다. 십여년전만 해도 제주 여행에 오름을 찾는 이들이 없었는데 이제는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에도 오름 하나씩은 끼워져 있다. 바이오필리아 즉, 자연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애착의 증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누군가는 이를 더욱 보존하기 위해 애를 쓰고 누군가는 이용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말이다.

 아끈다랑쉬 오름은 늘 어떤 그리움 같은 표징을 자아낸다. 바람 거칠은 곳에 겨우 자라는 나무가 소나무와 후박나무인데 멀리서 원경으로 보면 그 자태가 어떤 나무인지 분간하지 못한다. 육지의 통념으로 저건 소나무 일 것이다 라고 여기던 것이 가까이서 보니 후박나무였다는 것을 확인한게 몇해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선입견 혹은 보았던 것에 대한 경험의 일상성이 다른 상상을 차단해 버리는 구습 혹은 예단이 늘 평범함을 가장하고 반복되지 않았나 뉘우친 적이 있다. 이른바 꼰대라고 불리는 이유가 이런데서 연원한 것이기도 하다. 풍찬노숙에도 이 오름의 상징목이 된 후박나무에게 예를 갖추고 정상 안부의 원형으로 된 탐방로를 걷는다. 솟아 있거나 누워있는 모든 풀들은 억새다. 씨앗을 날려버린 앙상함도 군집을 형성하고 있으면 마치 볏단이나 조릿대가 연이어 서 있는 것처럼 걷는 사람을 옹위해주는 힘을 지녔다.

일출봉에서 뒤돌아 본 발자국.

 육지의 시선으론 알지 못하는 것들

 바람 특별시라 할 제주의 모든 자연물에는 바람의 속도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는 내성이 갖춰져있다. 그것을 육지의 시선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흘려 버리기 일쑤다. 제주를 찾는 여행자들의 태반이 그러하고 나도 또 그렇다. 삶의 경험이 미비한 가운데 단 몇번의 조우로 해석하고 공유하며 우겨대는 세상에게 제주의 바람은 쓰다듬듯 추어올리듯 충고한다. 살아보면 슬픔은 모래알만큼 많았고, 기쁨은 모래알보다 적었다는 제주인의 생애사를 말이다.

 오름은 분화구를 지니는데 위에서 보면 낮은 경사도를 지니고 패여 있어 그 구멍 아래로 내려가고픈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출입금지의 금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불문율처럼 아무도 가지 않는다. 그저 주능선을 걷는 것으로 심연의 깊이를 가늠할 뿐이다. 눈앞으로 오름들의 무리가 지나가고 그 사이에 흰눈을 뒤집어 쓰고 있는 한라산의 정상이 보인다. 언제 보아도 영험한 그 산은 제주가 한라산이고 한라산이 제주라는 말을 입증하듯 그 자체로 선연하다. 일출봉과 우도섬의 모습도 환하게 보여준다. 제주 동쪽편의 오름 걷기에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바로 산과 바다와 뜨락과 오름들을 한몫에 다 보여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금 느껴본다.

바람이 길을 내준 용눈이오름의 정상안부.

 이제 조심스럽게 하산을 하며 저편에 보았던 용눈이 오름을 예찬한다. 그런 내 속내를 형은 금방 알아내고 온 김에 용눈이까지 마져 보자고 한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같이 3개의 곡선을 형성한 이곳의 아름다움을 가장 사무치는 모습으로 담아낸 김영갑 선생님이 떠오른다. 갤러리 두모악에 모셔져 있는 선생님의 사진작품을 보면 빛과 그림자의 시간을 본디의 질감으로 담아내려는 기다림의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다림에 비춰 너무나 짧은 찰나에 셔터를 누르지만 작품 하나하나마다 선생님의 삶이 오롯이 투영된 듯 해 늘 설레이며 갤러리를 가고, 거기서 하이라이트는 역시 용눈이임을 재확인하고 돌아온다. 용눈이에 직접 갈때마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에서 주어진 광경이 올 것이라는 기대치는 1도 안한다. 그저 난 편승한 것일 뿐이니. 새롭게 조성된 탐방로는 긴 호흡으로 오름의 자태를 감상하도록 배려되어 있었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전체 능선을 돌아보지 못하고 동쪽 정상부만 개방되었다.

 역시 이 오름에서는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 오름을 원경으로 그윽히 바라보는 눈맛이 일품이다. 다랑쉬 오름은 마치 중절모와 같은 자태를 하고 아끈다랑쉬오름은 커다란 원구 모양으로 눈에 안긴다. 눈이 말끔해지는 선물을 받았으니 이제 하산을 한다. 저녁을 형네 집에서 하고 잠자리에 든다.

벌써 피어버린 유채꽃.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아침 행로는 나의 독자적인 길이다. 제주올레길 1코스와 2코스의 중심으로 간다. 일출봉이 아름답게 보이는 광치기해변에서 출발하여 일찍 피어버린 유채꽃을 감상하고 그 노란꽃과 검게 그을린 일출봉의 부조화속 조화에 눈길을 던진다. 그리고 내수면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겨울이지만 온화한 날씨는 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든다.

 호젓하게 철새들의 무리를 둘러보는데 의외로 쇠물닭이 많이 보인다. 물고기보다는 수초를 더 좋아하는 새들의 천국이 이곳인가 싶어진다. 호수처럼 잔잔한 물을 보며 걷다가 작년의 해국이 아직도 성성한 것에 놀라기도 하고, 한국 특산의 무궁화라는 황근의 군락지도 만난다.

 씨방이 아직 남아있는 것을 골라 몇 개의 씨앗을 챙긴다. 재작년 채집한 것을 심었더니 벌써 40센티 정도 자란 황근을 나는 반려식물로 여기고 있다. 문익점도 아니면서 씨앗을 챙기는 버릇은 어느 곳을 가든지 반복된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

오조리 동네책방에서 잠시 멈춤.

 그렇게 제주도의 노적봉과 같은 식산봉을 거쳐 성산항으로 갔다가 다시 오조리 마을로 들어섰다. 이 외진 곳에서 동네책방이 있으니 들러볼 수밖에. 가볍게 크로스 백 하나를 메고 출발했는데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후각과 환상”이란 책을 비롯해 몇 권 담았더니 만찬을 끝낸 내 배처럼 여지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다시 걸어 일출봉을 향했다. 해 떠버린 일출봉이지만 밀린 숙제같이 20여년 동안 오르지 않았던 그곳에서, 작은 생명들에게 눈길을 주며 놀멍놀멍 걸었던 제주 걷기의 피날레를 장식할 참으로. 외길이었던 그 오름길이 오가는 이들이 섞이지 않도록 따로 배치된 것과 여기까지 오르는 이들 대부분이 중화권 사람인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걷기 여행의 이틀을 마감하고 3일째, 버스승강장까지 5킬로 정도를 걸어나와 제주와 작별할 공항으로 향했다.

 글·사진=전고필(여행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