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의 여의도 포커스] 베트남 파병, 러시아 파병 ⓻김일성
# 북한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주류 시각으로는 우선 냉전적 요소를 들 수 있다. 사회주의 나라들을 단결시키고, 미국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베트남전 당시 사회주의권 두 강대국인 소련과 중국은 이념 및 국경분쟁 등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북베트남은 원하는 만큼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김일성은 북한군 파병으로 사회주의권을 자극하고 그들을 단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북한과 북베트남 양국의 친선 관계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이어왔다.
북한의 베트남전 참전 의도는 이 밖에도 다양하게 분석된다. 이른바 ‘조선 혁명 승리’를 앞당기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중소 분쟁 당시 독자적 외교 노선 구축을 위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이밖에 당시 급변하던 세계 정세, 즉 중소 분쟁 격화와 사회주의 진영 분열 심화, 한미일 삼각동맹 출현, 일본 군국주의 부활 등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북한이 방어적 대응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투병 파병은 이 같은 모든 요소들에 앞서 무엇보다 양국의 계산이 맞아야 한다.
공군 전력이 없다시피 한 북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공군이 만들어졌고, 소련과 중국의 교육으로 일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이 6.25 당시 미군과 공중전을 벌였다는 점이 북베트남으로선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도 6.25 이후 처음으로 미군 전투기와 실전을 경험할 수 있고, 잘만하면 추락 미군기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다.
# 이렇게 북한은 ‘혁명 동지’ 북베트남을 도와주면서도 나름의 다양한 계산을 했다. 이와 관련 북한과 북베트남, 그리고 김일성과 호찌민은 혈맹이면서 사회주의권 경쟁자였다는 시각도 있다.
북한은 베트남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도중 ‘두 개의 전선을 형성, 베트남의 미군과 한국군을 견제한다’는 의도로 남한을 상대로 한 맹렬한 도발을 이어갔다.
이에 대해선 “남한에 대한 북한의 도발은 국제적 관심과 사회주의 진영의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고 이것이 북베트남에게는 불만으로 작용”(도미엔 지음, 『붉은 혈맹: 평양, 하노이 그리고 베트남전쟁』(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했다는 평가도 있다.
1968년 발생한 김신조의 1.21 사태나 푸에블로호 사건 등도 북베트남의 구정 대공세를 위한 ‘성동격서’가 아니라 오히려 구정 대공세의 김을 새게 만들어 버렸다는 지적이다.
어쨌든 6.25 당시 제공권 때문에 고생했던 북한은 미 공군과의 실전 경험을 쌓고 대공 방어망을 가동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즉 도와주는 생색은 내되 철저하게 실속을 차린 것이다.
물론 북베트남도 북한이 무슨 생각을 갖고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북베트남은 북한이 추락한 미 공군기를 좀 달라고 하자 단호하게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북한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시기와 규모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있다. 북한과 베트남이 2000년 이전까지 참전 사실을 철저히 숨겼으며, 관련 자료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또한 탈북 조종사들의 증언과 베트남 및 북한 측 자료가 엇갈리는 부분이 많아 관련 연구 역시 쉽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숨겼던 북한은 2000년 이후 참전 사실이 밝혀지자 차제에 베트남과의 외교적 관계를 회복하는 데 활용했다.
그러나 북한은 참전 사실이 공개되기 전부터 대내적으론 베트남 전쟁관을 설치, 참전 조종사 강연회 개최 등 소위 ‘선군정치’ 성공 사례로 활용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 앞서 지적한 대로 북한은 베트남 전쟁 당시 치열한 대남 공세를 퍼부었다.
김일성은 베트남전으로 남한 국민들 사이에 반전, 반정부 의식이 생겨 소위 ‘남조선혁명’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각급 당 책임비서들에게 “남조선에서 혁명조직을 잘 꾸리고 선전 사업을 강화, 남조선 인민들을 하루라도 더 빨리 각성시키라”고 주문했다.
이에 따라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일어나며 한국전 휴전 이후 최고조의 군사적 긴장 국면이 조성됐다. 북한의 이 같은 의도에 대해서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 기도의 일환이라는 시각과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시각 등이 있다.
북한의 도발 중 청와대가 피습당할 뻔한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 차는 한미 관계에 심감한 균열을 내기도 했다. 1.21 사태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던 존슨 대통령은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적인 대처를 했던 것이다.
이런 차별적 대응은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 실효성에 대해서까지 의구심을 품게 된 계기가 된다. 박정희가 1970년대 들어 자체 핵 개발로 눈을 돌리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심지어 당시 박정희는 군부에 수차례나 ‘북진’을 명령하기도 했다. ‘제한전쟁’으로도 불리는, 일촉즉발의 1968년 한반도 상황이 다음 주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