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원의 여의도 포커스] 베트남 파병, 러시아 파병 ⓼1968년 한반도
# 기자는 공무원이던 부친을 따라 1967년 가을 고향을 떠나 무악재의 안산(연세대 뒷산) 달동네로 이사했다. 다음 해 1월 21일 밤, 갑자기 조명탄이 터지고 밤새 콩 볶는 소리가 건너편 인왕산과 안산 일대를 흔들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노린 북한 124군 무장 공비가 삼청동까지 침투한 ‘1ㆍ21사태’였다. 할머니는 ‘인공(6ㆍ25 당시 적 치하의 인민공화국)때 같다’며 우리 형제들 몸 위로 솜이불을 덮어주셨다.
총알이 나무는 뚫어도 솜은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밖이 시끄러워 나가보니 머리가 풀어진 사람이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고 있었다. 하필 눈이 딱 마주쳤다.
사람들 말로는 간첩이라는데, 이상하게 초등 교과서에 그려진 ‘빨갱이’와 달리 얼굴이 붉지 않고 머리에 뿔도 없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였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무장 공비 31명이 청와대까지 진출, 총격전을 벌이자 국민들은 경악했다. 군경 작전 끝에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으로 도주했으며 김신조만 생포됐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포함 30명이 전사, 사망하고 52명이 부상당했다.
중앙정보부는 복수를 위해 평양에 침투시킬 684부대를 창설했으나 미-중 화해 기류에 따라 방치된다. 이들은 1971년 무장을 하고 청와대로 향하다 노량진 유한양행 앞에서 폭사한 '실미도 사건'을 일으켜 전원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적화통일 시도이건, 더 이상의 남한 병력 파병을 막아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한 도발이건 그해 대한민국은 북한과 사실상의 ‘제한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전쟁의 불똥이 한반도로 옮겨붙었던 것이다.
# 이틀 후인 23일, 이번엔 동해에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나포됐다.
북한 초계정이 푸에블로호에 접근, 정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해상에 있음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약 1시간 뒤 3척의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나타나 해군 장교와 수병, 민간인 등 83명과 함께 나포한 것이다.
미국이 엔터프라이즈 핵항공모함을 동해에 파견하자 한반도는 전쟁 일보직전의 초긴장 상태에 빠져들었다.
소련의 거부로 외교교섭이 실패하자, 미국은 한국 정부의 반발을 무시한 채 판문점에서 북한과 28차에 걸친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결국 미국은 영해 침범을 사과하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납북된 지 만 11개월 만인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를 송환받았다.
북한은 1986년 대동강변에 ‘제너럴셔먼호’(1866년 평양에서 군민들에게 소각되고 승무원 전원이 사망한 중무장 미국 상선) 격침비를 세웠는데, 바로 옆에 푸에블로호를 정박시켜 대미 항전의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해 북한의 도발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10월 울진·삼척에 대규모 무장 공비가 침투한 것이다.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에 걸쳐 남파된 무장 공비는 총 120명. 그들은 연말까지 강원도 일원에서 격렬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는 한국전쟁 휴전 후 최대 규모 도발로, 침투한 무장 공비 중 113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됐다. 군경 7만여 명이 소탕 작전에 투입됐고 이 과정에서 군경 40명과 미군 3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23명이 사망했다.
이와 함께 북한 도발에 의한 휴전선 일대의 남북 교전도 급증, 전사자가 속출하면서 한반도는 1968년 내내 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 청와대가 위험했던 1ㆍ21사태 직후, 박 대통령은 즉각적인 보복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 와중에 또 다른 전쟁을 원치 않았고, 나포된 푸에블로호 승무원 때문에라도 북한과의 협상을 택했다.
박정희는 미국 대사를 불러 얘기했다. “이틀이면 평양에 갈 수 있을 거요.” 미국 대사의 대답은 ‘하시려면 단독으로 하시오’였다. 존슨은 사이러스 밴스 특사를 파견했다. 공격을 막으면 베트남 파병 한국군을 철수하겠다는 박정희에게 그러면 주한미군을 빼겠다고 응수했다.
분노한 박정희는 밤이면 술에 취했고 그 자리에서 휴전선 돌파 명령을 내리곤 했다. 그때마다 장군들은 일단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으로 위기를 넘긴 후 유엔사 사령관에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정일권 총리와 이후락 비서실장도 밴스 특사에게 박 대통령을 좀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박정희는 북한의 발전상에 초조함을 느꼈고, 북한과의 어떠한 접촉도 금지했다. 축구 잘하는 북한(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패배하는 게 두려워 FIFA에 벌금 내고 월드컵 예선 출전을 포기할 정도였다.
당시 한국은 경제와 군사력 등에서 북한에 뒤져 있었다. 미국의 도움 없는,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정확히 60년 만에 북한의 러시아 파병이 이뤄지면서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기로에 선 대한민국 외교-안보 현주소가 다음 주 마지막 글의 주제다.
서울본부장 겸 선임기자 kdw34000@gjdream.com